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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투자

[투자] 대공황에서 리즈를 맞이한, 리버모어

by Spacewizard 2026.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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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취업한 이후로 결혼하기 전까지 3년 동안 많은 책을 읽었었는데, 아무래도 투자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대학시절에도 돈과 자기개발에 관한 서적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만큼 다양한 이들의 투자경험을 알고 싶었다. 카페·지하철 등 공간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책을 펼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커버의 보라색 라인이 눈에 들어오는 두꺼운 책 '위대한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과 '주식 매매하는 법'을 합쳐 놓은 책이었다. 제시 리버모어(Jesse Lauriston Livermore)는 롱아일랜드 대저택과 90m급 요트, 14명의 하인, 맨해튼 펜트하우스, 쇼걸·여배우들과의 유흥, 대규모 명품 쇼핑 등으로 대표되는 사치스런 생활을 했지만, 여러 번의 파산 끝에 1940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갓 30살이었던 사회초년생에게 천재적인 파생투자자의 화려한 생활과 비극적인 말년은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사회초년생이 주식이나 파생상품을 통해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이 뭐가 나쁘랴. 실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ELW투자(풋)으로 하루 수백만원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그 날 번돈으로 강남 신세계백화점에서 여자친구의 구찌 장지갑을 깜짝선물했었는데, 참 풋풋했었다. 당시에는 아고라(다음)가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장마감 후에는 아고라 게시판의 글을 정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916년 찰스 미첼(Charles E. Mitchell)은 내셔널시티컴퍼니(내셔널시티뱅크 증권자회사)의 부사장으로 영입되었는데, 그 전에는 1911년부터 자신의 투자회사를 운영했었다. 1921년 미첼이 내셔널시티뱅크·내셔널시티컴퍼니의 사장으로 선임된 이후, 소액예금자를 상대로 한 대출과 증권 인수·판매를 공격적으로 확대하면서 1920년대 주식버블을 키웠다. 1920년대 수 백만명의 미국인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몰렸고, 마침 1920년대 내내 주식시장이 상승하면서 미국인들은 주식차익·부채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공황에서 리즈를 맞이한, 리버모어

 

리버모어의 공매도 투자는 1920년대 중후반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29년 3월 25일 월요일 아침 리버모어는 주식시장이 폭락 직전이라고 확신했고, 전재산 700만 달러를 이용하여 1.5억만 달러를 공매도에 투자했다. 다음 날 연준이사회가 시장과열을 식히기 위한 금리인상을 논의하면서, 주식시장에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콜금리가 20% 수준으로 오르면서 은행들은 대출금리도 올랐고, 증권사들은 현금 추가납입이 없는 계좌를 강제로 청산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시기 리버모어는 28시간 만에 8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게 된다. 급락하던 주식시장은 미첼의 발언으로 다시 반등하게 되는데, 내셔널시티뱅크가 공격적인 대출을 진행하겠다고 한 것이다. 

 

1929년 10월 21일 월요일 오전 10시 리버모어는 기자회견에서 주식시장의 과대평가를 언급했고, 이틀 뒤인 23일 오전 공포가 주식시장을 엄습했다. 우량주 주가가 순식간에 20~30% 하락했고, 결국 다우지수는 7% 가량 하락하면서 장마감했다. 신용투자자 상당수가 파산했지만, 피셔는 다시 상승할 것이라는 강세론을 펼쳤다. 

 

10월 28일 월요일 오전 강한 매도세가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다우지수는 13% 가량 폭락하면서 마감했다. 다음 날인 29일에도 강한 매도세는 여전했다. 은행의 파산과 기업의 CEO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졌다. 다우지수는 1931년까지 90% 가량 하락했고, 주식투자자의 파산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미국 공장 노동자의 25% 가량이 일자리를 잃었고, 판자촌과 무료급식소가 늘어났다. 막대한 레버리지로 주식에 투자한 피셔도 많은 재산을 날린 후, 예일대가 그의 집을 사서 다시 임대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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