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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치력을 행사하는 비정치인, 벌(閥)

by Spacewizard 202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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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는, 벌(閥)

벼슬·재력·군사력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집안들

중국 군벌의 씨앗을 뿌린, 태평천국의 난

태평천국의 난이 가져온 사회변화, 군인과 여성

 

많은 뉴스·드라마에서는 재벌이 주인공으로 다뤄지곤 한다. 재벌이라는 표현은 상용화되었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재벌의 제대로 된 정의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자주 하는 말 중에 '학벌이 좋다'는 표현도 관용적으로 학력만 우수하다고만 이해하지,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늘은 여러 벌족(閥族)에 붙는 '벌'이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와 그와 관련된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뭔가를 가득 쥐고 있는 가문,

 

(閥)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들을 집 안에 쌓아놓은 가문(세도가)을 의미하는데, 문(門, 가문) 안에 벌(伐, 정벌)이 들어있는 형국이다. 고려시대부터 '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사회적 신분·지위'를 의미라는 용어로 문벌(門閥)·벌열(閥閱)이 사용되어 왔는데, 이는 신하의 공을 등급으로 표시한 표지를 집대문 양편(왼편 벌, 오른편 열)에 걸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결국 이 표지가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지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굳어졌다. 과거제를 실시한 고려 전기 이후,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을 문벌귀족(門閥貴族)이라 하였다. 관료제가 정착되기 전이었던 만큼 호족을 중심으로 혈연(음서)을 통해 신분·직위를 다음 세대에게 이전하였기에, 귀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들 문벌귀족은 무신정권 이후 권문세족(權門世族)로 바뀌었다. 권문세족은 직전 지배계층인 문벌귀족에 비해 관료적 성격이 강했으며,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발전하는 과도기 단계의 지배층이었다. 사실 이들 고려 후기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따로 없어, 1960년대부터 권문세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경유착으로 일본에서 탄생한, 재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급성장하는 기업들이 생겨났다. 이들 기업들의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몇몇의 가족집단이 주요 산업들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국민경제 전체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정책방향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러했듯이, 경쟁이 아닌 정경유착에 따른 독점으로 성장한 기업 형태의 가족집단이었고, 1910년대 이를 가리켜 자이바츠(ざいばつ, 재벌)가 생겨났다. '집안·무리'를 의미하는 일본어 바츠(閥)는 재벌 이외에도 여러 단어에 붙여졌는데, 문벌(門閥, 가문), 학벌(學閥, 학교), 군벌(軍閥, 군대), 규벌(閨閥, 혼인), 번벌(藩閥, 지역)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초반 일본의 전체주의적 침략전쟁의 배경에 재벌이 기획한 이익추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종전 이후 일본의 재벌 해체에 주력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재벌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단순히 돈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곤 했다. 오늘날에도 자신(내지 자기가 속한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돈 많은 부류들을 농담조로 재벌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업가들은 아무래도 자본축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 내 일본인 사업가나 일본 본토 사업가에 비하면 영세한 수준의 부자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 적의 재산)이 미군정을 거쳐 불하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원조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한국에도 진정한 재벌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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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가 이전의 사실상 국가권력, 군벌

 

군벌(軍閥)개인이 군사력을 갖고 있는 정치적인 실력자를 의미하는데, 큰 규모의 사병을 거느린 개인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전 글 <오랜시간 차단된 공간에서 열린, 송현>에서는 본인의 권력기반이었던 사병을 빼앗긴 이방원이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고 언급했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고려 말 유력 군벌 중의 하나였다. 거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의 역사는 통일·분열의 반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중국의 황제시스템만 알고 있을텐데, 불과 100여년 전인 청말과 중화민국 초기의 중국정치에서는 군벌을 빼놓을 수 없다. 중화민국은 지배군벌에 따라 크게 2개의 시기로 구분되는데, 전반부(1912~1928)는 북양군벌이 지배했던 베이징정부이고, 후반부(1928~1949)는 쑨원에 이은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의 국민당이 지배했던 난징정부(국민정부)이다. 북양군벌의 중심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는 1916년 사망했다. 북양(北洋)은 랴오닝성(遼寧省, 요녕성)·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산둥성(山东省, 산동성)을 말하며, 당시 남양(南洋)과 대비하여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이북 일대를 일컫었다. 참고로 동북3(만주)은 랴오닝성·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지린성(吉林省, 길림성)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지도:위키피디아]

군벌시대 동안 지역별로 파벌을 형성한 군인들은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군벌들이 나라·국민의 명운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되면서 군벌체제는 오래 가지 못한다. 물론 어지러운 군벌시대를 정리한 최후의 군벌 장제스도 당내당(국민당 속의 공산당)에 의해 무너지면서, 오늘날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합종연횡은 서로 다른 집단·세력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는 전략으로, 중국 전국시대의 외교전략 중 하나였다. 합종(合縱)은 약소국들이 강대국에 대적하기 위한 종적 공조를 의미하며, 연횡(連橫)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기 위한 횡적 연대를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를 이루던 7웅(七雄) 중 가장 강한 국가는 서쪽의 진(秦)이었고, 나머지 6국(조한위연제초, 趙韓魏燕齊楚)은 약소국이었다. 소진(蘇秦)이 주장한 합종책은 열세의 6국이 동맹을 맺고 강대국 진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실제 6국의 군사동맹을 성사되었다. 이런 합종책을 와해시킨 전략이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책인데, 소진과 장의은 친구 간이었다. 장의는 합종책으로 결속된 6국을 찾아다니며, 강대국 진과의 연대가 더 안전하다는 설득을 한 것이다. 전국시대와 같이 군벌시대에도 배신·변절·이이제이·합종연횡은 일상이었는데, 어제의 상사·친구가 하루 만에 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군벌의 씨앗을 심은 난리, 태평천국의 난

 

군벌의 탄생은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까지 이어지는 혼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0년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하면서 반봉건·반식민 상태에 들어간다. 이후 1851년 대대적인 반봉건·반제국주의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다. 태평천국운동, 장모(長毛)의 난, 장발(長髮)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민심이 흉흉했던 청나라 말기, 훙슈취안(洪秀全, 홍수전)은 하늘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로부터 타락이 극에 달한 중국을 구제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며, 천주교리를 모방한 배상제회(拜上帝會, 태평천군의 전신)를 창시했다. 배상제회는 청 조정의 타파, 봉건지주 토지소유 폐지 및 계급평등 등의 기치 아래 태평천국은 하층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1851년 1월 훙슈취안은 추종자를 중심으로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세우고 스스로 천왕에 올라 지상천국을 수립하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참고로 태평천국의 난은 훙슈취안이 병사한 1864년까지 약 14년 동안 지속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만주족)·녹영군(한족)은 난리를 진압하지 못했다. 이에 청 정부는 각지의 향신세력(한족)이 보유한 민생자경단으로 임시군대를 조직할 것을 명하게 되는데, 이 사병을 향용(鄕勇)이라 불렀다. 향용은 중앙정부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군벌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후난성 쩡궈판(曾國藩, 증국번)의 상군(湘軍)과 안후이성 리훙장(李鴻章, 이홍장)의 회군이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문신 우대가 심했는데, 이는 고려·조선도 그대로 답습했다. 따라서 출세를 위해서는 문과에 합격해야 했고, 군대도 문신이 지휘하는 구조였다. 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속담 「호철불타정(好鐵不打釘) 호인부당병(好人不當兵)」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좋은 쇠로는 못을 만들지 않고,
훌륭한 남자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

 

태평천국의 난의 혜택을 본, 군인과 여성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 이후부터는 향용에 입문한 군인이 지방 고위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관도 신분상승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였다. 도둑이라는 의미를 가진 두 한자어가 합쳐진 비적(匪賊)은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살인·약탈 등을 일삼는 도둑을 말한다. 토비(土匪)는 민생자경단이라고도 부르지만, 사실상 비적질하는 토착민이었다. 자경단(自警團, vigilante)은 특정 지역의 주민들이 범죄·재난에 대비해 자기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단체를 의미하는 단어지만, 봉건시대에는 영주의 끄나풀에 불과했다. 청나라 말기 토비들은 중앙정권의 요청으로 공식적인 군벌이 되었고, 중앙권력까지 넘보는 수준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배상제회는 건전한 성문화를 정착시킨 종교로 유명하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성윤리와 성매매는 매우 문란한 상태였는데, 훙슈취안은 성매매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태평천국의 평등사상·매춘금지는 직업여(궁녀·기생·창녀)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태평천국이 여성해방사상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은데, 청과 조선에서 기녀제도가 폐지된 계기가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얘기도 있다.

 

인류사에서 각종 '벌'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이익집단으로 자리잡게 된 현상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살다보면 믿을 만한 관계가 직계가족 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마저도 재력·권력을 덜 가진 집안에서나 해당되곤 한다. 각자 주변의 친척관계를 돌아보면, 부모·형제를 넘어선 삼촌·사촌은 거의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가문을 바탕으로 형성된 '벌'은 전리품들을 유지·성장시킬 확률이 그나마 높은 운영형태였던 것이다. 하긴 폭력조직들도 파벌을 형성하면서, 피 한방울 안 섞였지만 '가족(내지 식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그나저나 '벌'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나니,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과연 저 가족들은 어떤 '벌'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집은 그 어떤 '벌'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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