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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신세계를 연, 미쓰코시

by Spacewizard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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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상위를 점위하는, 신세계백화점

일본·경성 최초의 백화점, 미쓰코시

신세계백화점 본점 부지의 과거, 미쓰코시 경성지점

해방 이후, 불하·인수를 거쳐 온 현재

 

2024년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김지원 분)은 '매출 1조원 달성'을 슬로건처럼 말하고 다닌다. 실제 2023년 말 기준으로 매출 1조원을 넘긴 국내 백화점 점포는 12개이며, 드라마에서 퀸즈백화점 촬영장소였던 더현대백화점이 매출 1.1조로 딱 12위였다. 상위 12개 점포의 매출은 다음과 같은데, 그룹별로는 신세계백화점 4개, 현대백화점 4개, 롯데백화점 3개, 갤러리아백화점 1개이다.

 

신세계 강남 : 3.06조원
롯데 잠실 : 2.75
롯데 본점 : 2.01
신세계 센텀시티 : 2.00
현대 판교 : 1.66
신세계 대구 : 1.49
현대 무역 : 1.26
롯데 부산본점 : 1.20
현대 본점 : 1.18
신세계 본점 : 1.14
갤러리아 명품관 : 1.14
현대 서울 : 1.10

 

일제강점기 경성의 상권은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2개로 구분되었는데,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의 남촌상권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의 북촌상권이다. 당시 경성에는 5개의 백화점이 있었는데, 일본계 4개(미쓰코시·조지야·미나카이·히라다)와 조선계 1개(화신)가 각각 남촌·북촌에 위치했다. 일본계 백화점은 모두 진고개 일대에 위치했으며,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1885년 진고개 일대가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지정된 전후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일본인 거리는 남쪽으로 명동·을지로, 서쪽으로 남대문까지 확대된다. 아무래도 당시 경제권을 일본인이 쥐고 있다보니, 상권의 분위기는 남촌이 더 화려하고 활력이 넘쳤을 것이다. 1852년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마르셰(프랑스)가 세워진 후, 근 150년 이상 백화점은 소비공간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유지해왔다. 오늘은 이 땅의 최초의 백화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제강점기 5개 백화점 [출처:카카오맵]

판매방식의 혁신을 가져온, 미쓰이

미쓰코시는 일본 최초의 근대 백화점으로 알려져 있는데, 1673년 미쓰이 타카토시가 에도 혼마치(本町, 본정)
에 차린 고후쿠텐(呉服店, 오복점) 에치고야(越後屋, 월후옥)가 미쓰코시 백화점의 기원이라고 한다. 오복점은 기모노를 파는 가게로, 상호명은 에치고야는 다카토시의 조부까지 불렸던 무사명 에치고노가미(越後守, 월후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683년 스로가쵸(駿河町) 니혼바시(日本橋, 일본교)로 이전하면서 판매방식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이 때  환전소(현 미쓰이스미토모 은행)를 같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 상품판매는 고객의 집으로 방문하여 주문을 받으면 배달하는 방식으로, 결제방식도 외상거래(연 2회 결재)이었다. 하지만 에치고야는 고객이 직접 보고 선택하게 함과 동시에 자금운용의 융통을 높이기 위해 점두판매·정찰제·현금거래(상시수금)로의 전환을 시행했다. 점두(店頭, 가게 앞)판매는 방문판매와 대조되는 용어로, 점포에 모든 취급상품을 진열한 후 고객이 선택한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이다. 많은 고객들이 이에 대한 불만을 표했지만, 에치고야는 다양한 맞춤서비스(할인혜택·소분판매·상품설명·즉석재단)을 통해 고객을 유인했다. 마침 일본경제가 나날이 성장하면서 사치풍조와 함께 고객요구의 다양성도 커져 갔다. 맟춤서비스 외에도 에치고야의 로고가 그려진 광고지·우산 등을 번화가에 뿌리면서 고객을 유치했다. 

미쓰이 오복점
17~19세기 미쓰이 오복점

일본 최초의 백화점미쓰코시

 

1893년 에치고야를 합명회사 미쓰이오복점(三井吳服店)으로 개편한 후, 1895년 이사로 취임한 타카하시 요시오는 경영개혁에 착수했다. 미국 유학파인 타카하시는 유키치 후쿠자와의 일본 근대화 정책을 신봉했으며, 미국 ​필라델피아의 백화점 워너메이커(wanamaker)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00년 타카하시는 니혼바시 매장 전부에 상품진열대를 배치하고 장부기록도 서양식으로 전환하는 혁신을 단행한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까지만도 상품을 매장 앞에 진열하지 않고 뒤쪽에 보관했으며, 마주 앉은 손님이 요구하면 점원이 상품을 가져다 주던 방식이었다.

 

1904년 주식회사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가 설립되었고, '백화점 선언'을 통해 일본 최초의 백화점이 된다. 이 때 1691년 개점한 오사카점은 폐점했다. 1904년 12월 미쓰코시는 선언문을 통해 근대 백화점의 상품진열 방식으로 전면 개편한다는 소식을 고객·입점업체들에게 알렸고, 1905년 초 각종 신문의 전면광고에 선언문을 실었다. 미쓰코시오복점의 개혁의지는 '백가지 물건을 파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백화점(百貨店) 대신에 전에 없던 영단어를 명기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선언문는 가타카나로 디파트먼트 스토어(department store)가 적혀 있었고, 이전까지 히라가나로 쓴 백화점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그만큼 서양식 근대적 영업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1914년 르네상스 양식의 니혼바시 본점이 신축되었는데, 일본 최초의 에스컬레이터·엘리베이터를 갖춘 건물이었다. 본점 정문은 사장상으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의 사자상을 본떠 만든 것이라 한다. 1928년 주식회사의 상호가 '미쓰코시오복점'에서 '미쓰코시'로 변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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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화점의 시작, 미쓰코시 경성지점

 

1906년 미쓰코시오복점은 명동에 경성출장소(현 사보이호텔 건너편)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일본인을 상대로 통신판매를 하는 출장원의 대기소 역할이었고, 명칭도 미쓰코시 오복점(吳服店)이었다. 1916년 10월 르네상스 식의 3층 건물을 건립한 경성출장소는 1929년 9월 지점으로 승격했다. 1930년 10월 진고개 입구(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대형 백화점 건물(지상 4층, 지하 1층)을 건립하였는데, 국내 최초의 백화점이자 당시로서는 가장 큰 상업시설이었다.

 

종업원 360명 가량을 둔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영업·관리 측면에서 체계화된 경영체계를 갖췄었다. 전반적인 기획업무는 일본 본점 기획실에서 맡았으며, 경성지점에서 총책임을 지는 지점장과 차장이 있었다. 차장 아래로 9개의 부서(인사, 서무, 경리, 선전, 식품, 오복, 잡화, 의류, 조선 물산부)와 2개의 계(서무부 영선계, 경리부 계산계)가 있었다. 전체 매장의 운영은 직영체제로 하였으나, 일부 품목(귀금속·식품 등)에 대해서만 임대체계로 운영하였다. 임대료(수수료)는 매출의 10% 수준이었다고 한다.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다음과 같은 매장의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방 전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지하 1층 : 식료품, 간이식당, 유리그릇, 주방용품, 일반잡화   

지상 1층 : 화장품, 고급식료품, 신발(게다·조리 등), 약국, 여행안내소, 단체주문 상담실 

지상 2층 : 오복(일본 옷)

지상 3층 : 양품(양복·모자·구두)

지상 4층 : 귀금속, 가구, 대형식당(커피숍 겸 식당), 대형 홀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백화점 운영

 

오늘날까지도 미쓰코시 경성지점의 매장 구성의 큰 틀은 유지되는 느낌인데, 특히 1층 화장품, 지하 식료품·식당 등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고객이 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오복코너에는 기성복·맞춤복이 두루 있었으며, 조선의 주단·포목은 취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품코너에도 맞춤복 봉제가 가능했는데, 매장 내 재단사와 제작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가격정책은 정찰제가 원칙이었지만, 연 2차례의 정기세일(2월말·9월말) 기간에는 원가 수준의 할인가로 판매했다고 한다. 판매직원들이 일본인에게는 일본어로, 조선인에게는 조선어로 인사하였다고 하니, 직원교육과 고객서비스에도 신경을 크게 쓴 것으로 보인다. 90여년 전의 백화점 조직체계나 운영방식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놀랍다.

 

당시에도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쇼핑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기능이 문화공간으로 확대되지 않았을까 한다. 일본인과 조선인 상류층들이 식민지에서 쌓은 부를 과시·공유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관료·회사원들은 내지(일본)에서 보다 2배 가량 높은 급여를 받고 있었기에, 백화점의 주요 고객층이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1인 2역을 한 쌍둥이 자매 안옥윤·미츠코가 마주친 곳이 미쓰코시 경성지점으로 나온다. 극 중 미츠코가 코트가격이 도쿄의 2배라며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지역고객의 소득수준에 맞게 지점별로 차등화된 가격정책을 가졌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문화통치를 통해 조선인들도 부유층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일본제국에 부역한 대가가 아니었을까 한다. 드라마 「경성클리처」에서 조선인 권준택(위하준 분)의 아버지는 친일행위를 하며 부강상사라는 큰 회사를 일군 인물로 나온다. 일본인들도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옹성병원을 출입할 수 있는 집안신분이라는 점에서, 당시 조선인 부역자는 일본인 못지 않은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불하·인수를 거쳐, 신세계백화점

 

1945년 9월 15일 미쓰코시 경성지점의 상호는 동화백화점으로 변경되었고, 종업원 대표가 관리하는 체제로 운영되다가 적산으로 처리되었다. 이전 글 <정치력을 행사하는 비정치인, 벌>에서도 해방 이후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이 미군정을 거쳐 불하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원조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한국에도 진정한 재벌이 등장했다고 언급했다. 1948년 동화백화점의 소유권은 한국무역협회로 불하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PX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전 글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에서는 1948년 군산 이성당이 적산 이즈모야 과자점 건물을 불하받아 이전했다고 언급했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개인 강희원(동방생명 소유)에게 불하하였다. 1961년 7월 5·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외래품 판매금지 조치'를 실시하였는데, 이 때 부정외래품을 주로 팔던 백화점들은 경영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62년 동화백화점은 동방생명에 인수되었고, 이듬해 1963년 동방생명(훗날 삼성생명)도 삼성에 인수되었다. 1963년 11월 동화백화점의 간판을 신세계백화점으로 바꾸고 영업방식도 임대에서 직영으로 전환되었다. 

 

학창시절 익숙한 건물 중에 3.15대로변에 위치한 '경남데파트'가 있다. 경남데파트 뒤쪽에는 입시학원인 유상학원이 있었고, 왠만한 시내버스들도 경남데파트 앞을 지나갔다. 데파트는 디파트먼트 스토어(department store)의 일본식 표현이지만, 백화점이라기 보다는 주상복합에 가깝다. 1983년 1월에 준공된 경남데파트도 지상 1~2층, 상가 3~5층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층부 주거시설과 하층부 상업시설을 동시에 갖춘 주상복합건물을 데파트라 불렀던 것 같다. 이전 글 <맨션과 함께 화려했던, 빌라>에서 일본은 한국과 달리 3층 이상의 공동주택을 맨션이라고 지칭한다고 언급했었는데,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도 처음에는 데파트를 붙였다가, 이후 맨션으로 개칭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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