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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적으로 변신하는, 의료실비

by Spacewizard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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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연말 저녁, 지방에 계신 어머니께서 내 명의로 의료실비보험을 하나 가입하겠다고 말씀주셨다. 당시에는 홈쇼핑으로 의료실비보험을 한창 판매하던 시기였는데,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홈쇼핑도 의료실비보험도 별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사실 1년 전인 2007년 처음으로 치루수술을 받긴 했으나, 정신도 없었고 비용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료실비보험의 효력을 제대로 알게된 계기는 2012년 초 강원도 스키장에서 손목골절사고를 당했을 때였다. 골절부위가 퉁퉁 부웠는데도, 서울로 돌아오는 몇 시간 동안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던 기억이 난다. 한양대학교 응급실에서는 몇몇 검사 후에 골절로 진단했고, 다음날로 수술스케줄이 잡히면서 입원수속을 밟아야만 했다. 보험사는 핀제거수술 비용을 포함한 수백만원의 치료비를 간단한 심사와 함께 지급해줬는데, 보상청구 이력이 거의 없다보니 빠른 심사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의료실비보험 보상청구를 할 일은 없었으니, 나름 평균적인 30~40대의 건강을 유지했었다. 물론 이전 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발목뼈>에서 언급한 2023년 10월 발목골절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2~3년 동안 의료실비보험과 관련하여 의아하게 생각되는 일들이 있었다. 현재 유지 중이 3만원대 보험료가 2024년에는 6만원대로 갱신된다는 문자와 함께, 수백만원의 환급금을 앞세워 실비보험상품을 변경하라는 권유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던 것이다. 발목골절사고 이후 배상책임보험·의료실비보험을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보험문외한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손해보험사에서 만 5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음에도 말이다. 오늘은 의료실비보험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표준화 이전의 의료실비보험, 1세대

 

병원원무과에서 수납하고 받는 진료비영수증을 자세히 보면, 크게 항목이 급여·비급여로 구분된다. 급여국민건강보험(건보)에서 치료행위로 인정하여 가격을 정해둔 의료항목이고, 비급여는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의료항목이다. 급여는 본인부담금·공단부담금으로 구분되는데, 환자가 실제 납부하는 의료비는 본인부담금·비급여이다. 이러한 실제 의료비를 보상하는 보험상품의 정식명칭이 의료실비보험(실손의료보험)이다.  

 

1세대 의료실비보험은 1999년 9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약 10년간 판매된 상품으로, 자기부담금(손해보험사 0%, 생명보험사 20%)이 낮고 보상범위가 포괄적인 것이 특징이다. 보상범위가 포괄적인 만큼 약관이 간단하여, 의료서비스의 빠른 발전(신약·로봇수술 등)의 수혜에도 큰 제약이 없다. 1세대(구실손)을 「표준화 이전의 실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시 보험사마다 보장내역이 달랐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입 중인 1세대 실손의료보험은 입원 최대 1억원, 통원 일 최대 30만원까지 보장되며, 보장기간도 80세 내지 100세로 초장기 보험상품이었다.

 

1세대의 잘못된 설계으로 인한 장래손실을 예상했던 보험사들은 손실축소전략에 입각하여 2세대 이후의 상품을 설계하게 된다. 가장 큰 특징은 자기부담금의 증가와 보장범위의 축소였다. 그리고 정부의 개입으로 의료실비보험의 표준화 시작된다. 2세대부터는 의료실비보험의 표준약관을 적용하였고, 10~20% 가량을 부담하는 자기부담금 제도도 생겼다.

 

정책적으로 변화해 온실비보험

 

2009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약 7년 이상 판매한 2세대(표준화실손)은 보험기간·보장한도 축소와 자기부담금 증가를 담았다. 다만 비급여가 특약으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은 1세대와 동일했다. 2013년 1월부터는 2가지 유형의 상품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 표준형(자기부담금 20%)와 선택형(자기부담금 10%)으로 구분된다. 보험은 불확실성을 담보로 하는 금융이기 때문에, 수익성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험상품은 당장의 보험료을 낮춰서 소비자의 선호도를 낮추려는 경향이 있다. 통상의 보험소비자는 미래에 받게 될 불확실한 현금유입보다 당장 지급하는 현금유출에 더 높은 가중치를 두기 마련이다. 당시에도 선택형의 보험료가 표준형에 비해 약간은 높았지만, 그 이후의 보험들과는 차별되는 특성을 지닌 마지막 상품이었다. 그 차별점은 보험기간 100세와 갱신주기 3년, 그리고 자기부담금 10%이다. 참고로 3세대와 4세대는 15년 후 재가입과 갱신주기 1년, 그리고 자기부담금 20~30%이다. 여기서 많이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재가입데, 2세대(표준형)·3세대는 15년 후의 의료실비보험으로 갈아타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4세대지만, 향후 또 다른 세대상품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17년 4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약 4년간 판매된 3세대(신실손·착한실손)에서는 자기부담금 30%가 적용되는 「3대 비급여 특약이 생겼는데, 여기에는 주사치료, 도수치료·체외충격파치료·증식치료, 영상진단(MRI·MRA)이 포함된다.

 

2021년 7월 이후 나온 4세대(새로운 실손)은 이전 상품들에 비해 내세울게 저가의 보험료 밖에 없다. 오랜 변화의 결과로 자기부담금(급여 20%, 비급여 30%)과 보장한도(입원 0.5억, 통원 20만원)이 고착되었다. 비급여 전체가 특약으로 분류되어, 횟수·금액이 50회에 최대 350만원으로 정해졌다. 2024년 7월부터 비급여 과잉진료를 방지하기 위한 4세대의 「비급여 보험료 차등제도」가 시행되는데, 갱신 전 1년간 비급여 보험금을 많이 지급받은 소비자의 비급여 보험료는 할증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할인을 받게 된다. 5단계의 할인·할증 단계에서 보험료 수령이 전혀 없었던 1등급은 5% 할인, 100만원 미만 수령한 2등급은 보험료 유지, 300만원 이상 수령한 5등급은 보험료가 3배로 할증된다. 1~3세대의 보험료 조정한도 25%와 비교하여, 향후 보험료 인상여지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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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의 수상한 친절함, 세대전환

 

2022년 9월 기준 개인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3574만명으로, 이 중 2세대 가입자 수가 가장 많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1세대를 제외한 2세대·3세대는 순차적으로 4세대로 재가입되면서, 4세대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1세대 :    827만명 (비중 23.1%)

2세대 : 1,657만명 (46.4%)

3세대 :    894만명 (25%)

4세대 :    195만명 (5.5%)

 

간혹 계리사들이 가입자에게 유리한 보험을 잘못 설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보험사는 지속적인 손실구간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보험사들은 손실축소전략 차원에서 가입자들에게 상품전환을 회유하려 하는데, 보통 특정보험상품의 초기버전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편이다. 의료실비보험에서는 1세대가 가입자에게 가장 유리한 보장을 두고 있는 바, 보험료가 아무리 올라도 1세대는 유지하려고 한다. 이미 30~40대에 의료실비보험의 혜택을 누렸고, 50대를 넘어갈수록 중대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험료 인상액을 감수할 생각이다. 물론 동일 연령대의 1세대 가입자들이 4세대로 전환되어, 보험사에 1세대 유지가 어렵게 된다면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최근 2~3년 동안 1세대 해지를 권유하는 문자·전화가 주기적으로 왔었는데, 보이스피싱 마냥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절로 해지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보험료 할인 등의 각종 마케팅과 수백만원의 환급금을 강조하며 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기업(보험사)들이 전화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수고를 한다는 것은 분명 보험가입자에게 불리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세대가 보험료 인상액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이는 큰 혜택(보험급)과 장기의 갱신주기(3년·5년)로 인한 것이다. 참고로 2~4세대의 갱신주기는 1년이며, 4세대는 인상률이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질 수 있다. 1~3세대 갱신보험료 인상율은 동일한 연령대 가입자들의 손해율을 기준으로 계산되므로, 가입기간 동안의 가입자 개인의 병력·치료력·청구이력이 갱신보험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사실상 개인 차원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어느 정도 용인될 수도 있다.

 

보험사 뿐만 아니라 국민까지 위협하는, (위험)손해율

 

위험손해율 발생손해액(보험금 지급액)을 위험보험료로 나눈 비율로, 위험보험료은 계약자들이 납입한 총보험료에서 사업비를 제한 후 보험금 지급에 사용될 수 있는 금원이다. 사업비는 적립하지 않고 보험사가 사용하기 위해 별도로 분리한 자금으로, 주로 설계사 수당, 계약유지, 마케팅 등의 비용으로 쓰인다. 손해율이 100%를 초과한다는 것은 가입자가 낸 돈보다 받아가는 보험금이 많아서, 보험사 입장에서는 해당 보험상품에서 적자를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의료실비보험에서 적자를 유지함에도, 보험사들이 매년 엄청난 순이익을 거둔다는 사실은 다른 보험상품에서 필요비용 대비 과다한 사업비를 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긴 보험사들이 직접 산정하는 의료실비보험의 손해율에 의심을 눈치를 보내는 경우도 많다. 의료실비보험 손해율을 높이는 주된 요인으로는 비급여 과잉진료가 있는데, 그 배경에는 비급여 가격·횟수에 대한 의료기관의 자율성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비급여 도수치료의 가격편차가 의료기관에 따라 최소 6배라는 조사결과도 있고, 이 보다 더한 비급여 항목도 많다고 한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의료분야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그 배경 중의 하나가 일부 의사와 국민들의 과잉진료와 도덕적 해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부분이다. 의료실비보험 손해율이 높아져서 보험사가 손실을 보면, 보험가입자 개인 차원에서는 이익일 수 있다. 하지만 갱신형 보험의 특성상 의료실비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도 함께 상승할 가능성이 크고, 더 큰 문제는 건보재정도 점차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의료실비보험이 유인하는 의료이용률의 증가가 공단부담금 지출액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료접근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불필요한 의료행위의 지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족한 건보재정은 최신 의료서비스(신약·암수술·로봇수술 등)의 급여권 편입여지를 줄이거나 없애면서, 사실상 의료민영화와 같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최신 의료서비스는 민간보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미래를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보험은 수익창출이 아닌위험대비 목적이다. 따라서 부족한 보장부분을 추가하는 방향을 계속 고민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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