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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오랜시간 차단된 공간에서 열린, 송현

by Spacewizard 202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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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까지만 해도 경복궁에서 율곡로를 따라 안국동사거리 방향으로 걷다보면, 4m 가량의 높은 돌담으로 길게 가려진 부지가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미국 소유의 부지 또는 금단의 땅으로 알려져 있던 이 송현동 부지는 한동안 국내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인 노른자위 땅이었다. 2022년 10월 어느 날 감노당길을 따라 산책하다가, 25년 동안의 서울생활에서 목격하지 못했던 생경한 모습이 눈에 확 펼쳐졌다. 처음에는 원래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착각에 몇 초 정도 혼란스러웠는데, 분명 도심 내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나대지를 인지한 후에야 새로운 공간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공간은 1.2m로 낮아진 담장으로 한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알록달록 각양각색의 꽃들로 덮여있었다. 찾아보니 2022년 10월 7일 개방된 36,642제곱미터(서울광장 3배, 축구장 5배) 규모의 열린송현 녹지광장이었다. 여기서는 오늘은 일상의 공간에 위치했으나, 약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었던 닫힌송현의 공간에 대해 알아보자.

 

경복궁 옆, 소나무 언덕

 

관광방에 속했던 송현(솔고개, 솔재) 주산 북악산에서 연결되어 내려오는 지맥으로,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관청들이 제법 들어서 있었다. 경복궁은 내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데 반해, 내청룡 낙산은 낮고 미약했던 탓에 풍수적 보강이 필요했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경복궁 좌측에 소나무 비보숲이 조성되었고, 여기서 '소나무 언덕'을 의미하는 송현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왕의 존엄과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소재였으며, 또한 땅의 기운을 강화시켜주는 효능이 있다고 하여 비보숲을 조성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비보부족한 지형이나 산세를 보완하는 방법을 의미하며, 가령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변천, 소공동 롯데 부지>에서 관악산 꼭대기를 노려보며 불을 먹을 기세를 하고 있는 광화문 앞 해태상과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숭례문 바깥의 연못 남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열린송현 녹지광장 조성 전의 송현동 부지 출처 연합뉴스
열린송현 녹지광장 조성 전의 송현동 부지 [출처:연합뉴스]

 

1394년 한양천도 이후인 1398년 4월 16일 「태조실록」에는 "경복궁 왼쪽 언덕의 소나무가 마르므로 그 가까운 언덕의 집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고 적고 있는데, 법궁과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이나 보안과 풍수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한성 내의 산림을 육성하고 산맥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사산금표제가 시행되었는데, 내청룡에 속했던 송현도 민가설치와 경작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송현 소나무숲의 범위는 장원서 북참(현 정독도서관 일대)부터 중학(현 수송동 일대)까지 길게 분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14년 수동과 송현동이 합쳐진 수송동 일부까지 송현으로 불렸던 것이다.

조선시대 송현 소나무숲 일대 지도 카카오맵
조선시대 송현 소나무숲 일대 [지도:카카오맵]

 

송현에서 최후를 맞은, 정도전

 

같은 해에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정도전의 피살사건이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지 불과 한달 사흘 만인 1932년(태조 1) 8월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 세력은 이방원과 적대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 게재된 태조의 가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개국공적과 적통성이 큰 장남 이방우(진안대군), 차남 이방과(훗날 정종), 오남 이방원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로 볼 수 있다. 물론 정도전 세력의 입장에서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심정으로 신하권력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신의 한수였을지도 모른다.

 

6년 후 1398년(태조 7) 3월부터 정도전 세력은 적대구도를 넘어 승기를 잡기 위해 사병을 폐지하고 관군을 조성할 것을 이성계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1398년 8월 중순 이방원도 사병을 잃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위축되었을 것이다. 흔히들 많이 알고 있는 격언 중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의미의 궁서설묘(窮鼠齧猫)가 있다. 사람을 너무 궁지에 몰면 약자라도 크게 반발하여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이는 도리어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사실 이 말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올랐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명심해야 한다. 이방원의 내심을 다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왕국이 정착될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왕권후보 자리를 뺏긴 억울함은 숨긴 채 지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본인의 권력기반인 사병마저 뺏어간 일이 계기가 되어 목숨을 건 승부수를 불가피하게 결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설에 의하면, 하륜은 풍문을 통해 정도전 세력이 이방원을 포함한 한씨소생 왕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궁지에 몰린 이방원이 쿠데타를 결심하였다고 한들, 중요한 것은 시기였다. 세자 이방석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선왕 생전에 일을 도모해야만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사병을 철폐된 시점을 전후하여 이성계는 중병을 앓고 있었으니, 이러한 상황은 이방원으로 하여금 신속한 결행을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1398년 8월 26일 저녁 왕족들은 근정문 밖 서쪽 행랑에서 숙직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 정도전 세력들도 송현방 내 남은 첩의 집에 모여 있었다. 정도전 또한 곧 있을지 모를 이성계 승하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그 대응에 관한 논의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저녁 10시쯤 안산군수 이숙번 등의 병사들을 대동하여 송현방으로 향했고, 그 병사들을 경복궁, 육조거리 및 남은 첩의 집 주변에 배치하였다.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웃집 3곳에 불을 붙인 후 진입한 쿠데타군은 정도전, 남은, 이직을 제외한 나머지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정도전은 간신히 담을 넘어 옆집으로 대피하였으나, 그 집주인이 숨여든 '배가 볼록한 자'를 신고하면서 정도전은 잡히게 된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 정도전이 최후를 맞이한 송현방 내 남은 첩의 집터가 현재 중학동 트윈트리타워 즈음으로 추정된고 언급했는데, 열린송현 녹지광장 바로 맞은 편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 자연스레 송현에 대한 관심으로 식어가게 된다.

 

경화세족의 화려한 주택지, 가성각

 

송현은 경복궁 건춘문과 종친부와의 접근성이 우수한데다가, 일조와 배수가 잘되어 주거지로서 훌륭한 입지를 갖췄었다. 원래 경복궁 동편 동십자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송현은, 고개를 중심으로 동쪽은 송현동, 서쪽은 벽동이라 하였다. 사간동과 송현동 사이의 고개에 위치한 벽동은 그 끼인 위치로 인해 벽장골이라고도 불렸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양정과 영응대군이 송현동 근처를 점거하였다는 내용의 상소가 나온다. 이전 글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송현 인근의 안국방에 위치한 영응대군의 집터에 대해서 언급했었는데, 안국방은 조선초기부터 여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금산규제가 약화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권문세가의 주거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도 서울양반(경화세족)과 지방양반으로 나뉘는데, 경화세족은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한 귀족화한 양반으로서 대부분 노론들이었다. 그들은 북경 연행의 기회를 독점하면서, 신세계를 구경하거나 사치품·신문물·예술품을 소비하곤 했다. 노론들은 청나라의 재화를 애용하면서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청나라를 적대시했다는 점은 역시 세속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당시 많은 경화세족들은 청나라풍의 붉은 벽돌로 제택(살림집+정자)을 지어 서화·골동품·서적 등을 쌓거나 정원을 꾸며놓고 감상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울인문지리지 「한경지략」에는 "북쪽 송현의 재상 심상규의 저택에도 능소화가 있다"고 적고 있다. 대표적인 경화세족 중 하나인 청송심씨 두실 심상규는 4만여권에 이르는 장서를 소장하였고, 한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고 평가받은 청나라풍 누각의 2층집 가성각을 북쪽 송현(벽동으로 추정)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가성각에는 종려나무와 온실을 두고 각종 희귀한 외래식물들을 심었다고 하니, 당시 경화세족의 고상한 취미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1816년 심상규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부임하면서 남한산성 행궁 뒷산에 정원을 조성하고 누각을 만들어 풍류를 즐겼다는데, 1817년 지은 정자 옥천정 터가 남아있다. 

 

요절한 공주의 집, 귀주궁

 

심상규가 죽은 후에는 가성각은 귀주궁으로 사용되는데, 귀주는 왕의 여식을 의미한다. 이전 글에서 헌법재판소 터와 서울공예박물관 터도 귀주궁으로 하사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순조의 둘째딸 북온공주와 창녕위 김병주는 1830년 전후로 혼인하면서 가성각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온공주가 혼인한 지 2년만에 요절하면서 창녕위 홀로 거주하다가, 양자 김도균을 거쳐 손자뻘인 김석진이 가성각을 상속받았다. 삼정승을 두루 지낸 김석진은 1910년 한일병합에 항의하며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욕망과 빚으로 일궈진, 대규모 필지

 

1906년 순종계비의 간택 이후에는 인척이 된 해평윤씨 형제가 송현 일대에 자리잡게 되는데, 19세기말 송현동에 살았던 150여 가구를 윤덕영이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이전·합필하였고 한다. 동십자각 건너 벽동에는 윤덕영이 살았고, 고개 넘어 바로 옆집 송현동에는 윤덕영의 동생이자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이 살았다. 윤씨형제의 집은 크고 호화로울 뿐만 아니라, 언덕 따라서 서로의 집을 연결한 구름다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규모 부동산을 운영할 재력이 없어지면서, 그 집을 여러 사람에게 임대하여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대규모 하숙집로 사용되었다. 송현 주변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많은 학교가 생겨났고, 아침시간에는 6거리(현 안국동사거리)가 등교하는 조선학생들로 붐벼서 '학생 6거리'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1918년 윤씨형제는 송현동 집을 조선식산은행에 매각하였고, 조선식산은행은 이 자리에 대규모의 사택단지를 조성하였다.

 

윤씨형제는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여 한일합병을 관철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귀족작위와 함께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다. 윤택영은 1906년 딸을 순종계비로 간택시키는 과정에서 황실로비를 펼치면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 빚은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후에도 심한 낭비벽으로 인해 빚은 계속 늘어났으며, 채권자가 120여명에 달하면서 부채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윤택영은 채권자들로부터 차례로 고소와 소송이 이어졌고, 1920년 여름에 북경으로 도주하였다. 북경에서 극도의 생활곤란과 향수병을 겪은 윤택영은 1935년 늑막염에 걸려 사망하였다. 가성각 터를 소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윤덕영은 '벽동의 나무 많은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벽수라는 호를 가지고 있는데, 동생이 죽은 1935년 옥인동 언덕에 지은 프랑스식 대저택 벽수산장으로 유명하다.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토지를 매입한 후, 1913년부터 프랑스 귀족별장 설계도를 바탕으로 개발에 착수하였다. 1921년 외관공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당시 건축자재의 조달이 원만하지 않아 무려 1935년이 되어서야 완공하게 된 것이다.

 

대기업이 좌절을 맛본, 금싸라기 땅 

 

해방 이후 한미양국 간의 협약에 따라 송현동 부지를 미국에 넘겼고, 이후 미국정부는 미국대사관의 직원숙소를 건립하여 약 50년을 사용하였다. 근 1세기 가까이를 높은 담으로 가려진 닫힌 공간으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그 만큼 개발가치가 높은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를 대기업들이 놓칠리가 없었으니. 2000년 삼성생명이 미국정부로부터 송현동 부지를 1,400억원에 매입한 후, 미술관을 건립하려다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2008년 대한항공은 삼성으로부터 송현동 부지를 2,900억원에 매입한 후, 7성급 한옥호텔 등 복합문화단지를 조성하려 하였다. 하지만 주변의 밀집된 학교들로 인해 관련법상 교육청의 심의대상이 되면서 결국 호텔신축은 실현하지 못했다. 2020년 6월 서울시가 공원화 계획을 발표한 뒤, 2021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삼성 이건희 전회장 유족이 기증한 작품을 소장·전시할 미술관을 송현동 부지 건립을 발표하였다. 이를 위해 2021년 12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대한항공으로부터 송현동 부지를 5,580억에 매입한 후, 서울시 소유의 삼성동 서울의료원 부지와 교환하였다. 서울시의 현계획대로 2027년에 이건희 미술관이 개장한다면, 20여년 전에 삼성이 접었던 꿈이 결국에는 실현되는 것이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노동에서 배제된 과거 지배층의 고질병, 비만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 백성의 이미지는 시꺼먼 피부에 깡 마른 모습다. 근대 이전에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풍부한 식품과 편리한 교통수단, 기술·자본 집약적인 업무환경 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량 확보와 생존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지주·귀족·양반으로 대표되는 지배층은 상대적으로 덜 어려웠을 것이다. 광(창고)에는 잉여식량이 쌓여 있었고, 노동강도가 낮은 관리·행정직을 수행하였다. 즉 많은 칼로리를 섭취한데 비해 적은 칼로리를 소모했기 때문에 비만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만체형이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었으며 건강에 신경쓸 여유나 기술도 없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이라는 속담은 비만을 지향하는 가난한 사회를 절묘하게 묘사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정도전은 대부분 날씬한 체형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죽기 직전 옆집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향해 옆집 주인은 '배가 볼록한 자'로 그를 묘사했는데, 펑퍼짐한 한복차림임에도 볼록한 배가 드러날 정도라면 확실한 비만체형이었을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육체적인 노동과 서비스는 피지배계층인 노비들이 주로 제공하였고, 지배계층은 책상 앞에서 학문과 행정에 전념한 나머지 몸을 움직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양반과 관리들도 그러했으니, 진수성찬을 매일 받는 국왕도 과체중에서 비롯된 대사질환을 달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국 최고의 어의가 옆에 있다한들 당시의 의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수준이다보니, 종기로 인해 죽은 국왕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궁에는 화장실도 없을 뿐더러, 국왕은 방 안에서 궁녀의 도움을 받아 매화틀(이동식 용변기)에서 용변을 처리했다. 운동을 멀리하고 공부를 가까이한 대표적인 조선 세종은 성군일지는 몰라도, 건강관리는 엉망이어서 평생을 안질·당뇨·어깨통증·관절질환·중풍 등의 질병들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나비효과와 평행우주에 기반한, 역사적 상상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미세한 변화 내지 사소한 사건이 향후 예상치 못한 엄청난 파장이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념으로, 1972년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가 발표한 「예측 가능성 -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 돌풍(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유래되었다. 로렌츠가 말한 나비효과는 대기와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전제하고 있는데, 역사만큼 긴 시간과 많은 인물들로 구성된 복잡계도 없을 것이다.

 

흔히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다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문구를 접해봤을 것이다. 이 문구의 원문은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생각을 모아서 사후에 편찬한 「팡세 : Pensées」에 나온다. 번역하자면 "인간의 공허를 충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면 된다. 그 원인은 '나로서는 모르는 것'(코르네유)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무서운 것이다. 이 '나로서는 모르는 것', 사람이 알 수 없는 작은 것이 전 지구와 황후와 군대와 전 세계를 움직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이라는 내용이다. 알 수 없는 작은 뭔가로 인해 시작된 연애의 결말은 무서울 수도 있다는 이 말은, 앞서 말한 나비효과를 아주 오래 전에 나타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정도전의 볼록한 배가 이방원의 기습을 피해 신속한 월담이 가능했을 정도로 날씬했다면, 태종시대 이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이전 글 <특이점의 팽창과 미궁, 다중우주>에서는 양자측정의 모든 가능한 결과는 파동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입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라고 언급했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칼날에서 무사히 벗어나서 전개되는 새로운 세계가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송현 일대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역사의 향기가 아닐까 한다. 한양천도 직후에는 금산정책(오늘날로 치면 그린벨트)을 통한 신비로운 녹지공간, 조선 중기 이후에는 귀족화된 양반의 고상한 취향을 꾸밀 수 있었던 고급주택단지, 근대에 들어서는 일신의 배신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친일파들의 욕망이 스며들었던 공간, 현대에 와서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사택단지였다. 600여년 이상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으나, 이 땅의 정체성은 사실상 20세기 초반의 대규모 하숙촌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개화기에 만들어진 근대학교와 인쇄소, 그리고 1910년에 설립된 천도교 교당(현 덕성여중 자리)는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담론 형성을 가능케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하였다.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송현의 그 분위기는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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