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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법

가깝지만 잘 모르는, 영조물

by Spacewizard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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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역삼역 인근에서 40대 남성이 환기구에 빠져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해당 사고지점이 자주가는 카페 앞이어서 놀랬던 기억이 있다. 겉으로는 환기구 덮개가 있어서 평지로 인식했었지만, 그 아래는 지하 5층 깊이의 공간이 있었다. 술에 취했던 피해자는 환기구 아래로 떨어진 스마트폰을 꺼내기 위해, 환기구 덮개를 열었다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영조물 관련 사고는 원고가 음주상태에서 자주 발생하는 듯하다.

 

2014년 판교에서 환풍구 추락사고가 발생한 이후, 2m 미만 높이의 환풍구에서는 접근차단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칙이 신설되었지만, 2015년 이전에 설치된 곳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전 글 <아는 만큼 보이는, 배상책임보험>에서 배상책임보험을 설명하면서, 공무원 내지 영조물로 인한 사고는 국가배상책임에 해당된다고 언급했었다.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현장(좌)과 고속도로 포트홀(우)

일상의 필수적인 인프라, 영조물

 

영조물(營造物)행정주체가 공적 목적으로 제공·운영하기 위해 만든 인적·물적 시설의 총합을 의미하며, 도로·하천·항만 등이 포함된다. 영조물의 유형은 크게 다음 2가지로 구분된다.


공용영조물 : 행정담당자의 업무에 사용되는 시설(교도소·시험장 등)
공공영조물 : 대중의 이용에 제공되는 시설(국공립학교·병원·도서관 등)

 

국가배상법 제5조(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한 책임) 제1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도로·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하였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지자체의 책임을 제한하는, 공공성


도로, 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의 설치·관리에 하자가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당 영조물의 설치·관리와 직접 관련되는 규정을 찾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설치·관리 규정은 사고가 날 수 없을 만큼 매우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는바, 해당 영조물이 규정을 완벽하게 준수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피해자는 사고현장의 영조물이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면 법정에서 유리할 수 있다.

 

대부분 판례에서는 피해자의 부주의를 적게 보지 않기에, 국가·지자체 책임은 20~30% 가량으로 상당히 크게 제한하고 있다. 이는 개인에 대한 배상과 국가재정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소액사건은 간혹 국가·지자체의 책임은 높게 인정해주기도 한다.

 

​지자체(피고)가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오시공하여 차도·인도 사이에 단차(10cm 가량)이 발생했고, 주행하던 오토바이 바퀴가 단차에 빠지면서 오토바이의 전복으로 인해 운전자(원고)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피고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인도에 가까이 붙어서 운전한 점과 음주운전(혈중알콜농도 0.145%)를 사고원인으로 주장했다. 원고는 도로공사에서는 단차가 발생하면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자료를 제출함으로써 단차사고임을 입증했지만, 피고의 주장도 상당부분 인정되면서 지자체의 책임이 10%도 제한되었다.

 

무조건 낮은 것만은 아닌, 관리책임

 

지자체의 책임제한을 높게 본 판례도 있다. 피해자는 지자체 주관의 오페라 공연 준비(무대세트 도색)를 위해 리프트에 올랐다가, 7m 아래로 추락사했다. 재판부가 지자체의 책임을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안전성이 있었는데, 리프트 하강에 따른 추락위험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의 설치 및 안전관리인원의 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하천다리의 난간을 잡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추락한 사고에서, 재판부는 하천난간은 하천 방향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설계·제작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난간이 운동용(스트레칭)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책임 10%를 상계하면서, 지자체의 책임을 90%로 인정했다.

 

보행자·자전거 등의 통행장소에서 자전거끼리 충돌하여 길 아래로 추락사망한 사고에서, 재판부는 국가 지자체의 책임 60%를 인정했다. 원고는 추락위험을 알리는 안전표지판과 방호울타리가 설치되지 않은 점을 주장했다. 다만 망인이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점과 전방좌우 주시하지 않은 점 등이 감안되면서 과실상계되었다. 비슷한 사고는 어떠한 도로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전방주시·안전벨트 여부, 기상상태 및 노면상태(평지·내리막·커브) 등이 과실상계될 수 있다.

 

포트홀(Pothole)아스팔트 도로 표면에 생기는 국부적인 작은 구멍을 의미하는데, 냄비(Pot)·구멍(Hole)의 합성어이다. 포트홀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을 경우, 다양한 사고위험이 있다. 타이어·서스펜션의 직접적인 손상 외에도 핸들의 급격한 조작이나 급정거에 따른 교통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야간에 자전거도로의 포트홀에 걸려 넘어지면서, 옆차로 차량에 의해 사망한 사고에서 재판부는 지자체의 책임 70%를 인정했다. 도로를 신속히 제때 보수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했다. 포트홀과 유사한 사례는 맨홀덮개가 있는데, 손상된 맨홀덮개에 빠져서 상해를 입을 경우에도 지자체 책임이 50% 이상 인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도로에 비해 변수가 적은, 철로

 

전철은 자동차·자전거에 비해서는 변수보다는 덜 한 교통수단이다. 이는 철로사고의 관리범위가 도로사고보다는 명확하고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철에서 승객들에게 떠밀려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발이 빠져 상해(다리골절)를 당한 사고에서, 재판부는 서울메트로가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방호조치의무를 다했다고 판단하면서 관리책임이 없다고 판시했다. 곡선구간의 승강장이라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 간격을 주의하라는 안내방송·안내문이 제공된 점, 승강장에 안전요원을 배치해 두었던 점 등이 감안되었다.

 

물론 철도시설의 하자를 인정한 판례도 있는데, KTX열차가 철로에 누운 피해자를 치여 사망한 사고에서 울타리를 설치하지 않은 하자를 인정한 것이다. 철도시설의 기술기준(국토교통부 고시)에는 외부인이 선로에 진입할 우려가 있는 일정 장소에는 울타리 등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야간주행 중에 도로공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눈이 침침한 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몇 년 전 새벽, 라운딩을 위해 고속도로 운전을 하던 중에 빨간 삼각대 위를 지나간 적이 있다. 도로공사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방에 세워 놓는 삼각대로 판단되었는데, 도로공사가 완료된 이후 지자체에서 미처 수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지자체(내지 한국도로공사)는 공사사실을 알리는 안내표시를 충분히 하지 않을 경우에도 책임이 인정되지만, 공사정리의 미비로 인해 차량을 파손시킨 경우에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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