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부흥 끝에 점차 가난해지는, 유럽
메소포타미아 관점에서 구분된 동서, 아시아와 유럽
생존을 위해 로마제국 스며든, 게르만족
훈족의 서진이 몰고 온 도미노, 게르만족 대이동
로마카톡릭을 수용하면서 오랜 간, 프랑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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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유럽인들이 지난 수 십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제양상을 마주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는데, 이는 유럽이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프랑스에서는 레드와인·푸아그라를 덜 먹고, 스페인은 올리브오일을 아낀다고 한다. 그 외의 유럽국가에서도 임금인상이 물가상승을 따라오지 못하자, 소비를 축소하면서 저렴한 물건을 구매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문제는 소비축소의 범위가 식비 외 항목(생활비·여가비·여행비용 등)로 확대되는 것과 저소득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으로도 확산되는 것이다. 이는 유럽경제의 쇠락이 고착화될 가능성을 높인다.
현재의 유럽인들은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무너트리면서 생겨난, 게르만족·로마인들의 후예들이다. 오랜 세월 지배계층을 형성한 건 게르만족일 것이다. 이전 글 <영원한 제국을 꿈꾸는 형제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유럽의 부흥은 불과 수 십년까지도 미국·러시아(소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잠재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 오늘의 현재의 유럽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게르만족의 이동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메소포타미아 기준으로 서쪽, 유럽
유럽(Europe)의 어원과 관련한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스신화이다. 제우스가 흰 소로 변신하여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Europa, 유로파)를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 크레타으로 건넌 다음 대륙을 한바퀴 돌았다. 이후 에우로파가 지나갔던 땅들을 유럽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화가 아닌 현실적인 유래로는 '해가 진다, 서쪽'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카드(Akkad)어 에렙(Ereb)가 있다. 아카드어에서는 반대의 동쪽에 위치한 아시아의 어원도 발견되는데, '해가 뜬다, 동쪽'이라는 의미의 아수(Asu)이다. 아카드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들에서 쓰였기 때문에, '아시리아-바빌로니아어'이라고도 불린다. 에렙·아수가 페니키아어를 거쳐 그리스어로 편입되면서, 그리스인들은 에게해를 기준으로 동서를 구분하게 된 것이다.
서서히 로마제국에 스며든 야만인, 게르만족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국가체제를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만들었고, 이후 로마제국의 국경을 라인강·다뉴브강으로 한다. 로마제국은 국경이 이루는 강 근처에 정예수비군단을 배치했는데, 이는 게르만족(Germanic peoples)의 남진을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BC 750년경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정착하고 있었으나, 워낙 추운 동토라서 식량부족을 시달렸다. 이후 발트해 남쪽 연안 삼림지역으로 남하한 게르만족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수렵·사냥을 주로 하면서 야만적·전투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다. 이후 게르만족(유트족·데인족·앵글로족·색슨족·프랑크족·부르군트족·반달족·케피테족·서고트족·동고트족 등)은 주로 라인강·다뉴브강 동쪽에서 살았으며, 2세기 중반 서고트족·동고트족은 더 남하하여 흑해 북안까지 내려왔다. 4~5세기 게르만족 일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북상하였는데, 이들을 다른 게르만족과 구분하기 위해 노르만족(북방 게르만족)이라 부른다.
이 때 게르만족은 족장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그 사회체제는 부족장·전사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의외로 엄격한 도덕적 생활(일부일처제 포함)과 충성, 자연숭배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게르만족이 유럽을 접수한 중세시대에 봉건제도가 정착한 배경에는 이러한 게르만족의 사회체계가 있었다. 두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던 지정학적 근접성은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으니, 게르만족은 자연스럽게 로마문화에 익숙해져 가면서 4세기 들어서는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용병·노동자로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 일자리의 상당부분을 외국인 노동자가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일부일처제로 인구가 안정적으로 증가하던 게르만족은 수렵·사냥만으로는 턱없이 식량이 부족한 위기에 직면했고, 이러한 생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식량·일자리를 찾아 로마제국으로 스며든다. 어떠한 작고 느린 변화라도 시간적 임계치를 지나면 고착화되기 마련이다. 비록 오랜 시간 천천히 일어난 게르만족의 로마 유입이었지만, 어느 순간 로마제국도 로마인의 대체인력으로 게르만인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제국 말기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게르만 용병이 막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바바로스(barbaros)는 의성어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외국어가 「바바바바(bar-bar-bar-bar)」로 들렸다 하여 생겨났다. 로마인들이 바바로스를 바바루스(barbarus)로 불렀다. 바바루스는 원래 언어에 국한되어 「그리스어·로마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의미하였지만, 이후 「그리스·로마와 이질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폭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얼마나 그리스인·로마인들이 스스로를 우수하다고 생각하며, 타민족에게 배타적이었을지를 추측할 수 있다. 결국 바바루스는 문화 측면에서 「로마문화(라틴어·제도·관습 등)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을 의미하게 되었고, 4세기 후반 기독교가 로마국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교화되지 않은 이단자」를 의미했다. 교양있는 로마인 입장에서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이방인을 바바리안(barbarian, 야만족)이었다. 이전 글 <비밀스웠지만 더 이상은 아닌, 사모펀드>에서는 1988년 뉴욕 월스트리트 사모펀드업계를 배경으로 하는 책 「문 앞의 야만인들 : Barbarians at the Gate」을 언급했었는데, 무지막지하게 공격하는 KKR의 크레비스를 야만인으로 비추고 있다.
훈족에게 뺨 맞고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
약 200년 간(4~6세기)까지 있었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중앙아시아 훈족(Huns)의 서진으로 시작되는데, 훈족의 공격에 밀린 게르만족은 도미노처럼 오래된 평화로 약해진 로마제국을 해체시키게 된다. 야만족인 게르만족의 이동이 세계사에서 고대·중세로 가르는 기점이 되는데,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인에 새로운 세계사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훈족의 아버지와 스키르족(게르만족)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훈족 고위급이 게르만족 여인과 결혼하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472년 서로마 안테미우스 황제와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총사령관) 리키메르 장군 간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리키메르는 게르만족 출신이었다.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으로 들어간 계기는 리키메르을 지원하기 위해서였고, 당시 오도아케르의 부대는 페데라티(foederati, 로마 동맹군)로 불렸다고 한다. 475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16세의 서로마제국 마지막 황제(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켜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루쿨루스성에 유배시키면서, 서로마제국는 522년 만에 멸망한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로마제국의 서부는 게르만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서고트족(스페인)·반달족(북아프리카)·프랑크족(북부 갈리아, 현 프랑스)·부르군드족(남부 갈리아)·앵글로색슨족(영국)이 각각의 점령지에 왕국을 세웠고, 이탈리아 반도에는 동고트족·롬바르드족이 각각 왕국을 세우면서 총 7개의 왕국이 들어선다.
앵글로족·색슨족 : 북해 → 영국
서고트족 : 다뉴브강 → 그리스 → 이탈리아 반도 → 스페인(이베리아 반도)
반달족 : 라인강 → 프랑스 → 스페인 → 북아프리카
프랑크족 : 라인강 → 프랑스(북부 갈리아)
부르군트족 : 라인강 → 프랑스 동부(남부 갈리아)
롬바르드족 : 북부 이탈리아
동고트족 : 남부 이탈리아
패망한 로마제국에 남아 있는 로마인들은 인구적·문화적 우위를 유지함은 물론, 카톨릭을 계속 신봉하였다. 이는 외지에서 온 지배층 게르만족과의 반감을 키우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을 제외한 게르만 왕국들의 대부분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아리우스파(Arianism)를 믿는 게르만족과 로마교회 간의 화합이 쉽지 않았다. 4세기 초 사제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한 아리우스파는 아리우스주의(반삼위일체) 신학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한 교파로, 초기 교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훗날 주류 교파)와 함께 양대 종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채택하면서 이단시 되었다.
게르만족 중에서 프랑크족이 치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종교수용이 있었는데, 초대 왕 클로비스 1세는 로마카톨릭을 수용함으로써 로마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프랑크족이 자리잡은 갈리아(Gallia, Gaule) 지방에는 방패 역할을 하는 피레네산맥이 있었고, 지중해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강대국의 위협이 덜 했다.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벨기에·스위스(서부)·독일(라인강 서쪽)을 아우르는 지방이다. AD 80년 로마제국은 갈리아의 서남부에 위치한 아키텐(Aquitaine, 현 프랑스 남부)을 차지하면서 부르디갈라(훗날 보르도)를 수도로 삼으면서, 대대적인 포도나무의 식재와 와인 생산이 시작되었다. '물 가까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르디갈라(burdigala)답게, 그 주변에는 강과 늪지대가 많았다. 인기가 높은 보르도 와인이 이탈리아 와인을 위협하자, AD 92년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갈리아 지역의 포도나무를 절반 이상 뽑아내는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참고로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라는 명칭은 그 이전에 나라를 세운 부르군트족(Burgund)에서 유래된 것이다.
역사의 주체는 변화하기 나름이다. 로마제국 내에서 카톨릭은 제도적 지위를 확립했지만, 로마인들은 개인적으로 신앙심이 깊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로마제국의 세련된 로마인들도 듣도 보도 못한 야만인의 횡포에 큰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세속에 대한 불안을 느낀 로마인은 종교에 의존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게르만 왕국으로부터 시작된 중세시대에는 교회 의존도가 심해지면서 수도원 생활이 뿌리내리게 된다. 그레고리오 교황도 역시 몰락하는 제국(동로마·서로마)의 황제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기에, 교회를 위협하는 게르만족(아리우스파)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교황에게도 계획이 있었으니, 게르만족을 카톨릭으로 교화·문명화시키고자 했다.
[Music] 중심을 향한 전진
https://www.youtube.com/watch?v=_pWeUQnaY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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