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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누군가는 억울할 수 밖에 없는, 사법

by Spacewizard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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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도 최상의 사법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소송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체계적인 입법시스템과 정비된 법령을 바탕으로, 수사기관(경찰·검찰)과 법원이 처리하는 사건수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크게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사건처리에 투입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그 사건처리방식 또한 점차 매뉴얼화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한들 지방판관이었던 사또가 고소민원을 다분히 자의적·비합리적으로 처리했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조선시대의 벼슬자리는 한성 3000개와 한성외(지방) 800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내삼천외팔백(內三千外八百)라고 한다. 지방벼슬 800개 중 330여개를 차지하는 지방관을 수령(守令) 내지 원(員)·사또라 불렀는데, 이들은 지방행정조직인 부목군현(府牧群縣)을 다스린 부윤·목사·부사·군수·현감·현령 등이었다. 태수(太)·현령(縣)가 합쳐진 수령은 중국에서 유래되었고, 지방에 파견된 문무관리를 의미하는 사도(使道)가 변음하여 사또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또는 당하관을 높여 부르는 말로 정착되었다. 오늘은 지방관의 역할 중 판관에 대한 내용과 불기소로 인해 억울한 이들에게 보장된 현재의 제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관직의 정점, 당상관

 

품계(品階)는 동양에서 신하들의 계급을 나타내는 제도로, 중국의 수·당시대에 확정되었다. 조선시대의 벼슬체계는 18품·30계으로 운영되었고, 9개품은 정·종으로 구분되었다. 임금이 내려다보는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正)은 상위를, 따라가는 개념인 (從)은 오른쪽에 위치하여 하위를 의미했다. 또한 6품 이상은 동일한 품이라도 2개의 상하계가 있어서, 6품 이상의 24계와 7품 이하의 6계가 있었다.

조선시대 벼슬체계 18품
조선시대 벼슬체계 18품

조선시대에서 의미있는 계급은 정3품으로, 이는 고위관료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3품의 상하계는 통정대부·통훈대부(문관)과 절충장군·어모장군(무관)이었는데, 다른 품과 달리 상하계 간에 큰 차별을 두었다. 상계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절충장군 만이 당상관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대청(당)에 올라 의자(교의) 앉을 수 있는 관직을 의미하는 당상관(上官)은 국가의 정책결정에 관여하는 관직으로, 왕의 주관으로 치러지는 전시에 합격한 관료들만 당상관이 가능했다고 한다. 당상관의 관직은 대신(정1품)이 맡는 의정부 삼정승, 정경(종1품·정2품)이 맡는 육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우참찬, 한성부 판윤, 팔도관찰사 그리고 아경(종2품·정3품)이 맡는 대사헌·대사간·대제학·부제학·대사성, 승지, 관찰사·병사·수사 등이 있었다. 당상관은 품계에 따라 대감·영감으로 불렸는데, 정2품 이상의 대신·정경을 대감(大監)라, 아경을 영감(令監)라 불렀다. 대감·영감에 대응하여 국왕을 상감(上監)이라 부르게 되었고, 대감·영감에게는 마님이라는 호칭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변화해 온, 영감

 

고위관료를 의미하는 영감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고려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서 영·감 관직이 나타나 있고,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특정품계를 영감으로 칭했다. 일제강점기 들어와서는 왕정시대를 상징하던 대감이라는 호칭은 사라진 반면, 영감이라는 표현은 관리·노인·가장을 존중하는 풍습으로 인해 다음의 경우에서 계속 쓰이게 된다.   

 

법관(판사·검사)이 아닌 사람이 법관을 칭하는 경우

법관이 서로를 칭하는 경우
군수를 칭하는 경우
노인을 칭하는 경우
부인이 자기의 남편이나 다른 사람의 남편을 칭하는 경우

 

1962년 대법원은 법관끼리 영감이라 칭하는 것이 비민주주의이라는 이유로 사용금지를 지시하였으나, 여전히 일각에서는 법관이나 지방관·기관장을 높여 부르는 말로 사용해왔다. 오늘날에는 노인을 지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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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이 될 수 있는 자격, 참상관

 

당하관들은 모두 나리(나으리)라 불렀다. 나리는 원래는 군주에게만 붙이는 호칭이었는데, 중국에서 넘어온 호칭(전하·폐하)들로 인해 격이 점차 낮아지다가 '지체 높거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신라시대 이두에는 진사(進賜)라 쓰고 '나아리·나으리'라 읽었는데, 조선시대 소과에 합격한 진사(進士)와는 한자가 다르다. 나아간다는 의미를 가진 진(進)과 '리' 음을 가진 이(易)을 합친 한자어인데, 사(賜)를 패(貝, 조개)와 이(易, 쉬울)로 분리한 뒤에 뒷글자를 취한 것이다. 종4품도 고위관료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었는데, 대부·장군이라 칭했던 종4품 이상은 왕의 교지로 임면(任免)되고, 서경이 면제되었다. 반면 사·랑·위로 칭해졌던 정5품 이하의 하위관료는 예조의 교첩으로 임면되고, 서경이 필요했다. 당하관 내에서도 종6품 이상은 매일 아침 국왕을 배알하던 상참(약식조회)에 참석할 수 있어 참상관(上官)이라 하였고, 이들은 수령직에 임명이 가능했다. 상참에 참여할 수 없는 정7품 이하는 참하관이라 불렸다.

 

지방관은 임금이 직접 선택하는데, 임금에게 올라 온 후보자 3인 명단 중 1인 이름 위에 점을 찍어서 임명하는 식이었다. 임금에게 낙점(落點)된 지방관은 임금에게 절을 올리는데, 보통은 승정원 승지에게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신원조회가 이뤄지는데, 일가친척(본가·외가·처가) 중에 천민과 혼인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였다. 어느 시대이건 관리의 신원조회는 그 시대의 반정부세력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목적이다. 냉전시대에 친공여부가 신원조회 내용이었듯, 신분제 시대에서는 최하층과의 연계여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신원조회를 통과하여 임관지로 이동하기 전에 또 한번 임금에게 절을 하는데, 이 때 수령이 수행해야 할 7가지 역할인 수령칠사를 외워야 한다. 당시 수령칠사를 전부 외우지 못하거나 잘못 외운 경우에는 임관이 취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몸을 세워 사람구실을 한다'는 뜻의 입신(立身)은 출세(出世)를 의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입신출세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사람구실의 바탕이 되수신(修身)을 통한 정신수양을 소홀히 하였던 것은 아닐까. 제아무리 머리가 뛰어나 과거에 급제한들, 백성을 챙기고 다스려야 하는 수령으로서의 신념이나 의지를 겸하지 않았다면 임명취소는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 20여년 전에 기술고시 2차 시험을 통과했던 대학동기가 3차 면접에서 탈락하는 일이 있었는데, 입신을 눈 앞에 두고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매우 황망해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원에 이상이 없었다고 본다면, 아마도 공무원의 역할이나 정치적 소신을 잘못된 발언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조선시대에 채비를 마치고 하직숙배하던 과정에서 튀어나온 사소한 실수로 인해 관리임명이 취소된 것처럼.

 

향판을 역임한, 사또

 

조선시대 법률·소송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형조는 오늘날의 법무부(행정)·법원(사법) 역할을 동시에 관장했다. 형조는 지방에서 열리는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감독하고, 다른 기관이 법을 잘 지키는지도 감시했다. 형조는 지방에서 올라온 상고심이나 중대범죄의 재판도 진행했는데, 형조관리들이 죄인을 직접 심문하고 판결을 내리는 경판(京判, 서울판사)의 역할을 했다. 이성계는 "형벌에 사람의 삶과 죽음이 달렸으니, 중요하게 여기고 삼가서 행해야..." 한다면서 법률교육기관인 율학청(律學廳)을 세웠으며, 이 곳에서 형조관리들에게 법률과 법전운영에 관한 지식을 교육하게 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사법연수원 내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형조관리에게도 공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나보다. 형조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에는 형조낭청놀이와 뇌물에 따른 판결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낭청(郎廳)은 당하관에 해당하는 실무관리를 의미한다. 광대가 나서서 형조재판의 불공정을 풍자한 놀이는 국가재판에 대한 백성의 불신이 얼마나 컸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권사회에서는 국왕이 삼권(입법·사법·행정)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조관리는 판결 전에 임금에게 죄목·형벌을 보고하고 윤허를 받아야 했다. 반역죄 등의 중대범죄는 의금부에서 심문·재판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는 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렸다.

 

오늘날의 지자체장과 달리 행정권 외에 군사권·사법권도 가졌던 사또는 향판(鄕判, 지방판사) 역할을 수행하면서, 시비를 가르는 민사재판이나 가벼운 형사재판을 맡아 태형 이하의 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성리학적 시대정신에 비춰보아, 제아무리 명망 높은 사또였을지라도 오늘날 관점에서의 정의로운 판결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재는 게편이듯, 주로 양반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처분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양반이 아닌 양민이나 천민들은 억울한 판결 앞에서 좌절하고 자포자기했을 것이다. 물론 사또의 판결에 불복(재심사)하는 절차가 없지는 않았는데, 사또보다 직급이 높은 관찰사·암행어사·사헌부에 상고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재력·인맥이 없는 양인이 상고할 시간이나 뇌물 줄 돈은 있었런지 의문이다. 물론 고전소설 「춘향전」에서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사또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 춘향을 구했지만, 이러한 광경은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은 문학작품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억울한 이들을 위한 가망없는 보루, 재정신청

 

고소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여러 사정들로 인해 피의자를 불기소(내지 기소유예)로 처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고소인이 불복하는 절차들이 있는데, 우선 이의있는 고소인은 불기소처분을 통지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지방경찰청(지청)에 항고장을 제출할 수 있다. 항고장은 이내 고등검찰청(고검)을 넘어간다. 항고가 인용된다면, 재기수사명령과 함께 다른 검사에게 배당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항고가 인용될 가능성은 10% 내외에 불과하다고 한다. 고검으로부터 항고기각결정이 내려졌다면, 결정을 통지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재정신청서를 불기소처분을 한 지청에 제출할 수 있고, 재정신청고등법원(고법)으로 넘어간다. 항고인용에 따라 재기된 수사에서도 불기소된 경우에도, 재항고 대신 재정신청을 해야 한다. 하지만 수사권이 없는 고법에서는 재정신청이 기각될 가능성 높은데, 실제 재정신청 인용율은 0.7% 가량에 불과하다고 한다. 재정신청은 공소시효를 중단시키고, 3개월 이내의 결정이 권장되며, 피의자의 열람·등사가 불가하다고 한다.

 

고법이 재정신청을 기각한 경우에도, 기각결정을 통지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즉시항고장을 법원에 제출할 수 있다. 재정신청 기각결정문에는 구체적인 기각사유가 기재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즉시항고이유서는 재정신청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법원이 즉시항고를 인용하면 검사는 기소하여야 한다. 재정신청·즉시항고는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관한 적정성을 다투는 것으로, 인용 후 기소·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무죄를 받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인 사유와 적용법조를 검찰이 공소장에서 기재한다면, 유죄가 나올 수 있지도 않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얽혀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매 순간 엄청난 분쟁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시대의 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민주화 사회에서의 분쟁량이 신분제 사회의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밖에 없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감수·감당해야 하는 사건들이 많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이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억울해 하는 선에서 멈춰야 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성숙된 현재에도 분쟁에서 억울한 이들은 분명히 있고, 이들은 주어진 절차에서 구제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어떡하리. 불완전할지라도 과거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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