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신장병, 담배, 그리고 스트레스로 인한 급사
천도교(동학) 교주 손병희의 삼녀와 결혼
인내천을 기반한 아동애호사상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려는 별책부록,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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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위인전들은 소파(小波, 잔잔한 물결) 방정환을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는 사실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방정환은 열정있고 유능한 언론경영인(편집자·비평가·카피라이터·이벤트기획가)이자 교육자였으나, 평생 어린이만을 위했다는 부르주아 아동문학가의 이미지로 인해 북한에서는 오랫 동안 친일인사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일제강점기·해방공간은 반목된 이데올로기(민족주의·공산주의)에 휩싸인 시대였다. 방정환은 원래는 없던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젊은이(청년·중년)와 늙은이(장년·노년)과 독자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아이의 인권가 보장되지 않던 전통시대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훈민정음을 첫 구절 '어린 백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린」은 어리석다(stupid)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어리석은 아이에 불과하지만, 미래에는 나라의 기둥이 될 존재가 될 것이라는 존중의 의미를 담아 「어린 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은 방정환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 스트레스
1899년 11월 당주동(현 세종문화회관 뒷편)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1931년 7월 33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오래된 사진 속의 방정환은 얼굴만 봐도 육중한 풍채를 예상할 수 있는데, 그의 사망원인에는 대사질환 외에도 스트레스가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7월 22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방정환은 곁에서 간병하던 이태운(소파 처조카)에게 임사체험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전 글 <인간의 임종과는 조금 다른, 별의 죽음>에서는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비일상적인 경험을 임사체험이라 한다고 언급했었다. 방정환이 경험한 내용은 문 밖에서 검은 마차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마중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음 날 7월 23일 저녁에 방정환은 생을 달리하는데, 주치의였던 이토의 진단소견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너무 육후(肉厚)해서 모세관이 압축되니 혈액순환이 안되어 심장이 비대해지고,
둘째, 신장·방광이 압축되어 요독(尿毒)이 전신에 퍼져 눈이 침침해지고,
셋째, 호흡이 몹시 곤란합니다
1918년 결혼 이후부터 살이 붙었다고 하면, 대략 13년은 육후(비만)상태를 유지했을 것이다. 게다가 항상 담배를 손에서 떼지 않는 애연가였다니, 고혈압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시의 잡지사들은 영업조직을 자체적으로 보유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문사(조선·동아)의 지사·지국을 판매네트워크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동아일보가 월간종합지 「신동아」를 창간하면서, 많은 잡지사들의 판매망이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신동아의 창간이 방정환의 개벽사(開闢社)에 경영쇼크를 주면서, 그 스트레스로 방정환이 쓰러졌다고 말한다. 개벽사는 천도교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는 출판사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하지만 신동아의 발간이 방정환의 사망보다 4개월이나 늦은 사건인 만큼 신빙성은 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동아의 발간이 몇 개월 전에 예고될 수 있으니, 그러한 사전정보가 방정환의 심기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 사실 동아일보는 방정환이 기획한 대형 이벤트의 든든한 후원자였는데, 대표적으로 1922년 12월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쇼와 1928년 세계아동예술전람회의 개최가 있다.
동학사상에 기반한, 소년운동
1913년 관립미동보통학교(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한 방정환은 가정사정·진로고민으로 으로 중퇴했다. 1918년 방정환은 한 천도교인의 주선으로 송용화(손병희 삼녀)와 결혼한 이후, 그를 아낀 장인 손병희의 지원으로 가난에서 벗어난다. 손병희는 캐딜락을 직접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에게도 캐딜락을 선물한 바 있는 종교재벌이었다. 원래 방정환은 마른 체형이었는데, 이를 안쓰럽게 여긴 손병희가 한약과 함께 기름진 반찬을 많이 먹이는 바람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방정환의 아동애호사상은 손병희(방정환 장인)의 동학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동학의 핵심이념인 인내천(人乃天)에 따르면, 어린이도 곧 하늘이었다. 또한 장인이 인수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하고 비밀결사조직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는데, 이후 천도교청년회의 핵심인력으로 성장한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윤익선(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보성사(普成社, 현 수송공원)에서 인쇄한 지하신문(조선독립신문)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방정환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돌리다가 일본경찰(일경)에 체포된다.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동참한 경성청년구락부 동료와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후 일제는 방정환을 위험인물로 분류하였고,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1920년 방정환은 개벽사·천도교청년회 도쿄지부를 이끌기 위해 일본유학길에 오르게 되었고,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아동심리를 공부했다. 1920년 8월 「개벽」 3호에 번역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동시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1914년 육당 최남선이 발행한 잡지 「청춘」 창간호 권두사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년시절의 방정환은 「청춘」에 자주 투고했는데, 당시 필명이 정환·소파의 이니셜을 딴 'ㅈㅎ생' 내지 'ㅅㅍ생'이었다고 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한 방정환은 소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며, 전통사회에서 천대받았던 어린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급격히 전환시켰다. 1922년 3월 방정환은 동경에서 색동회(일본 도요대학 미술과 유학생 주축)를 발족하였는데, 어린이의 고유문화·예술활동·인권의식을 진작할 목적이었다.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는 창립 1주년을 기념해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7월 방정환이 세계명작을 번역(번안)한 세계문학전집 「사랑의 선물」을 개벽사에서 펴냈는데, 이는 방정환이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었다.
1923년 3월 최초의 아동월간지 「어린이」를 창간했는데,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에서 발행을 대행했다.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의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1923년 11월경 방정환은 완전히 귀국한다. 어린이날은 노동절과 겹침을 피하기 위해 1927년부터 5월 첫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후 5월 5일로 정해진다. 1928년 무산계급 소년운동단체 오월회(五月會)가 소년운동을 주도하면서, 방정환은 소년운동에서 한발 물러선다. 그리고 소년운동세력의 좌우분열은 방정환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념보다 인물을 쫓은, 사회주의
방경수(방정환 아버지)는 동학혁명에 참가한 독실한 동학교도였으며, 방정환도 태생적으로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세계의 청년지식인들에게 마르크시즘(사회주의)은 하나의 큰 관심·유행이었다. 1920년부터 3년간 동경에서 유학한 20대 초반의 방정환이 마르크시즘을 공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21년 2월 방정환은 「천도교회월보」에 「왕자와 제비」라는 번안동화를 최초로 발표하였는데, 그 원작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였다. 평생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은 왕자가 동상으로 세워진 뒤, 세상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줌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방정환은 원작에서 기독교적 색체을 없애고,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했다. 「개벽」 4월호에는 일본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의 글 「깨어가는 길」을 번역·소개했는데, 토시히코는 조선에 사회주의를 알린 최초의 외국인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1921년 내내 「개벽」에 연재된 풍자소설 「은파리」에서도 자본주의의 태생적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비판하는 내용을 많이 담았는데, 이로 인해 '불령파리' 방정환은 1919년 지하신문 사건에 이어서 다시 일경의 철저한 감시대상이 되었다. 사실 일제에게는 조선인의 이데올로기 어느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조선독립을 노리는 민족주의자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 모두 일제의 위협요소였기 때문이다.
1923년 일본유학을 마친 방정환은 박영희·김기진과 함께 개벽사를 이끌면서, 「개벽」은 1920년대 사회주의 작가들이 이끈 신경향파 문학운동의 주무대가 된다. 무산계급 아동문학가들은 「어린이」에 많은 작품들을 실었는데, 이후 무산계급 소년잡지 「별나라」가 생기면서 이들은 방정환을 크게 비판하였다. 기본적으로 방정환은 마르크시즘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다기 보다는, 큰 틀(천도교·민족주의) 안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드리려 했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방정환이 일본유학 시절에 김찬(사회주의 강경파)와 교류가 많았다는 점인데, 김찬은 조선공산당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공산주의 전위(前衛, vanguard)그룹 화요회(火曜會)의 핵심인물이었다. 1923년 3월 천도교청년회 주최로 경성에서 열린 「동양 대세에 관한 시국강연회」에서 김찬은 강연자로 나섰으며, 그 해 첫 어린이날에도 방정환의 요청으로 강연을 했다. 김찬은 2차례의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국외로 망명했다가, 국내로 잠입한 후 1931년 5월 구속된다. 1931년 7월 방정환이 「혜성」에 실은 글 「호방한 김찬」 을 통해 둘 사이의 친분을 공개했는데, 이념을 떠나 우정을 중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방정환이 김찬을 이념적으로 맹종했다면, 북한에서도 방정환에 대한 평가를 적대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별책부록으로 보급한, 보드게임
방정환은 「어린이」 부록으로 보드게임을 제공하곤 했다. 1929년 2월호 부록은 다이아몬드 게임의 말판과 유사한 금강껨이었고, 1931년 1월호 부록은 세계발명말판이었다. 세계발명말판은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말을 이동시키는 전형적인 보드게임 형식이었는데, 마지막 11개 칸에는 역사적인 별명품(전기·자동차·전화·비행기·다이너마이트 등)을 발명시기 순으로 적어 놓았다. 최종 목적지에는 라디오가 그려져 있었는데, 1931년 당시 라디오가 최신 발명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글 <기술발전으로 형체가 없어진, 레이블>에서는 전기녹음시스템과 라디오의 등장은 여러 혁신으로 기존 레코드사와의 큰 갈등이 있었다고 언급했었다. 방정환은 보드게임을 통해 아이들에게 서사를 선사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데, 발명품 칸에 진입하기 직전의 칸들에서는 재실패(再失敗)→낙망(落望)→무재(無財)→안병(眼病)→발분(發奮)→연구(硏究)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계속된 실패에 희망·재산·시력을 잃고 화가 치미지만, 그런 험난한 과정을 극복하면 마침내 발명에 성공한다는 내용을 통해 어린이들이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랬을 것이다.
유작 출판기념회가 개최된, 중화요리점
방정환이 죽은 지 9년이 지난 1940년 6월 22일 토요일, 방정환의 전집 출판기념회가 종로3정목(현 낙원동)에 위치한 중화요리점 열빈루(悅賓樓)에서 열렸다. 1880년대 한성·인천에서 시작된 중화요리점은 처음에는 화교를 주고객으로 하였지만, 점차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면서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크게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된다.
대형중화요리점
중화요리음식점
호떡집
대형중화요리점은 20~40명 규모의 종업원을 두고 주로 고급요리(베이징요리·광둥요리 등)를 제공하는 요릿집이었다. 대표적으로 경성의 아서원(雅叙園)·열빈루·사해루(四海樓)·금곡원(金谷園)·대관원(大觀園), 인천의 공화춘(共和春)·중화루(中華樓)·동흥루(同興樓), 대구의 군방각(群芳閣) 등이 있다. 중화요리음식점은 2~10명 규모의 종업원을 두고, 주로 대중적인 음식(우동·만두·잡채·양장피 등)을 팔았다. 가장 작은 규모인 호떡집은 1~3명이 운영하는 가게로, 다양한 떡(빵)를 만들어 팔았다. 호떡은 호인(胡人, 오랑케)가 만들어 먹던 떡을 의미하는데, 중국인들은 서역(西域, 현 중앙아시아·아랍)사람을 호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노점에서 파는 다양한 음식들이 호떡집에서 유래되었다고 봐도 되는데, 대표적인 메뉴로 공갈빵·꽈배기·국화빵·계란빵·참깨빵 등이 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았던 호떡은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일제강점기는 대형 컨벤션공간이 많지 않던 시기라, 다양한 행사들이 요릿집을 대관하여 열렸다. 어찌보면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무대가 요릿집이었다. 이전 글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에서는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별유천지(태화관 별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고 언급했었다. 또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변천, 소공동>에서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총회가 아서원(현 소동공 롯데호텔 자리)에서 비밀리에 열렸고, 1950~1960년대 정치인들이 밀실정치의 장소로 중식당을 많이 이용했다고 언급했다. 1926년 12월 28일 경성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 단원 나석주가 인천항에 입항하면서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식사를 한 곳이 공화춘이었다.
전근대시대에는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기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였던 어린이의 인권은 상당히 낙후되었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한 이후, 소년운동에 헌신한 방정환은 전근대적인 사고에 얽매여 있던 어린이들을 독자적 존재로 해방시켜 키즈감성으로 살아가게 만든 주역이다. 오늘날 당연시되는 것들의 대부분은 과거 오랜 세월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던 것들이었다. 산업혁명 시기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노동학대를 당했는지를 알 것이다. 모태신앙으로 인해 진보적 성향을 지녔지만, 어디까지나 민족·어린이라는 큰 틀 내에서 온건적인 개혁을 추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거나 외간여자를 흠모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나, 여전히 가부장적인 시대였음을 감안하고 볼 필요도 있다. 3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수 많은 커리어를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과로사한 것으로 보이는 방정환의 생에서, 대략 100년 후를 40대 중반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Music] 아이의 감성
https://www.youtube.com/watch?v=mGE6y1e_v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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