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도시

로마를 휩쓸고 급히 퇴장한, 훈족

by Spacewizard 2024. 5. 19.
728x90
728x90

 

5세기 초반 로마제국을 휘저은, 게르만족

공격타겟을 게르만족에서 로마제국으로 변경한, 아틸라

서로마 황제의 누이가 자초한, 훈족의 침입

유럽에서는 꼴불견에 빗대어지는, 악명의 훈족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HH9Fa74tWAg

 

서양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역사인물로 흔히들 5세기 훈족의 마지막 왕 아틸라가 거론되는데, 대략 16세기 전의 한 인물이 여러 후세들에 걸쳐 잔혹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훈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근거지로 성장한 유목민족으로 이전 글 <점점 가난해지는 유럽, 게르만 후예들>에서 언급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킴은 물론, 동쪽으로는 중국을 위협했다. 서쪽의 훈족과 동쪽의 흉노족의 유전자가 같다는 연구조사도 있는데, 오늘은 훈족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 화풀이 한, 게르만족

 

2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하기 시작한 훈족은 360년 경 볼가강을 건너서 최초로 유럽을 밟으면서 알란족(페르시아계 유목민)을 공격한다. 375년 동고트족이 거주하는 드네프르강 유역까지 진출했는데, 당시 동고트족이 차지하던 영토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역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듬해 376년 서쪽으로 도망간 서고트족 일부는 동로마제국 발렌스 황제의 허락 하에 다뉴브강 건너 트라키아(현 불가리아·그리스·터키 국경지대)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민족대이동의 시작이었다. 378년 로마제국에 들어 온 서고트족들이 2년 만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트라키아의 척박한 농토와 제국관료들은 심한 횡포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서고트족의 반란으로 발렌스 황제는 전사하였고, 이후 379년 1월 새로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잠정적으로 반란은 수습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통합하여 마기스테르 밀리튬(Magister Militum, 총사령관) 아래에 둔 것이다. 이전까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사령관을 보병(마기스테르 페디튬)과 기병(마기스테르 에퀴튬)으로 분리하여 운용했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후에 서고트족은 다시 약탈·정복을 재개하게 되는데, 서로마제국도 점차 접근하는 서고트족을 방어하기 위해 라인강 국경을 지키는 정예수비군단을 소환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방어체계가 약화된 라인강 유역은 오히려 게르만족이 침입하기 쉬운 경로가 되면서,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함락, 425년 반달족의 스페인 함락, 429년 이탈리아의 곡창이었던 북아프리카 정복이 차례로 일어난다. 특히 410년 로마가 함락된 사건은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신국론」을 저술한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때의 재앙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게르만족에서 로마제국으로 타겟을 변경한, 아틸라

 

405년 경 동고트족에 이어 서고트족까지 몰아낸 훈족은 동유럽(우랄산맥~헝가리)에 길이 3,000km에 달하는 대제국을 이룩했다. 434년 훈족 왕 루아가 죽자, 블레다(Bleda, 아틸라 형)가 즉위했다. 당시 아틸라는 그의 형과 공동으로 즉위했다는 설과 그의 형을 보좌했다는 설이 있지만, 형제 간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443년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동생 아틸라는 훈족의 왕이 된다. 블레다의 사망원인 중에 아틸라의 암살설이 있는데, 가능성 없지는 않아 보인다. 전제왕권을 앞에 두고는 부모·형제 간의 혈육의 정을 찾기 보다는, 혈(피)를 찾아 골육상쟁을 벌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도 이방원이 왕좌를 놓고 이복형제들과 벌인 골육상쟁을 소개했었다. 434년 아틸라는 공격타겟을 게르만족이 흘러 들어간 로마제국(동로마·서로마)으로 돌렸고,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더 발달한 동로마를 우선적으로 공격하기에 앞서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고 한다.

앞으로 로마인들이 훈족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않도록 짓밟아서,
다시는 훈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황가 내부의 반목이 불러온, 서로마 침입

 

아틸라의 군대는 특유의 잔인함·파괴력으로 동로마인들을 학살하였고, 결국 동로마 황제는 사신을 보내 강화협상과 함께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된다. 450년 아틸라는 공격타겟을 동로마에서 서로마로 변경하는데, 이러한 의사결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2가지 요인으로는 서로마제국의 호노리아(Honoria) 공주가 보낸 청혼편지와 동로마제국의 새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강경세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적의 수장인 아탈리에게 청혼편지를 보낸 배경에는, 서로마제국 황실 내의 집안문제가 있었다. 황제는 누이에게 평생 독신으로 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런 일방적인 요구에 호노리아 공주는 강한 불만을 품게 된다. 449년 호노리아 공주는 정략적 연인이었던 유지니우스(Eugenius)와 반역을 도모하다가 얼마 안가 적발되면서, 구금상태에 들어간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제도 무조건적인 비혼 보다는 자신의 안심할 만한 자를 누이의 남편감으로 직접 찾기 시작했는데, 원로원 의원 허큘라뉴스(Herculanus)를 낙점했다.

 

450년 구금상태에서의 강제결혼까지 하게 생긴 호노리아 공주는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훈족의 아틸라에게 금반지를 동봉한 청혼편지를 보낸 것이다. 당시 상대방에게 반지를 보내는 것을 청혼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틸라는 단번에 청혼으로 단정한다. 이에 아틸라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수(Theodosius) 2세와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호노리아 공주와의 결혼 요구와 함께 지참금으로 서로마 영토의 절반 가량인 갈리아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동로마 황제는 훈족에게 매년 조공을 받치면서 평화를 유지하던 상황이라, 훈족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에 동로마 황제는 서로마 황제에게 아틸라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편지를 보냈으나, 서로마 황제는 이를 거절한다.

 

451년 아에티우스(서로마 귀족·장군)가 서로마령 갈리아의 카탈라우눔(Catalaunum, 현 샬롱 부근) 평원 전투에서 아틸라를 대파했는데, 이 때 서고트족(테오도리크 1세)·알란족(상기바누스)이 서로마제국 편에서 싸웠다. 족은 로마의 적일 뿐 아니라 게르만족에게도 적이었으니, 한 마디로 공공의 적이었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동서양이 대결한 최초의 전투로, 세계 10대 대전으로 기록된 대전쟁이다. 이듬해 452년 2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북이탈리아를 공격하여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 3세를 라벤나(서로마 수도)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는데, 이 때 황제는 대교황 레오 1세에게 강화중재를 요청했다. 강화를 받아들인 아탈리는 퇴각하였으며, 강화의 대가로 상당한 금액의 협상금이 제공되었을 것이고 전해진다. 참고로 교회사에서 막뉴스(magnus, 大)라는 존칭을 받는 교황은 단 2명인데, 바로 레오 1세와 그레고리오 1세이다. 르네상스시대의 대표화가 라파엘로(Raphaello)는 교황과 아틸라가 만난 역사적 사실을 채색없는 소묘작품으로 남겼는데, 바로 루브루박물관에 소장된 「교황 레오 1세와 회담시 훈족과 아틸라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르」이다. 또한 라파엘로는 이 소묘를 바탕으로 그린 채색벽화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도 바티칸 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라파엘로의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출처 이코노미스트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라파엘로 [출처:이코노미스트]

 

아틸라의 급사와 함께 급히 사라진, 훈족

 

서로마제국의 굴복을 받아낸 아틸라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되는데, 새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조공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로마 공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453년 부르군트족 일디코(Ildico) 공주와 첫날밤을 보낸 53세의 아틸라가 다음 날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필 새색시와의 첫날밤에 사망하다 보니 고령·음주·성관계와 관련한 여러가지 사망원인설이 떠도는데, 현대의학계에서는 과음으로 인한 식도정맥류의 내부출혈을 추정하고 있다. 그외 흥미로운 사인으로는 일디코의 암살설복상사설이 있다.

 

어쨋든 아틸라의 급사는 훈족의 급소멸로 이어진다. 흑해의 아조프해 연안으로 숨어 들어간 훈족은 불가르족(투르크계 유목민)과 융합되었다. 7세기 이후 불가르족 일부가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발칸반도 남쪽에 국가를 세웠고, 이후 불가르족·슬라브족이 섞이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인들이 되었다고 한다. 9~10세기 동유럽을 침입한 마자르족을 훈족으로 오해하여, '훈족의 땅'이라는 헝가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역사의 오해가 헝가리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던 시기도 있었는데, 바로 18~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자결운동을 펼칠 때이다. 당시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훈족·아틸라에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고 한다. 굳이 훈족의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은 국민을 고르자면, 헝가리인이 아닌 불가리아인일 것이다.

 

아틸라는 샤프한 약탈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뚱뚱한 단신이었지만, 강력한 안광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말 한마디에 공격타겟은 게르만족에서 로마제국으로, 동로마제국에서 서로마제국으로 쉽게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잔혹성으로 가는 곳마다 악명을 떨쳤다. 그래서 근대까지 유럽인들은 꼴불견을 '훈족'에 빗대어 부르곤 해왔는데, 일탈을 일삼는 펑크족을 '훈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독일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터키)을 '훈족'이라 불렀는데, 하필 이들은 연합국(프랑스·영국)의 동쪽에 위치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은 동쪽의 소련군을 '훈족'이라 불렀다고 한다. 1900년 중국에서 8개의 연합군(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일본)이 의화단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원정에 앞서,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연설에서 훈족·아틸라를 언급했다. 연설의 내용은 천 년 전 아틸라가 이끈 훈족의 명성이 전설이 되었던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14년 후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스스로가 희망했던 '훈족'의 (악)명성을 얻게 된다. 오늘날의 한국 입장에서의 '훈족'은 과연 식민지화한 사실이 있는 일본일까, 아니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몰고 온 북한일까.

 

[Music] 일말의 생존

https://www.youtube.com/watch?v=qCuicaRc1fo

A Glimmer of Survival #일말의 생존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