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사에는 일찌감치 하나의 트라우마가 존재하는데, 바로 1960년 부정선거이다. 이전 글 <여전히 역사의 한 장면, 선거인단>에서는 1961년 이후의 선거제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1970년대 간선제를 거쳐 1980년대 중반 다시 직선제로 돌아오기까지 여러 변화가 있었다. 기계를 사용하는 오늘날에도 사전투표 조작에 대한 의심은 항상 쫒아다니는데, 아니나 다를까 60여년 전의 선거에서도 사전투표가 부정선거의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1960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더 많은 지금, 부정선거가 그저 추상적인 논란으로 그치곤 한다. 그럼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이승만을 단일후보로 만든, 조병옥의 죽음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자유당의 대결이었는데,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는 대통령 후보자리를 놓고 신파(장면)·구파(조병옥) 간의 대립이 심각했다. 이전 글 <소외받고 이용당하다 초토화된, 4.3>에서 조병옥은 제주 4.3사건 진압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라고 언급했었다. 1959년 신파가 구파를 먼저 공격했는데, 「조병옥의 결격사유」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전국 지구당에 배포한 것이다. 인쇄물에는 이승만에게 충성했던 경찰 출신이라는 점과 주색잡기를 즐긴다는 사생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맞서 구파도 장면의 친일성향을 내세워 반격했다. 1959년 10월 조병옥이 분당우려를 명분으로 경선포기를 선언했지만, 구파의 설득으로 다시 경선출마로 돌아섰다. 전형적인 정치쇼였다. 11월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조병옥이 3표 차이로 장면을 이겼고, 장면은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60년 1월 조병옥은 위장병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를 틈타 자유당은 농번기를 핑계로 대선일자를 3월(원래 5월)로 2개월 앞당겼다. 정말 틈만 보이면 정략(政略, 정치적 책략)이 펼쳐지던 터프한 시기였다. 문제는 2월 15일 조병옥이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민주당 내부분열이 극에 달한 것인데, 구파가 장면 부통령 후보의 사퇴를 요구했다.
자유당의 노림수, 부정선거
조병옥의 급사로 대통령 단일후보가 된 85세의 이승만은 당선이 유력했지만, 자유당의 고민은 4년 전과 같은 대결구도(장면·이기붕)에 놓인 부통령 선거였다. 4년 전 이기붕이 장면에게 패했지만, 이번만큼은 이기붕의 당선이 필요했다. 아마도 다음 임기 중에 노령인 이승만이 사망·궐위 가능성이 높았으며, 권한대행을 염두하여 부통령을 반드시 차지해야 했을 것이다. 궐위(闕位, 벼슬이 빠지다)는 어떤 직위·관직이 비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참고로 궁(宮)은 국왕·왕비·신하가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공간을 의미하는데, 궁을 둘러싼 높은 담장·성문을 궐(闕)이라 한다. 암튼 이렇게 기획된 것이 부정선거이다.
학생운동의 시작, 학원간섭
1960년 2월의 마지막 주말, 대구지역에서 양당유세가 개최되었다. 1960년 2월 27일 토요일, 당국은 자유당 유세를 앞두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강제휴업명령을 내렸다. 반면 민주당 유세가 열린 일요일에는 휴일영업을 장려할 뿐 아니라, 여러 핑계로 강제등교까지 시켰다. 토요일이 평일에 가까웠던 시절, 일요일까지 등교를 가야했던 학생·교사들은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까.
일요일 오후 학생 800여명이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이렇게 건국 이래 민간에서 발생한 최초의 반정부데모가 학생시위였다. 또한 이후 40여년간 이어진 극렬한 학생운동의 시작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운동는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학생들은 민주당 유세장에서 정부의 학원간섭을 폭로했다. 심지어 전주·광주에서는 학생의 혈서까지 등장했다. 결국 학생시위는 학원간섭에 대한 저항을 넘어,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 치닫게 된다. 선거 직전까지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 반대시위는 계속되었다. 투표권도 없는 학생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하는 바람에, 자유당은 역풍을 제대로 맞은 것이다.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왔던 학생들은 정부에 의해 잘 훈련·육성된 시위대였다.
다양하게 준비한, 부정선거
자유당은 학생시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채, 다양한 부정선거를 모의했다.
40% 사전투표
유권자명부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율 조작
단체공개투표(3인조·5인조 투표)
여당완장을 통한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전체 유권자 중에서 불참자·무효표를 40%로 예상하면서, 그 만큼을 자유당표로 미리 투표함에 넣어 두었다. 사전적인 투표조작을 위해서는 유권자 허위명부와 득표율을 미리 조작해야 했다. 오프라인 시대의 투표조작은 엄청난 수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오류·탄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사전투표가 완료된 유권자가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 사례가 많았으며, 실제 투표함을 조작된 투표함으로 바꿔치기도 했다. 단체공개투표는 중간의 조장이 양쪽의 투표자들의 투표용지를 확인한 후 투표함에 넣었는데, 이는 배신자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단체공개투표가 제대로 실행되도록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하니, 국민의식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당 지지자들에게 완장을 착용하게 하여 민주당 지지자의 기를 죽였던 반면, 투표장을 감시하러 나온 민주당 참관인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싸움을 걸어 투표장에서 내보냈다.
개표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이기붕 득표수가 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군인들이 대부분인 부재자투표에서는 이승만의 득표수가 유권자수의 120%에 달했다. 당국에서는 급히 득표율 조작지령(이승만 80%, 이기붕 70%)을 하달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이기붕은 득표율 88.7%·79%로 당선되었다. 최선을 다해서 득표율을 조작했지만, 9%p 가량은 조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정을 덮기 위한, 무력진압
3월 15일 투표 당일, 마산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눈 앞에는 예상대로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는데, 단체공개투표 파트너를 찾아서 헤매거나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당사로 돌아온 민주당 간부들은 선거를 포기한 후, 정남규(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시민·학생들이 시위대열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금새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은 정남규와 민주당 간부를 연행하였으나, 밤 8시경 시위대 규모가 만명을 넘겼다. 결국 마산경찰서장은 최인규(내무장관)에게 보고를 했고, 최인규는 진압명령을 하달했다.
경찰은 시위장 인근의 조명을 소등한 후, 발포를 시작했다. 마산시만들은 놀란 나머지 허둥지둥했다. 하지만 경찰발포는 오히려 마산시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시위대는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지국, 파출소, 경찰서장 자택 등을 파괴하기 시작했으며, 이날의 경찰발포로 사망자 8명, 부상자 80여명이 발생했다. 20여년이 지난 1979년, 부마항쟁의 시발점도 마산이었다. 현대사에서 마산이 차지하는 의미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단초이다.
2020년 4.15총선 출구조사 발표를 확인한 양정철(민주연구원장)이 인터뷰에서 어안이 벙벙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던 적이 있는데,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이 장면을 부정선거에 대한 심증으로 거론하곤 한다. 어안은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혀 안」을 의미하며, 「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를 벙벙하다라고 표현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이 의도대로 너무 잘 풀리면,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기붕도 의도된 당선에 고조된 나머지, 기자회견 중에 마산에서의 강경대응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실수를 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권력은 때에 따라 잔인하게 쓰여야 하지만, 정치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비난·처벌의 대상이다. 1950~70년대 「반공」은 여당의 만능치트키였는데, 결국 이승만도 마산시위를 용공테러로 몰게 된다. 용공(容共, 공산주의를 용인함)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공산주의에 동정·동조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산경찰은 구속한 26명을 공산세력으로 간주하면서, 고문과 함께 증거조작을 했다. 시위대 학생시체가 안치된 영안실에 들어가서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적힌 전단을 시체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검사들이 양심고백을 하면서 누명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이후의 독재정권(박정희·전두환)과 달리 언론·검사의 양심이 살아있던 순수의 시대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결국 용공몰이는 무위로 돌아가고, 이승만은 최인규를 해임하면서 꼬리를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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