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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오래전 추억 속의 고품격, 성안백화점

by Spacewizard 202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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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바랜 추억

https://www.youtube.com/watch?v=yuZy7ucSF6k

Faded Memories #바랜 추억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 8일 미팅장면이 나오는데, 이른바 「마산 3대 부자」라 하여 무학소주·몽고간장·시민극장의 아들이 등장한다. 군대휴가를 얻지 못해 미팅에는 나오지 못했지만, 코아양과의 아들도 언급된다. 마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들이라면 다 알만한 기업·극장·양과점이다. 성나정(고아라 분)의 소개멘트는 아래와 같다.

"마산 돈은 이 오빠야들이
  다 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실제 마산부자의 범주는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다. 1905년 마산에서 창업한 몽고식품은 국내 최초의 간장전문기업으로, 창업 100년이 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기업이다. 하지만 400~500억원대의 매출규모와 극히 낮은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보이고 있다. 2000년 전후로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산도 여느 도시들처럼 지역극장들이 호황을 누렸었다. 하지만 시민극장(좌석 613석)도 해방 직후인 1946년 오픈했다는 역사성은 있어도, 1970년대 600석 이상의 좌석을 갖춘 극장은 3개(강남·중앙·태양)가 더 있었다.

 

1990년대 마산 신흥부자, 김인태

 

물론 몽고간장·시민극장·코아양과가 일반인보다는 부유했겠지만, 마산을 대표하는 부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드라마 소재로는 재무성 보다는 인지도가 중요한 요소이고, 인지도 높은 브랜드(시민극장·코아양과)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선전화가 없던 시대에 코아양과은 대표적인 약속장소였다. 마산의 대표기업으로는 유원산업·불로식품·진일기계 등이 있었지만, 실제 마산부자는 아마도 어시장의 거물이나 건설업에 종사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1994년 당시 마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신흥부자로는 김인태가 있었다. 김인태의 장남은 김영홍(메트로폴리탄 회장)으로, 라임자산운용 펀드환매 중단사태의 배후로 수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남종합건설을 창업한 김인태는 진동면(신기리 죽전)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PX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인태는 집안형님(전 공화당 사무국장)을 통해 박종규(구산면 출신)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 글 <바나나 공화국이라기엔 원래부터, 스위스>에서는 박정희가 이동훈·박종규·서정귀 명의로 최소 3개 이상의 스위스 비밀계좌를 관리했다고 언급했었는데, 그 정도로 박종규는 박정희 정권의 실세 중 한명이었다.

 

김인태를 있게 한, 경남아파트

 

1980년대 후반 김인태는 경남종합건설의 인지도를 높이면서, 40대 초반의 나이에 성공한 지역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1990년 1월 우리집은 신마산(창포동)에 위치한 창포경남아파트를 분양·입주했었는데, 당시 몇 년만에 공급되는 신축아파트라서 지역 내 인기가 많았던 공동주택으로 기억된다. 당시 입주민들이 하자를 빌미로 분양가의 일부를 돌려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어머니와 윗층 아주머니는 진동면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민시위에 불참했었다. 당시 명목분양가가 34평 기준 5,000만원대였는데, 500만원 이상 환불받음으로써 실질분양가는 4,000만원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이전 글 <바다와 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마산>에서는 1916년 제작된 마산조계지 지도를 첨부했었는데, 창포경남아파트 부지는 그 지도상에서 헌병분견대 동쪽에 위치한 바다를 매립한 공간이다. 1934년 이전에 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34년 해당부지에 마산조면공장(마산 최초의 섬유공장)의 신축공장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 혼다(오사카 출신)가 현 북성로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조선면화공장(훗날 삼성라디에타)을 인수·운영하였다. 해방 이후 마산조면공장은 박용포가 대표로 있는 마산면업·아주방직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참고로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마산의 섬유공장들은 1970년대 들어 합성섬유의 공세에 밀려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모래성처럼 무너진, 동남그룹

 

김인태는 정치권과 깊은 유착이 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박종규 외에도 김영삼(거제 출신) 일가와도 친분이 있었다. 또한 김인태의 자금력도 자그마한 지역사회의 관심사였는데, 실제 김인태는 많은 기업들을 설립·인수했다. 1991년 1월 김인태는 동남일보를 창간했는데, 당시 아파트 부실시공과 비리의혹에 대하여 언론들의 비판이 많았었다. 이후 사세를 확장하면서 동남그룹으로 성장했는데, 성안백화점·경남종금·서원대학교(청주 소재)를 인수하였고, 서울 용산터미널과 공항예정지(창원 동대산 일원)을 매입했다. 1994년 김인태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투자금융사에서 종합금융사로 전환허가를 받았는데, 여기에 김홍조·김영삼·김현철 3대와의 친분이 작용했었다고 전해진다. 한 국회의원은 1992년 대선에서 김인태가 수백억원을 지원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패막으로 내세웠던 동남일보로 인해, 김인태는 사법리스크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남일보 내 노사갈등 과정에서 신문광고비를 유용한 혐의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1996년 4월 동남일보는 폐업했다. 그 다음 달 검찰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특경가법)」상 횡령 혐의로 김인태를 구속했고, 비자금(경남종합건설 150억원, 성안백화점 82억원) 조성과 세금포탈(48억) 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비자금의 용도가 정치권과 연관되었을지도 모른다. 1심(창원지법)은 징역 3년에 벌금 70억원을 선고했지만, 1996년 12월 2심(부산고법)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62억원을 선고·확정되었다.

 

한번에 찾아 온 위기, 도피생활

 

1994년 4월 김인태는 마산상공회의소 회장직에 올랐지만, 1997년 5월 이후로는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1997년 5월 김인태가 몰던 그랜저가 광장동(서울 광진구)에서 앞에 가던 프라이드를 추돌했는데, 무면허 상태에서의 뺑소니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세간의 관심은 사고차량의 소유자이자 동석자였는데, 최원석(전 동아그룹 회장)의 2번째 부인인 배인순이었다. 1997년 8월 김인태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50만달러를 빌려 도박으로 탕진하면서,외환관리법」위반 혐의도 받게 되었다. 보통 해외도박사범은 도박 자체보다는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큰 처벌을 받게 된다.

 

1997년 12월 김인태는 해외도피를 결심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라고 알려져 있다. 헌정사상 정상적 선거를 통한 사실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는 전정권과 유착관계가 있던 모든 인사들에게는 충격과 공포였을 것이다. 김인태는 친지의 여권을 위조하여 홍콩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도피했으며, 해외도피 5년 만인 2002년 해외도박과 여권법 위반혐의로 미국에서 검거·강제송환되었다. 구속된 김인태는 2003년 1월부터 노역장에 유치되었고, 2년형을 살고 지난 2004년 출소했다.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 로비자금 수십억원이 경남종금을 통해 세탁된 의혹을 받기도 했는데, 김영삼 일가의 외면이 섭섭했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인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안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드디어 열린 백화점 시대, 마산

 

1980년대 초 마산시 인구는 40만명 수준으로 증가하였고, 도시구조도 구도심(창동 일대)에서 합성동 방면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구도심-산호동-합성동 라인에 백화점들이 많이 위치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백화점은 다음과 같았다.

 

가야백화점(1977년 개점, 수출자유공단 정문)

한성백화점(1978년, 창동)

로얄쇼핑(1985년, 합성동)

신성백화점(1985년, 합성동)

성안백화점(1987년, 산호동)

1980년대 마산 백화점 위치 [지도:카카오맵]

이전 글 <경성에 신세계를 연, 미쓰코시>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의 5대 백화점을 언급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지방도시 마산의 백화점 시대는 한참 늦었다. 가야백화점은 백화점이라기 보다는 전자상가 느낌의 공간이었고, 한성백화점은 창동의 고려당 옆에 위치했다. 이전 글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에서 마산·창원지역에서 유명했던 빵집으로 고려당을 언급했었다.

 

로얄쇼핑은 어린 시절 양덕동 집에서 불과 500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마산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고급스러운 리테일공간이라서 생각보다 기억이 선명하며, 에스컬레이터와 함께 5~6층 정도에 위치했던 장난감가게가 동심을 사로 잡았었다. 1998년 로얄쇼핑이 서광백화점으로 재개점하였다가, 1달 만에 부도를 맞기도 했다. 로얄쇼핑 근처에 위치했던 신성백화점(현 요양복음병원)은 마산 최초의 직영백화점으로 소개되는데, 오픈한 지 1년 만에 부도나면서 존재감은 없었다.

 

마산 최고의 고급공간, 성안백화점

 

1980~1990년대 마산시민들에게 성안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은 현재의 강남신세계백화점 못지 않은 고급이미지를 갖춘 공간이었다. 성안백화점 부지는 과거 마산공업고등학교(마산공고)가 있던 공간으로, 1982년 마산공고가 합성동 교육단지로 이전했다. 한보개발은 가고파쇼핑 신축개발을 시행하였고, 1985년 11월 완공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보개발의 부도로 인해 시행사가 성남종합상사로 바뀌었고, 상호명도 마산백화점(1987년 5월 개관)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상호명이 성안백화점으로 다시 변경되면서, 개관일이 1987년 12월 18일로 연기되었다. 참고로 1987년 12월 16일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경된 첫 선거였다. 개관 당시 유명연예인 일일판매가 있었는데, 18일·19일 각각 이영하·선우은숙 부부와 이용식·이건주(순돌이)가 참석했다.

 

이전 글 <맨션과 함께 화려했던, 빌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 마산에는 양덕동 타워맨션, 산호동 용마맨션을 비롯한 고급 맨션아파트들이 공급되었다고 언급했는데, 용마맨션 인근에 성안백화점이 있었다. 창동에 수많은 브랜드의 리테일매장이 있었지만, 성탄절·명절 전후에는 고급스럽게 꾸며진 백화점에서 3~4시간 쇼핑했던 기억이 난다.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였지만, 성안백화점의 등장으로 중소형 백화점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던 기억은 선명하다. 1991년 2월 신세계와 경영제휴를 체결하였고, 상호명을 신시계 성안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이렇게 마산의 상징이었던 성안백화점도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8년 1월 최종부도 처리되었고,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2000년 8월 신세계백화점 마산점이 들어섰다.

 

1980년대 말 마산 공설운동장 내의 수영장과 함께 성안백화점 가장 높은 층에 있던 수영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요일 오전에 친구들과 수영을 즐긴 후에, 볼링장 옆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곤 했었다. 또 하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1980년대 마산에는 유명한 롤러스케이트장이 2개가 있었다. 신포동 삼익롤라장과 성안백화점 옆 건물 지하에 있던 대한롤라장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대한롤라장을 놀러 갔었는데, 롤라장에서 친했던 여자친구 무리를 만났었다. 일진스러운 형·누나들 가운데서 무사히 놀다 나와서 안심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초딩들이 참 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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