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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

by Spacewizard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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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주전주리(떡·약과류)가 점차 서구식 빵·양과자 내지 일본식 화과자·사탕들로 대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일본인이 조선땅에 들어와서 빵과 과자를 만들어 팔았고, 이때부터 가게이름 뒤에는 '당·제과'가 붙는 일본식 상호명이 사용되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에서는 조선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였으나, 정작 중요한 제과기술은 전수해 주지는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많은 일본인 제과점들이 적산으로 분류되어 불하되기도 하였고, 일본인의 어깨 넘어로 기술을 배운 한국인의 창업도 활발했다. 적산(敵産)은 적국이 점령지에 남기고 간 재산으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패망한 일본이 조선땅에 남기고 간 재산을 말한다. 불하(拂下)는 국공유재산·귀속재산을 개인에게 매각하는 일로, 해방 이후 적산의 처리(불하 포함)은 미군정에 의해 이뤄졌다. 오늘은 국내에 빵이 들어온 역사와 초기의 제과점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서구와 동양의 만남단팥빵

일본은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빵을 접하게 되었는데, 빵의 어원도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빵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팡데로(Pao-de-lo)를 「팡」이라 불렀다는데서 기원했다. 19세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여온 빵은 처음엔 '서양떡'이라 불렸다가, 후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빵'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868년 일본은 칼의 소유를 금지하는 폐도령이 선포되면서 무사들은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하급무사 출신 기무라 야스헤에는 도쿄직업훈련소에서 사무직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빵에 흥미를 느끼고 1869년 도쿄에 작은 빵집을 열었다. 그리고 1874년 최초로 단팥빵(앙팡) 개발하였는데, 서양에서 들어온 빵에 일본인 입맛에 맞게 단팥을 넣어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팥빵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875년에 일왕가와 군대에 납품하게 된다. 지금도 도쿄 긴자의 기무라야에 가면 일본 최초의 단팥빵을 맛볼 수 있다. 서양식의 빵과 중국식 단팥소를 결합하여 정작 일본에서 단팥빵이 탄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무라야 단팥빵
기무라야 단팥빵

해방 이후, 한국의 제과점

1) 군산 이성당

이성당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이석우(남원 출신)는 '이씨가 하는 집은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이성당(李盛堂)이라는 상호의 과자점을 오픈한 후, 1948년 적산 이즈모야 과자점 건물을 불하받아 이전했다. 이즈모야 과자점은 1910년 일본인 히로세 야스타로가 문을 연 과자점으로, 1899년 군산개항 이후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다던 군산에서는 20여개 이상의 과자점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성당의 시그니처는 단팥빵인데, 찢어지는 쌀가루 표피에 가득 들어간 단팥소로 유명하다.

2) 서울 태극당

1945년 신창근은 미도리야 제과점으로부터 제과장비를 인수하여, 이듬해 1946년 명동에서 태극당을 설립했다. 당시 신창근이 생각한 애국은 맛있는 빵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태극당(太極堂)의 로고는 어렵게 되찾은 나라를 오래 지키자는 취지로 무궁화로 하고, 직원들의 유니폼에 작은 태극기를 달게 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 뉴욕제과·상미당이 오픈하면서 국내 제빵시장에 굵직한 가게들이 등장하였는데, 태극당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는 오늘날까지 남아 운영되는 곳이 태극당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오픈 초기에는 센베이·유가· 단팥빵, 양갱 등의 주로 판매하다가, 이듬해 1947년 모나카 아이스크림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60년 신선한 우유와 달걀을 공급받기 위해서 경기도 남양주에 직접 목장을 운영하였고, 1973년 명동의 가게를 현재의 장충동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시그니처는 모나카 아이스크림, 사과잼 롤케이크, 고방 카스테라이다.

 

이렇듯 광복 후 30년간 꾸준히 성장했던 태극당의 신창근은 1976년 1분기 서울시 재산세 최고 납세의무자(주거용)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1982년 신창근은 역삼동에 태극당예식장을 오픈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태극당 예식장은 2003년 철수할 때까지 근 20년간 인근 목화예식장과 함께 서울시민이 즐겨 찾는 예식공간이었다.

과거 태극당 예식장과 목화 예식장 자리 지도 카카오맵
과거 태극당 예식장과 목화 예식장 자리 [지도:카카오맵]

3) 순천 화월당

1920년 일본 시마네 현의 고바야시란 일본인이 순천으로 이주하여 문을 연 가게가 화월당이다. 1928년부터 조선인 조천석이 열다섯살의 나이로 이 가게에 취직하게 되고, 1945년 가게를 인수했다. 현재 화월당에서 먹을 수 있는 빵은 딱 두 가지로 단팥을 넣은 찹살떡인 모찌와 볼카스테라가 그것인데, 일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여 빵을 굽는다고 한다.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빙수, 셰이크, 도넛, 사라다빵과 샌드위치 등 종류가 다양했다. 오래된 지역 제과점들이 그러했듯, 화월당도 순천에서는 단순한 빵집을 넘어 젊은이들의 미팅이나 맞선 장소이면서 고급가게이기도 했었다. 1960~1970대까지 순천의 명소로써 화월당은 그렇게 번성하였다.

4) 대전 성심당

성심당은 한국전쟁 중 월남한 한 카톨릭 신자 임길순에 의해 문을 열었다. 1950년 12월 흥남부두를 탈출한 후, 1956년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던 중 열차가 대전역에서 고장으로 멈췄다. 어쩔 수 없이 찾은 성당의 신부는 임씨가 흥남부두를 탈출해 대전까지 오게 된 여정을 들은 뒤에,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 2포대를 줬다고 한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을 담아 판다'는 의미를 가진 대전 성심당(聖心堂)의 시작이었다. 대전역 노점 앞에는 성심당 간판(나무팻말)을 만들어 세웠고, 단팥을 듬뿍 넣은 신선한 찐빵만 판매한 게 주효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튀김소보루와 부추빵이 시그니처가 되었다.

5) 마산 고려당

고려당은 한국전쟁 이후 노상에서 풀빵을 팔던 김순연이 1959년 창업하였다. 1974년 상호 등록을 한 서울 고려당과의 상호 분쟁에서 승소할 만큼 마산·창원지역에서 유명한 빵집이다. 창업 당시 팥앙금빵과 찹쌀떡으로 출발하여, 1980년대 밀크쉐이크와 팥도너츠가 시그니처였다. 2000년대 들어서 창동 상권이 사그라지면서 2009년 강성욱이 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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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빵집의 몰락, 프랜차이즈 습격

한국전쟁 이후 전성기를 누렸던 전통적인 지역 빵집들은 1980년대 들어 햄버거와 피자 등 패스트푸드에 밀리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들어서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에 힘없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맛, 세련된 인테리어 및 마케팅 기법을 앞세운 프랜차이즈에 수요가 몰리면서 각 지역의 빵집들은 서서히 쇠퇴해갔다. 앞서 말한 순천 화월당, 군산 이성당, 대전 성심당 등도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만 했었다.

 

당시 프랜차이즈와 동네빵집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천안의 대표빵집 뚜쥬르(TouJours)이다. 1992년 서울 답십리역 사거리 코너 1층에서 뚜쥬르과자점 상호로 개업한 이후, 1998년 본점을 천안으로 옮기면서 서울·천안에서 영업을 하였다. 2009년초 답십리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뚜쥬르과자점이 폐업을 하게 되는데, 프랜차이즈(파리바게트)가 건물주에게 대폭 인상한 월세를 제시한 것이다. 사실 뚜쥬르와 프랜차이즈와의 악연은 1996년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CJ푸드빌이 신규 제과제빵 브랜드로 뚜쥬르를 염두해두고, 그 사업권(상표권, 점포)의 양도를 제안했었다. 제안을 거부당한 CJ는 뚜레쥬르(Tous les Jours)를 내세워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뚜쥬르는 누가봐도 유사한 상호에 반발하여 소송을 제기하였고, 뚜쥬르의 1심 승소 후 2심 진행 중에 합의함으로써 소송은 마무리되었다. 이 합의로 뚜쥬르는 유사상표 이용료와 일정기간 특정지역 출점금지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향수는 어른이 되어서도 많은 긍정적인 감정과 추억을 가져다 준다.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면 안정감과 자심감을 유지하게 되고, 때로는 웃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추억의 제과점에서 동생들과 함께 먹던 밀크쉐이크와 단팥빵의 달콤한 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뇌의 선택적 기억력에 감사함을 느끼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들을 잊지 않음으로써 나를 사랑해주고 소중하게 대해줬던 이들과의 연결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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