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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

by Spacewizard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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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던, 특권층
전근대시대에서 크게 작용한 인적네트워크, 가문
세상 가운데의 도리가 아닌 세력의 남발, 세도

정조가 죽은 후의 권력독점, 경주김씨·안동김씨·풍양조씨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세도정치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DTISlAzEmcY

 

어느 시대나 특권층의 행태가 사회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전 글 <더글로리에서 날로 진화하는, 학교폭력>에서 소개된 정 변호사의 아들이 과거에 한 발언이 회자된 적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검사 아버지를 자랑하면서 친구들에게 「검사는 뇌물받는 직업」이라고 한 말인데, 이는 전근대 특권층의 사고와 매우 유사하다. 공정 속에서 발견되는 능력을 자랑하기 보다는, 인적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목적하는 바를 얻는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하는 세태인 것이다. 뇌물을 받는 행위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백주대낮에도 할 수 있는 심지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인데, 이는 진정한 특권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불공정한 인식을 배우고 쌓을 수 있는 곳은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인 가정, 좀 더 확대하면 가문(家門)일 것이다. 조선후기 지배층의 특권은 몇몇 가문이 주도한 세도정치로 이어졌는데, 형식적으로만 주권자(국왕)의 권위를 높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세도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 여기서는 세도정치와 현재의 상황을 연계하여 살펴보자. 


세상의 도리가 아닌세력의 남발」, 세도

세도정치의 본래 의미는 「세상 가운데의 도리」인 세도(世道)를 실현하는 정치이나, 조선시대 순조·헌종·철종 대에 실제로 전개되었던 정치형태를 칭할 때는 세도의 책임을 맡은 자가 세도를 빙자하여 세력을 휘둘렀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도(勢道)정치라고 불렀다. 세도정치의 효시는 정조시대 초반 국왕의 신임으로 세도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의 독단적인 정치운영이며, 순조 이후에는 노론 출신의 외척가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세도가문들은 당쟁을 통해 라이벌 당파와 가문들을 제거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확립했는데, 당시 당쟁의 주요쟁점은 명분·의리였다. 오랜 당쟁에서 살아남은 세도가문들은 스스로가 내세운 명분·의리를 세도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세도를 실현·행사하는 적임자로 평가하였다. 그렇게 그들이 세도를 행사하는 수단으로는 관료적 기반, 산림으로서의 명망, 왕실의 외척 기반을 활용하게 된다. 이들은 비정상적인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장악하여 권력 탈취의 도구로 활용하였으며 고위 관직을 계속 독점했고, 군영을 장악하여 군사력을 그들의 통제 안에 두었다. 국왕은 정치를 독자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선택받은 입장이라 목숨부지를 위해 주색잡기에만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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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전성시대, 안동김씨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펼치면서 본가인 경주김씨를 권력의 중심에 놓았고 이에 노론벽파의 기세가 등등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개혁정치의 진원지인 규장각을 축소했으며,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인 남인세력 숙청하였다.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중단되었고, 15세 순조가 친정하면서 안동김씨 김조순(순조비 부)이 정치권을 장악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안동김씨 가문이 세도정치의 중심에 섰다. 김상헌(김조순 7대조)은 병자호란 당시 의리를 중시한 척화파였고, 김수항(김조순 5대조)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으며, 김창집(김조순 고조부)도 당대 노론 4대신으로 경종시대에 영조를 왕세제로 지지했다.

 

가문의 영향으로 노론시파였던 김조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정치세력 중 한 사람이었는데, 정조는 자신과 뜻과 맞았던 김조순과 사돈관계를 맺게 된다. 김조순이라는 이름도 정조가 하사하였는데, 1785년 문과시험에 급제한 김낙순(김조순 원래 이름)이 김상헌의 후손임을 알게된 정조가 이름 가운데 할아버지 조(祖)자를 넣을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초계문신으로서도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김조순을 세자의 사부로 삼았고, 죽기 직전에는 김조순의 손을 잡으면서 순조를 부탁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정조는 영조시대의 외척가문(풍산홍씨·경주김씨)를 철저하게 탄압했음에도, 정작 아들의 외척에게 왕권 보좌를 부탁함으로써 스스로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것은 아닐까 한다. 김조순의 뒤를 이어서는 김좌근·김병기 등이 풍양조씨 조만영 집안과 경쟁하면서 세도가문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한, 풍양조씨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 것은 숙종 이후 많은 벼슬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숙종시대 조도보는 아들 3명(조상경·조상강·조상기)과 손자 8명을 두었는데, 이들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조상경은 영조시대 이조판서를 10여년이나 지내며 인사를 좌우했고, 조엄(조상경 아들)은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왔다. 조엄의 아들이 조진관이고, 조엄의 손자가 조만영·조인영이다. 19세기 순조시대 풍양조씨는 안동김씨와 결탁하면서 중앙권력에 더욱 가까워졌는데, 조만영의 딸이 효명세자빈(훗날 신정왕후·조대비)로 간택되면서, 조인영을 비롯한 외척세력이 각 군영과 비변사의 중요직책을 차지했다. 이후 헌종(조대비 아들)이 친정을 나서면서, 국정운영에 있어서 풍양조씨가 안동김씨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그러나 안동김씨의 강력한 견제·대응, 헌종의 급사, 내부분열 등으로 풍양조씨의 세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 국가체제의 한 축인 자유의 가치와 권위는 한껏 높아졌지만, 이는 형식과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국가를 지배하는 특권층의 사고에는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고민이 크게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통령이 임명한 국가수사본부장의 과거 학폭 관련 소송은 검찰 내부에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전해지는데, 대통령실은 무조건 몰랐다는 브리핑을 하면서 국민의 핀잔을 듣고 있다. 과거의 과오를 잊은 채 국가고위직을 수행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는 현실인식은, 한 시대의 가치를 말로만 앞세우고 그 내실을 허문다는 측면에서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궤를 같이 한다는 의견이 있다. 나라의 권력을 독점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실상과 괴리되어 있는 것. 19세기 세도정치는 조선의 체제가 붕괴해 가던 과정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되겠다.

 

[Music] 손아귀 속의 권력

https://www.youtube.com/watch?v=jOLws7k4PGQ

Power in Grasp #손아귀 속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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