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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

by Spacewizard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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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피로 물들여졌던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부마·세도가·실학자·개화파를 거쳐

민영익·알렌·안경수·이호준·의료기관·학교·법원

왕권과 모반의 공간이 결국은 다시, 최고권위(헌법) 공간으로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UpkcZpIU_ZQ

 

안국역사거리에서 북쪽으로 걷다보면, 왼편에 헌법재판소가 위치한다. 헌법재판소의 뒷담 너머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99칸 대저택이 보이고, 계속 걷다보면 가회동·삼청동으로 길이 이어진다. 대학시절 젊은 기운과 호기심에 서울 곳곳을 많이도 걸어 다녔다. 덕수궁 근처 정동과 경복궁 근처 삼청동은 지방 출신의 이방인에게 큰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근데 전통적인 공간으로 생각했던 곳에서 다소 이질적인 건축이 몇 개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덕수궁 석조전과 안국역의 헌법재판소였다. 웅장한 서양식의 건축물로 주변의 서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건축물이 안고 있는 역사를 알고 난 지금이야, 현재를 살아가는 나로 하여금 그 공간이 지닌 험난했던 과거를 상기시키게 해줄 뿐 아니라 많은 교훈과 평온함도 가져다 준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조선초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정도전의 공간에 대해서 살펴 봤다면, 이번에는 구한말 권력과 반권력(역모)이 공존했던 기운 드센 헌법재판소 자리의 역사를 알아보자.

정도전의 공간에서 불과 700m 거리 헌법재판소 지도 카카오맵
정도전의 공간에서 불과 700m 거리, 헌법재판소 [지도:카카오맵]

 

유혈정변의 역사로 등장한, 재동

 

헌법재판소의 현재 주소지는 재동(齋洞)인데, '재(灰)를 덮은 마을'이라 하여 잿골(회동, 齋洞)이라 부르던 것이 갑오개혁 당시 재동으로 표기된 것이다. 마을이름의 유래는 계유정난과 관련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등을 참살하였고, 이들의 피가 내를 이루면서 비린내가 진동하여 마을사람들이 집 안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북촌은 5개의 언덕(맹현·홍현·관현·송현·안현)으로 마을경계가 구분되었는데, 재동은 홍현에 속했다. 홍현(紅峴)현재의 정독도서관 앞의 고개로, 당시 주변에 붉은 흙이 많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재동 북측에는 가회동(嘉會洞)이 있고, 우측에는 계동(桂洞)이 있다. 가회동은 조선초 한성 북부 가회방에서 유래하였고, 계동은 북측 삼각산 자락인 총계산(叢桂山)을 딴 산동(桂山洞)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의료기관 제생원이 있던 제생동에서 유래하였다는 말도 있는데, 제(濟)가 계(桂)로 음변했다는 것이다. 

 

능성위궁 (현 헌법재판소 동남쪽 별관자리)

풍양조씨 조상경 집터

 

화길옹주는 숙의문씨가 낳은 영조의 12번째 딸로, 영조가 환갑이 되던 해인 1754년(영조 30)에 태어났다. 1765년(영조 41) 영조는 삼간택으로 12살 동갑내기인 구민화(능성위)를 사윗감으로 골라 결혼시켰다. 능성위궁영조가 출합하는 화길옹주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추정되는데, 출합(出閤)은 조선시대 왕자·왕녀가 가례 후에 궁궐 밖의 살림집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화길옹주는 1남 2녀를 낳았지만, 1773년(영조 49) 향년 19살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한때 헌법재판소 자리는 중신 조상경의 집터였는데, 100년 사이에 판서·정승 수십 명이 배출되어 「7대 판서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명당이었다고 한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 언급된 풍양조씨 세도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 바로 조상경이다. 이후 신정왕후 조대비는 친정이였던 이 곳에서 흥선대원군과 모의하여 안동김씨 세도를 뒤엎는데, 운현궁(대원군 거처)과는 도보로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박규수 집(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1788년 대궐의 춘장대를 보수할 당시, 실학자(북학파) 박지원은 중국식으로 구운 벽돌을 사용하는 것이 견고하며서도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1796년 60세 박지원은 계산동의 한 과수원을 매입하여 중국식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를 계산초당이라 하였다. 계산초당은 당시로써는 최신 건축공법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던 것이다. 구한말 근대화를 주장했던 박규수(박지원 손자)는 계산초당에서 태어나서 1877년에 재동사저에서 숨을 거뒀는데, 재동사저가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이다. 당시 박규수의 중사랑 앞마당에 현재의 백송들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박규수는 효명세자(순조 외아들)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효명세자의 급사와 부모의 죽음으로 상심한 나머지 20년 간 칩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 때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으며, 실학적 학문경향을 심화시켰다. 1866년 7월 미국함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는 쇄국정책에 반대한 개화사상가였음에도 외인들의 만행을 지켜만 볼 수 없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다.

 

쇄국정책을 버리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자는 제안이 흥선대원군에게 거듭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4년 68세 박규수는 우의정을 사임하고 재동사저에 칩거한다. 양반자제들을 중심으로 신진개혁세력을 육성하여 자주적인 개국과 근대화의 힘을 준비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당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든 인물들로는 김옥균·박영효·박영교·김윤식·서광범·홍영식 등이 있었는데, 훗날 조선을 근대적인 체제·국가로 개혁하기 위한 정치혁명인 1884년 갑신정변의 개화당 주역들이다. 이렇듯 북학파·개화파는 박규수를 매개로 사상적 사제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흥선대원군 그리고 여흥민씨 정권 하에서 흔한 귀양살이 한 번 가지 않고, 오랜 파직도 겪지 않으면서 정치적 격변을 잘 헤쳐 나갔던 인물이 박규수였다. 하지만 박규수가 죽은 이후, 그 집터는 거센 풍상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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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집 (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박규수 재동사저 북쪽에 홍영식의 집이 있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홍영식이 처형 당한 이후로,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는 역모자들의 거처가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개화파 관료 홍영식은 현대식 우편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1881년 방일(수신사), 1883년 방미(보빙사) 경험이 있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는 야만의 시대였는데, 이는 권력자가 사람(인)과 덕치(덕)를 앞세워 '시스템과 법치'을 넘어선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남송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500년간 도학정치를 펼친 결과는 가난·부패이었고, 그 가난·부패를 끊고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시도가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 목적은 안으로는 가난의 진앙인 부패한 민씨정권 타도, 밖으로는 민씨정권을 받쳐주는 사대본국(중국)과 절연이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은 1884년 12월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김옥균·서재필 등과 거사를 일으켰으나, 3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망명을 고려치 않았던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하여 북묘로 갔다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며칠 뒤 시신을 토막내는 능지처사를 당했고, 이후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벤다)는 뒤늦게 생전의 죄상이 드러나면서 시체를 무덤(관)에서 꺼내 그 시체에 처하는 극형을 말한다. 역적에 대한 연좌제는 이미 100여년 전 1776년 정조의 즉위와 함께 금지되었음에도, 고종은 홍영식의 가족들을 연좌하여 처벌하였다. 이전 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배신>에서는 전근대사회에서의 배신이 죽음과 같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였는데, 조선왕정은 배신의 대가로 죽은 이를 2번 더 죽이는 잔인한 과정을 보여준다.

 

민영익 집터 (현 헌법재판소 동남쪽 별관자리)

외아문 터 (현 헌법재판소 동남쪽 별관자리)

능성위궁 터에 민영익(명성황후 조카)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민영익의 집은 구식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이는 민영익은 신식군대(별기군)의 실질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 해 12월 민영익의 재동집터에는 외아문(外衙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들어서게 되는데, 외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외무아문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1895년 외부(外部)로 개칭된다. 1896년 6월에 이르러서야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이전한다.

광혜원, 제중원 (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1880년대 제중원 터 좌와 2000년대 헌법재판소 항공사진 우 출처 프레시안
1880년대 제중원 터(좌)와 2000년대 헌법재판소 항공사진(우) [출처:프레시안]

 

1884년 9월 조선에 들어온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공의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그 해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갑신정변에 연루된 홍영식은 처형되었고, 그의 집은 파괴·몰수되었다. 알렌이 갑신정변 와중에서 심한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일을 계기로 고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1885년 1월 27일 병원건설계획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다. 당시 외아문에서 마련해 준 병원자리가 홍영식으로부터 몰수한 집이었다고 전해진다.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홍영식의 저택을 처음 방문했을때 한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고, 문짝·창문·스토브·서류와 벽에 걸린 물건까지 극심하게 약탈된 상태로 뼈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조선왕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 은혜를 펼치는 집)이 설립되었고, 곧이어 4월 26일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했다. '만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제중(濟衆)을 딴 제중원은 빈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당시에는 외과질환을 '빈천자의 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서 제중원이 외아문 북쪽의 두 번째 집인 홍영식의 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제중원은 의학교 설립과 무관하게 환자수요만으로 확장이 불가피했다. 다음 해 1886년 봄에 알렌은 제중원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1886년 8월 14일 병원 확장이 아닌 이전을 건의했다. 제중원은 오픈 2년 만인 1887년 초에 구리개의 청국병영 옆(전 외환은행 본점, 현 하나금융그룹 자리)으로 확장이전하면서, 현 명동성당에 이르는 너른 부지에 40병상 규모의 병원을 지었다. 당시 구리개는 약재상들이의 밀집으로 약업의 중심지였으며, 혜민서(惠民署)도 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클리블랜드장로교회의 장로 세브란스(Severance)의 기금으로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신축·개원하게 되는데, 병원이름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안경수 (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이호준 집 (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광제원 (현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


박규수의 재동사저는 안경수에게 넘어갔는데, 개혁파 안경수는 1895년 경무사·군부대신을 지냈고, 훗날 독립협회 초대회장이 된 인물이다. 1898년 7월 황제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0년 1월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준다는 고종의 유화제스처에 귀국·자수한다. 하지만 심한 고문을 받은 안경수는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죄명은 영선군 역모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와 황제양위 미수사건에 관련된 죄였다. 이후 안경수의 집은 중신 이호준에게 넘어갔는데,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이호준은 조선의 소문난 권력자였다. 1900년까지 이호준은 이완용(이호준 양자)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 거주했다고 한다. 1900년 대한제국정부는 이호준의 집을 매입하여 광제원(국립병원)로 사용했다. 1907년 광제원이 의학교·의학교부속병원·대한적십자병원과 함께 대한의원으로 통합된 뒤에는, 1910년까지 관용건물로 사용되었다.

 

경기여자고등학교 (1910~1945)

1908년 4월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설립된 '관립한성고등여학교'는 공조뒷골(현 세종문화회관 서쪽)에서 개교했는데, 1910년 2층 규모의 재동교사를 신축·이전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조선교육령에 따라 학교명이 경성여보고(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1910년대 당시 경성여보고는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국의 수재와 명문가 자녀들이 찾는 명문학교였다. 당시 경성의 사립여학교들(이화·배화·정신 등)은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운영하고 있었다. 1913년 경성여보고는 경운동(운현궁 서쪽, 현 서울노인복지센터 자리)으로 이전했다가, 1922년 4월 다시 재동교사를 신축·이전하면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박규수의 집터에 위치한 기숙사는 앞마당에 백송이 서 있어 백송료(白松寮)라고 불렸는데, 이 백송은 원래부터 박규수의 집마당에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기숙사를 료(寮)라고 부른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5일 중구 정동 일본인여학교 건물(전 덕수궁 선원전 내 흥덕전·흥복전 터)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1951년 9월에 교육법 개정으로 경기여자중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88년 2월 강남구 개포동 현재위치로 이전했다.

창덕여자고등학교 (1949 ~ 1989)

1941년 4월 '경성제3공립고등학교' 설립인가에 따라 종로국민학교 교사(현 조계사 남쪽)를 차용하여 개교하였는데, 그 해 1941년 12월 신당동교사를 신축·이전하였다. 1945년 '서울제3공립고등여학교'로 바뀌고, 1947년 '서울제3공립고등여자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49년 7월 23일에 경기여고가 있던 재동교사로 이전한 후, 그 해 10월 6년제 '창덕여자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51년 8월에는 학제개편에 따라 '창덕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지만, 1954년까지 미8군이 재동교사를 이용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창덕여고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창덕여중이 재동에서 정동(전 프랑스공사관 터)로 이전하였고, 헌법재판소 부지로 확정되면서 1989년 2월 창덕여고는 현재 위치인 방이동으로 이전했다. 창덕여고 본관이 외아문 자리였고, 운동장 서북쪽에 있는 건물이 홍영식의 집터였다.

1960년대 재동 창덕여고 일대 오른상단에 백송이 보임
1960년대 재동 창덕여고 일대, 오른상단에 백송(白松)이 보임

 

헌법재판소 (1989 ~ 현재)

1987년 실시된 국민투표로 확정한 현행헌법(제9차 개정헌법)에 의거하여, 헌법재판소의 신설이 결정된다. 이후 1989년 12월 헌법재판소 재동청사 신축을 위한 부지매입계약이 체결되고, 1991년 3월 착공하여 1993년 6월 완공한다. 서초동 대법원에 비해 건물높이가 많이 낮은데, 이는 인근의 국가문화재(경복궁·창덕궁·백송)로 인해 고도제한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법령의 위헌여부 및 분쟁심판 등을 관장하는 특별재판기관으로,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 따라 설립된 헌법위원회가 그 시초이며, 제2공화국 헌법에서 헌법재판소를 규정했음에도 5.16 군사정변으로 실제 구성되지는 못했다. 이후 1987년 6월 국민은 항쟁을 통해 개헌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른 개헌과정에서 헌법재판을 전담할 헌법기관의 필요성을 제기되어 신설하였다.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역사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그 흔적을 남겼는데, 정말 지기(地氣)가 느껴진다. 홍영식·안경수는 모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이호준은 천수를 누렸지만 이완용은 만고의 역적이 되었다. 불과 수 십년 사이에 그 작은 땅덩어리에서 줄줄이 역적이 나온 예도 찾기 힘들 것이다. 제중원·광제원으로 쓰이던 시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까. 흉하기로 치면 서울 안에 이보다 흉한 터도 없을 터인데, 국가적 틀을 지키는 헌법재판소가 그 자리에 누르고 서 있으니 제격으로 보인다. 과거의 '역모'를 현대적 개념으로 바꾸면 '위헌'이라 할 수 있고, 위헌여부를 심판하는 헌법재판소가 역적들의 집터에 서 있는 것도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모반의 세레나데

https://www.youtube.com/watch?v=4FbUDVCZAA0

Rebel Serenade #모반의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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