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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

by Spacewizard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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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풍문여고, 지금의 서울공예박물관

세종이 막내 영응대군을 위해 지은, 동별궁

영응대군의 자금지원을 받은, 수양대군

성종이 혼인을 올린 동별궁을 맡게된, 월산대군

옹주·공주에게 연경궁을 하사한, 중종·인조

흥선대원군이 지은 안동별궁, 순종비의 왕실교육장소

일제강점기 휘문의숙에 매각된 인연, 풍문여고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lGnsksYjY6M

 

안국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오게 되면 안국빌딩이 위치하는데, 안국동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 율곡로 3길(감고당길)은 예전부터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라 자주 즐겨찾는다. 감고당길 초입의 오른편에는 10여년 전에는 풍문여고가 있었고 왼쪽에는 약 4m 높이의 담장이 서있었지만, 지금은 두 곳 모두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신했다. 우선 오른편의 풍문여고 자리는 학교건물 5개를 리모델링 한 후, 2021년 11월 29일 서울공예박물관이 개장했다. 왼쪽 담장도 2022년 10월 7일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개방되면서 1.2m 높이의 돌담으로 낮아졌다. 여기서는 오른편의 공간이 조선시대 왕가의 공간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변해온 공간의 변천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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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막내아들에게 선물한, 동별궁

1434년(세종 16)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8남 영응대군은 세종으로부터 매우 큰 사랑을 받았다. 다른 왕자들은 아버지 세종을 진상(進上)이라 부른 것과는 달리, 영응대군은 15살까지 세종을 편하게 부르며 항상 곁에서 식사를 하였다. 세종을 영응대군에게 내리기 위해 일찍이 안국방동에 위치한 이교의 집을 사두었는데, 1445년(세종 27) 4월 영응대군이 여산 송씨와 혼인하게 된다. 당시 김종서는 "이교의 집터는 여염 사이에 있고, 땅도 또한 기울고 좁으며, 또 저자와 가까워서 시끄럽고 고요하지 못하오니"라면서 대군의 집터로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결국 세종의 뜻에 따라 안국방동에 집터를 정하고 인가 60여구를 헐었다. 또한 세종은 전용면적을 확장하기 위해 대들보 길이를 8자에서 10자로 늘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1449년(세종 31) 봄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완성된 이 집은 동별궁(東別宮)이라 불렸다. 하지만 집이 완성된 해에 세종은 질병을 이유로 며느리 송씨를 내쫒았다.

세종 가계도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승하한다. 문종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영응대군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문종·세조는 동생들을 잘 대해줬는데, 특히 세조는 영응대군의 집을 수차례 들러 연회를 베풀었으며, 영응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음식을 들지 않을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게 영응대군은 든든한 쿠데타 자금지원책이었을 것이며,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은 영응대군과 부인 송씨와의 재결합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영응대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세종이 죽은 후 수양대군은 대군 2명(임영대군·영응대군)과 큰아버지 양녕대군의 지지를 받으며 종친세력을 형성했다.

세종, 동별궁에서 승하

1450년 세종은 완공 후 1년된 동별궁에서 승하한다. 세종은 잦은 병치레와 자녀요절 등으로 경복궁 풍수설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말년의 세종은 경복궁을 기피하여 아들·사위·형제 등의 집으로 거처를 자주 옮겼는데, 동별궁을 지을 당시 부지 내 동쪽에 거처하기 위해 만든 작은 궁에서 눈을 감았던 것이다. 세종의 빈소로 삼았던 동별궁에서 문종의 즉위식도 거행되었다. 당시 동별궁은 한성 내의 신축저택 중에서도 단연 핫플레이스였음이 분명하다. 약 4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후, 세종의 후궁들은 자수궁으로 옮겼다. 영응대군은 3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동별궁은 첫째 부인 송씨의 거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사당을 모신, 성종

이후 송씨는 동별궁을 성종에게 바치게 된다. 성종(자을산군)은 의경세자(세조 장남)와 세자빈 한씨의 차남로 태어났는데, 형이 월산군이다.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여윈 자을산군은 모친과 함께 출궁하게 된다. 1467년(세조 13) 자을산군은 동별궁에서 한명회의 딸(훗날 공혜왕후)과 혼례를 치렸다. 1468년 세조가 죽은 후, 즉위한 예종(의경세자 동생)도 약 10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후계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제안대군(예종 아들)은 3살이었고, 월산군은 병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세조 비, 성종 조모)의 명에 따라 13세의 자을산군(훗날 성종)이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했다.

 

왕위계승 순위에서 밀렸던 성종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희왕후의 의지, 한명회(성종 장인)의 영향력과, 어린 왕을 내세워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훈신들의 이해관계가 두루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군·제안군을 대군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공신에 임명한다. 즉위 초반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7년의 섭정기간 동안 국정은 원로대신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470년(성종 1) 성종은 남이장군과 함께 연루되어 처형된 조영달의 집을 몰수하여, 영응대군 부인 송씨에게 하사한다. 1년 뒤인 1471년(성종 2) 송씨는 본인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인연으로 살고 있던 동별궁의 일부를 성종에게 바쳤는데, 성종은 이 곳을 연경궁(延慶宮)으로 고쳤다. 성종은 부친 의경세자의 사당을 세운 연경궁을 형 월산대군에게 관리하게 하였고, 자주 왕래하면서 월산대군과의 우의를 다졌다. 이후 성종은 연경궁 내에 월산대군이 만든 정자에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이것이 월산대군의 호가 되었다. 성종은 월산대군의 연경궁 뿐만 아니라, 그 옆의 위치한 송씨의 집도 자주 행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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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편애를 받은, 딸 혜순옹주

월산대군 부부가 후사 없이 죽은 이후, 월산대군의 집은 비어 있게 되었다. 이후 중종은 연경궁을 혜순옹주(중종 서장녀, 경빈박씨 딸)에게 하사한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경빈박씨는 중종이 사랑의 감정으로 혼례를 올린 첫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복성군)도 가장 먼저 낳으면서 중종의 사랑을 차지했다. 1522년(중종 17) 중종은 딸 혜순옹주가 김인경(광천위)와 혼례를 치르면서, 출합할 때 연경궁을 수리하여 하사했다. 당시 많은 신하들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을 공주도 아닌 옹주(후궁 딸)에게 하사하는 것에 대해 격력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연경궁을 옹주에게 주었는데, 이러한 편애가 오히려 처참한 운명으로 내몰았다. 1527년(중종 22) 세자를 저주한 「작서의 변」으로 경빈박씨와 복성군은 사약을 받고, 혜순옹주는 폐서인이 되었다. 세자(훗날 인종)가 거처하는 동궁 뜰 은행나무에 죽은 쥐를 매달았다고 한다. 

핍박에 대한 보상을 받은 최장수 공주, 정명공주

1623년 즉위한 인조는 정명공주를 홍주원(영안위)와 혼인시키면서, 출합할 때 혜순옹주의 집을 하사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에게 핍박받았던 인목대비(선조 계비)와 정명공주(인목대비 딸)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당시 21세의 정명공주는 혼인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이 집은 훼손되었다. 광해군 때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하다 남은 200칸에 드는 재목·기와를 하사하여 정명공주의 집을 다시 지었는데, 도성 안에서 갑제(크고 화려하게 아주 잘 지은 집)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당시 대간에서는 궁을 지을 목적으로 마련한 재목·기와를 공주의 집을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반대하였으나,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100여칸으로 축소하여 완공하였다. 선조의 장녀이자 영창대군의 누이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명공주는 7남 1녀를 두었고, 그 후손이 번성하여 84년 동안 이 집에 거주했다고 한다.

또 다시 왕손의 가례 공간, 안국동별궁(안동별궁)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1869년 흥선대원군이 이 집에 있던 전계대원군(사도세자 서손자, 철종 부)의 사당을 영평군(철종 형)이 살던 누동궁(樓洞宮, 현 종로세무서 동쪽)으로 옮긴 뒤, 1879년부터 이 부지에 별궁을 짓기 시작하여 1880년에 완성되었다. 참고로 누동궁은 영혜옹주(철종 딸)과 박영효가 혼례를 올린 곳이다. 이 때 명성황후는 3남 1녀를 낳았으나 어릴 때 모두 죽고 둘째 아들 척(훗날 순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후 9세가 되어 가례를 앞두고 있었다. 삼간택을 치룬 신부는 별궁에서 왕실교육을 받는데, 1881년(고종 18) 세자빈으로 민태호의 딸이 간택되었고 교육장소를 안국동별궁으로 정했다. 1882년 2월에 성대한 가례식을 거행했는데,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는 1897년 황제국이 되면서 황태자빈이 되었고 1904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황태자빈 민씨의 삼년상을 치룬 후인 1906년 2월 다시 황태자의 가례를 행하기 위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금혼령을 내리고 안국동별궁에서 새 황태자빈을 간택한다. 이때 윤택영의 딸이 간택되어 1907년 1월에 황태자와 윤씨의 가례식이 거행되었다.

1910년대 안동별궁 전경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10년대 안동별궁 전경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폐궁 이후, 나인들의 공간

1908년 순종은 황위에 오르고, 황태자빈 윤씨는 순정효황후의 직책을 받아 창덕궁에서 살았다. 1910년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1926년 순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다가 1966년 숨을 거두었다. 1907년 이후 안국동별궁은 폐궁되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에 살던 나인들이 옮겨와 살게 된다.

친일파의 손에서, 풍문여고

휘문은 민영휘의 이름을 떠서 만들었다. 민영휘는 악명 높은 친일파이자 조선 최대 갑부 중 하나로, 여성편력이 심해 첩을 여럿 두었다고 한다. 민영휘의 첩들은 지역명 뒤에 마마를 붙여서 호칭하였는데, 해주마마로 불린 안유풍은 3명의 아들(민대식·민천식·민규식)을 낳았다. 이전 글 <왕릉 위에서 세워진 역사, 골프장>에서 1938년 기준으로 경성골프구락부에 가입한 조선인 보통회원 43 중에 민대식·민규식이 포함되었다고 언급했었다. 1936년 이왕직은 별궁 6,000여평 중 4,000평을 민대식(민영휘 아들)의 휘문의숙 매각하여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의숙(義塾)은 공익을 위하여 의연금을 모아 세운 교육기관으로, 사설로 세워진 서당·글방인 사숙(私塾)과 대비되는 말이다. 북쪽 약 1,300평에 나인들의 숙사를 지으면서, 나인들이 살던 남쪽 도로변 약 750평은 최창학의 대창산업에게 매각했다. 훗날 최응호(최창학 장남) 소유로 바뀌었고 현재는 안국빌딩이 들어서 있다.

 

1945년 3월 민대식의 손자 민덕기(민영휘 증손자)가 증조모 안유풍(민영휘 첩)의 유지를 받들어 경성휘문소학교터에 풍문여학교를 개교하였는데, 안유풍의 이름을 따서 풍문이라 하였다. 1950년에 풍문여자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1966년 풍문여고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남아 있던 안국동별궁 건물들(정화당·경연당·현광루)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정화당은 우이동에 위치한 민병도(민영휘 손자)의 소유지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후 이 곳은 금성산업(훗날 쌍용산업)로 넘어갔다가, 현재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앙연수원의 일부가 되었다. 경연당·현광루 민병도가 사장으로 재직했던 한양컨트리클럽 내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2017년 풍문여고는 강남 내곡지구로 이전하였고, 그 자리에 2021년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섰다.

안동별궁 유적 경계

고려는 화려하고 장엄한 불교미술과 고고하고 우아한 청자를 낳은 반면,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여 청렴하고 담백한 공예품이 주류를 이루면서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공예가 발달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의 유교는 공예를 서민의 품으로 돌려줌과 동시에 사농공상에 따라 공예장인의 능력을 소홀히 다뤘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끊임없이 한국의 문화재를 약탈해 가고 도공을 끌고 갔으며, 심지어는 조선의 정신까지 왜곡 및 말살하려 했고, 300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에도 국보급 각종 문화재 수탈과 민족문화말살을 이어갔다. 이 와중에도 조선의 도공은 자의든 타의든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조선시대 내내 소외받던 공장에서의 공예작품들이 신분을 거슬러 올라 왕가의 공간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Music] 옛일을 느끼며

https://www.youtube.com/watch?v=tOtupEI82WE

With a Feeling of the Past #옛일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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