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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밤과 행정이라는 과일(果)의 도시, 과천

by Spacewizard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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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천으로 골프라운딩이 취소되면서, 스크린골프를 치기 위해 과천으로 이동했던 적이 있다. 저녁 술자리를 위해 인근을 배회하면서 낯익은 공간이라는 것을 느꼈는데, 과거에 자주 왔던 별양동 '소방서삼거리' 상권이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변하지 않은 건물과 골목길에는 제법 유동인구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방문한 과천은 주공아파트들의 재건축이 완료되면서 대규모 고층아파트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2000년대 중후반 몇몇 지인들이 과천과 평촌에 거주하고 있어서, 술 마시러 과천·평촌·범계를 자주 방문했었다. 당시 버블세븐에 속했던 평촌과 정부제2종합청사(정부과천청사)가 자리잡고 있던 과천은 비교적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기억되는데,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쾌적함도 함께 기억이 남는다. 당시 서울과 과천를 오가면서 단절된 공간감을 많이 느꼈는데, 이유는 남태령을 넘으면서 보이는 거대한 채석장 부지가 뇌리에 크게 박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시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절경이라 생각하여, 남태령 드라이브를 상당히 좋아했었다. 여기서는 남태령 이남의 과천과 인덕원의 과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1천여년 전부터 과일(果)을 사용한 지명, 과천

 

삼국시대에는 고을(군·현) 간의 경계과 오늘날의 행정구역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삼국시대 과천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장수왕에 의해 고구려에 복속되어 '동사힐' 또는 율목(栗木)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율진(栗津)으로 개명되었다. 고구려 율목군은 현 과천·안양·군포·서울(관악구·동작구·서초구·용산구 일부)를 포함하는 광역대였는데, 글자 그대로 이 지역에 밤나무가 많아서 지어졌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후 나루를 의미하는 (津)으로 지역명이 변경된 이유는 당시 그 영역이 한강이북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리가 있다. 율진군은 3개의 현(곡양현·공암현·소성현)을 관할 하에 두고 있었는데, 곡양현은 현 서울 남쪽 일부(구로구·관악구·동작구·영등포구·광명시 일부), 공암현은 현 서울 서쪽 일부(강서구·양천구 일부), 소성현은 현 인천시·부천시·시흥시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율진군을 중심으로 한 사방에는 아래의 군들이 있었는데, 안산이라는 지명은 신시대 당시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율진군 동쪽 : 소천군(현 광주·여주)

율진군 서쪽 : 안산군(현 안산·시흥), 장제군(현 부평·김포)

율진군 남쪽 : 수성군(현 수원), 당은군(현 화성)

율진군 북쪽 : 한양군(현 서울·고양·양주)

 

고려는 940년(태조 23) 행정구역을 정비하게 된다. 이 때 율진은 과주(果州)로, 곡양은 금주(衿州)로 개명되었고, 장제군은 수주(樹州)로 승격되었다. 이후 과주군은 3개의 현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영역이 점차 축소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금주에 신설 지방관인 단련사가 설치되었고, 1018년(현종 9)에는 공암·소성이 수주로 넘어갔다. 결국 과주는 광주목으로 편입되면서 감무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과주에는 고려 성종시대에 만들어진 별호가 있는데, '부안' 또는 '부림'이라고 한다. 1413년(태종13) 조선은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당시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는 1목 8도호부 6군 26현으로 개편되었는데, 과주군은 과천(果川)현으로 개칭·강등되었고, 금주현는 금천(衿川)현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과천이라는 지명은 600여년 전에 정해졌지만, 넓게 보면 (果)를 사용하기 시작한 1080여년 전부터 봐도 무방할 듯하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과천현은 과천군이 되었다. 당시 과천군은 그 관할 아래 7개면(군내면·상북면·하북면·동면·남면·상서면·하서면)을 두었다.

 

군내면 : 현 과천시

상북면 : 현 서울 동작구 일부(동작동·사당동), 서초구 일부(반포동·잠원동·방배동)

하북면 : 현 서울 동작구 일부(흑석동·노량진동·본동)

동면 : 현 과천시 주암동, 서울 서초구 일부(양재동·우면동·원지동·서초동)

남면 : 현 군포시

상서면 : 현 안양시 동안구

하서면 : 현 안양시 만안구

현재 과천 행정구역은 1914년 3월 군면폐합으로 확립되는데, 군내면이 동면의 주암리를 병합하면서 과천면이 되었다. 과천면은 당시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6개리(관문·문원·갈현·하리·막계·주암)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이후 과천시의 원형이 된다. 참고로 서울대공원 부지에 속했던 막계2리는 유명한 사이비종교 장막성전과 그 신도 40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호생기도원의 교주 김종규가 여신도 스캔들로 인해 이전한 곳이 막계2리였다. 이후 막계2리에서도 여자문제를 일으킨 김종규는 유재열에 의해 추방되었고, 개명한 장막성전의 교주가 된 유재열은 막계2리를 말세심판의 피난처로 삼았다. 이후 서울대공원 계획에 따라 장막성전은 문원리로 이전하였다.

2019년초 기준, 과천시 법정동 출처 세계사이버대학교 부동산금융자산학과
과천시 법정동, 2019년초 기준 [출처:세계사이버대학교 부동산금융자산학과]

 

오랫동안 험난한 여우고개로 불렸던, 남태령 

 

남태령은 고려시대에 엽시현(여시고개 음차)으로 불리다가 호현(여우고개 한자어)으로 개칭되었는데,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곳으로 유명했다. 고려시대에도 개경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역할을 했던 여우고개는, 한양천도 이후 한성에서 과천방향으로 가는 삼남로의 길목으로서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 교통량이 늘면서 도적들이 끊이지 않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악산 북쪽 산등성이에 목장을 설치할 정도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조선시대 말과 마구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병조 소속의 사복시가 있었고, 조선후기 사복시가 관리한 목장이 138개소였다고 언급했었다. 아마도 관악산에 위치했던 목장도 국가에서 관리했던 목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랫동안 여우고개로 불리던 곳이 남태령으로 불리게 된 계기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정조 부) 능행차를 가던 도중에 신하들에게 고개이름을 물었고, 엉겁결에 과천현 이방이 '남쪽의 큰 고개'라는 의미로 남태령이라 답했다고 한다. 이는 왕에게 여우고개라는 요망한 이름을 그대로 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행으로 한때 유명했던, 인덕원

 

인덕원은 조선시대 환관들이 집단거주하며 선행(인화)를 많이 베풀어서 인덕(仁德)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후 공무원·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원(院)을 설치하면서 인덕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덕원은 임진왜란 이후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전국 1,200여개에 달하던 원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전쟁 이후 전국각지에 봉수대가 설치되면서 원의 중요성이 크게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난중일기에 의하며 1596년 이순신이 수원으로 이동하다가 말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인덕원에서 한참을 쉬었다고 하니, 임진왜란이 끝나기 전에는 인덕원은 그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정조에게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는 특명을 남겼지만,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한 준비를 꾸준히 했다. 1776년(정조 즉위) 3월 존호를 '사도'에서 '장헌'으로 바꾸고,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묘를 수원부 화산으로 이전하면서 현륭원이라고 하였으며, 1794년 축성기간 10년을 내다보고 화성 건설에 착수했다. 세자(훗날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의 신분으로 화성에 머물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론 기득세력이 점령한 한성이 아닌 화성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고, 자신이 아닌 아들(순조)가 조부를 국왕으로 추존함으로써 영조의 엄명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1800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사도세자의 복권도 함께 좌절된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종이 사도세자를 추존하게 되는데, 이는 남연군 이구(고종 조부)가 1815년 은신군(사도세자 아들)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이다.1899년(광무 3)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종·장조 순으로, 현륭원을 융릉으로 추존하였다.

 

정조는 13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하면서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는데, 이 중 초반 6번의 행차는 남태령을 지나는 인덕원길을 이용했다. 1793년(정조 17) 1월 화성행차 도중에는 인덕원에서 친히 어가에서 내려 인근의 노인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1795년(정조 19) 안양천 나무다리 만안교가 돌다리로 개축되고 시흥행궁이 신축되면서 행차길이 시흥길(시흥·안양·수원)으로 변경된다. 아무래도 어가행차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덜컹거리는 고개길 보다는 평탄로가 편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노론벽파 김상로의 형(김약로) 묘가 백운호수 남쪽에 위치하여 인덕원길을 기피했을 수도 있다. 정조는 김약로 묘를 지날때면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박정희 주도로 만들어진 행정도시, 과천

 

대학시절 배운 것들 중에 가장 흥미롭고 인상깊었던 것은 서울시립대 교수 손정목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알게된 것이다. 꽤 많은 분량의 책이지만, 쉼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저의 필력에 20년 넘게 감동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 책 4권에는 과천에 대한 언급이 있다. 박정희는 1960년대부터 과천면을 주목하였으며, 청계산 기슭 막계리 일대를 신무기(핵무기·미사일) 생산기지로 하기 위해 130여만평의 토지를 구매했지만, 북한의 포탄공격목표가 될 가능성으로 인해 서울대공원을 대체조성하였다. 하지만 관악산 기슭 문원리 일대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북한의 장거리포탄을 관악산이 직접적으로 막을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1977년 박정희는 문원리에 정부제2종합청사를 짓고 그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결심을 하고 관계부처 장관들에게 이를 지시했다.

 

과천신도시 개발의 배경에는 서울 인구집중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1964년 당시 정부는 1986년 서울인구가 1130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700~800만명 수준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행정수도 건설와 수도권 인구 재배치가 정책현안으로 떠올랐다. 1972년 강북도심 일대에 유흥시설·백화점·고등학교의 신설을 금지했고, 1975년 이후에는 강북 외의 서울지역과 수도권 인구가 증가하지 않도록 인구억제책을 실시했다. 특히 사정거리 200km가 넘는 북한의 장사정포와 휴전선 인근에서 발견된 2개의 땅굴은 정부를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당시 만들어진 3개 정책이 아래와 같다.

 

정책 1) 수도권 인구집중문제에 새로운 방향 수립

정책 2) 북한 장사정포의 안전지대를 찾아 서울 남쪽2정부청사를 지어 기획·경제부처 이전

정책 3) 서울에서 1~1.5시간 거리2수도를 건설하여 중앙정부기능을 완전히 이전

 

위 정책 2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1979년 4월 정부과천청사가 착공했고, 1980년 11월 과천 1단지 착공을 시작으로 12개 단지가 순차적으로 착공되었다. 1982년 정부제2종합청사가 준공되고, 1984년 5월 서울대공원이 개장한 이후, 행정신도시 과천면은 1986년 1월 과천시로 승격하였다.

 

국내 1호 테마파크, 서울대공원 내 서울랜드

 

1984년 개장한 서울대공원은 서울시가 창경원(현 창경궁)에 있던 동물원·놀이시설 등을 과천면 막계리로 이전한 것으로, 서울시는 임기 2년의 서울대공원장을 임명하고 있다. 서울대공원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이후, 국제적으로 내세울 미술관과 놀이공원이 들어선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랜드이다. 아시안게임 개막을 채 1달을 못남긴 1986 8월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대공원 부지 내의 문화시설지구에 위치하는데, 국제스포츠 행사를 앞두고 중앙청 국립박물관, 예술의 전당과 함께 신축된 것이다. 서울대공원 개장으로부터 4년이 지난 1988 5월 개장한 서울랜드는 서울대공원 내에 있는 국내 1호 테마파크로, 현재는 (주)서울랜드가 위탁운영 중에 있다. 서울랜드와 (주)서울랜드가 헷갈릴 수 있는데, 서울대공원 놀이공원의 명칭이 서울랜드이고, 이를 위탁운영하는 회사가 (주)서울랜드이다. 한일홀딩스(한일시멘트 지주사)가 대주주인 (주)서울랜드은 레저사업과의 시너지를 위하여 외식사업도 영위하고 있는데, 외식브랜드로 로즈힐(Rose hill), 캘리포니아피자키친(California Pizza Kitchen), 크래머리 브루어리(Kraemerlee brewing)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83년 서울시는 서울대공원 놀이공원사업을 수익형 민간투자사업방식 중 BTO방식으로 진행했는데, BTO(Build-Transfer-Operate, 건설-양도-운영)는 민간사업자가 시설을 건설한 후 정부·지자체에 기부채납하고, 이를 일정기간 유·무상으로 운영·수익하는 방식이다. 서울랜드는 8개 부문(놀이·교양·편익·조경·휴양·운동·교통·관리)에서 250여개에 달하는 방대한 시설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민간에 위탁운영이 불가피한 공간이었다. 애초 서울시는 놀이공원 시공·운영주체로 삼성을 희망하였으나, 대림산업이 선정되었다. 당시 삼성은 1976년 개장한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자본금 기준으로 재계 9위였던 대림산업은 1984년 1월 착공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자금조달의 차질로 사업을 중기포기하였다. 이후 서울시는 시공범위를 토목공사를 제외한 놀이시설로만 한정한 후에서야, 1985년 4월 당시 토목건축 도급순위 88위 한일건설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국내기술로는 어려웠던 놀이시설 설계는 일본 네즈건축연구소가 맡았다. 1984년 한일건설은 서울시와 30년 운영계약(20년 무상, 10년 유상)을 체결하였고, 1985년 8월 한일건설이 위탁운영 목적으로 한덕개발을 설립함으로써, 한덕개발은 2004년 7월 10일까지 무상사용할 수 있었다. 2014년 30년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신규사업자를 나타나지 않아 (주)서울랜드가 2027년 5월까지 서울랜드를 계속 유상사용할 예정이다.

 

과천(果川)은 600여년 동안 사용되어 왔던 지명으로, 그 이전에 사용된 과주(果州)·율진(栗津) 모두 과일(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관악산·청계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지형에서는 오래 전부터 밤·감 등의 과일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과실을 맺게 되었으니, 바로 행정이었다. 하지만 행정도시라는 정체성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유효기간이 30년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시 탄생로 인한 공동화 문제는 처음에는 대책이 없어보였지만, 다행히도 넓게 깔아놓은 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을 통해 조금씩 풀어나가는 중이다. 2023년 인구도 7.8만명으로, 2005년 6만명 대비 30%나 증가했다. 이제는 과거의 정체를 잊고, 자족도시로 성장해가는 과천의 모습을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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