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가을의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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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연말 관심사 중에 하나는 「다음해 공휴일과 그에 따른 연휴 가능성」인데, 이러한 관심에 부응하듯 많은 기사들에서도 다음해(심지어는 향후 몇년) 공휴일·연휴에 대한 분석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공휴일 중에서도 명절인 구정·추석이 가장 관심이 많은데, 명절 전날과 다음날을 포함한 3일 연휴가 주말·정식공휴일·대체공휴일 등으로 인해 장기연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의 명절은 명절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휴일로써의 의미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유년기에는 구정·추석에 할머니댁에 가는 것이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일단 맛있는 것을 다채롭게 많이 먹을 수 있었고, 집안의 장손을 반갑게 맞아주는 집안어른들의 모습과 함께 두둑한 용돈이 기대되었던 것 같다. 추석이면 할머니께서 손수 커다란 콩이 들어간 하얀 송편을 빚으셨는데, 성인주먹 크기의 투박한 송편을 나이 수 만큼 먹어라고 권했던 기억이 남는다. 요즘처럼 달달한 내용물이 아니라서 아이들이 좋아할 맛은 아니었지만, 쫀득쫀득한 쌀반죽이 중독성이 있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마치 한가위가 연중 최고의 날이라는 의미로 들렸는데, 한가위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던 말이었다. 현재의 추석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차례예식과 신라의 가윗날 축제가 합쳐져서 전승되어 왔는데, 오늘은 추석의 유래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차를 올리는 예식, 차례
「차(茶)를 올리는 예」를 의미하는 차례(茶禮, 다례)는 불교에서 비롯된 의식으로, 원래 삼국시대부터 사시제(설·단오·추석·중구)에 절에 모신 부처·보살들에게 차를 바치던 예식이었다. 차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경덕왕와 충담스님의 일화이다. 경덕왕은 덕망 높은 스님을 초빙하여 조언을 구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 날 대신들로부터 화랑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스님을 추천받았다. 하지만 충담이 어디에 거처하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덕왕이 남산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월정교 누각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마침 허름한 옷을 걸친 한 스님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범상치 않음을 느낀 경덕왕은 그를 불러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가 충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충담은 매년 삼짇날(3월 3일)과 중양절(9월 9일)에는 남산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였는데, 마침 경덕왕과 마주친 때가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고 하산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현재도 경주에서는 봄·가을에 충담재를 개최하고, 남산 삼화령을 찾아 차공양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공양(供養)은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삼보(三寶, 3가지 보물)인 불법승에 정성을 담아 공양물을 올리는 의식으로, 이는 자기 마음 속에 숨겨진 부처의 성품을 기르는 공부법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불법승(佛法僧)은 부처(佛寶), 부처의 가르침(法寶), 부처의 제자(僧寶, 스님)를 의미하는데, 국내 대표적인 삼보사찰로는 양산 통도사(불보사찰),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순천 송광사(승보사찰)이 있다. 육법공양에 해당하든 6가지 공양물(향·등/초·꽃·과일·차·쌀)은 각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중 감로다(甘露茶, 차)는 부처의 법문이 만족스럽고 청량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고려시대에는 새며느리를 맞으면,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집안어른들이 참석한 가운데 며느리가 절을 올렸다. 이 때 며느리는 직접 달인 차를 조상들께 올렸고, 절이 끝나면 가족들이 모여 앉아 며느리가 달인 차를 나눠 마시면서 차의 빛깔·맛·향기를 통해 며느리의 사람됨을 평가했다고 한다. 이는 제사가 끝난 후 제사음식을 나눠 먹는 음복(飮福)과 유사하다.
남송대 유학자 주희(주자)가 집필한 「가례」에는 정지삭망참(正至朔望參)이라 하여 정월초하루, 동지, 매월 초하루·보름에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참배한다고 나와있다. 이 때 주인은 술, 주부(또는 맏며느리·맏딸)는 차를 올렸는데, 다만 매월 보름에는 술 대신 차만 올리는 간략한 제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차만 올리는 간단한 제례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차례가 유래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도 조선전기까지는 중국처럼 차를 제사상에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왜란·호란을 연거푸 겪으면서 차 도자기를 만들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고, 차가 귀하고 비싼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으면서 차 대신에 술·숭늉(뜨거운 물)을 차례상에 사용한 것으로 본다.
신라에서 유래한 8월 축제, 가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3대 유리이사금(재위 24~57년)시대 왕경(현 경주) 6부 여인들을 2팀으로 나누어, 음력 7월15일(백중)부터 8월15일(가윗날)까지 1달간 베짜기(길쌈)를 경쟁시킨 뒤 생산량에 따라 승패를 가렸다. 패자는 승자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슬피울며 노래를 부른 행사를 가윗날 축제라고 했다. 당시 6부(탁부·본피부·한기부·사탁부·잠탁부·사피부)는 행정구역을 넘어 신라를 건국한 정치적 지배세력들을 의미하였기에, 가윗날 축제는 신라가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부족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시행되었다. 지배층들이 참가한 행사인 만큼, 왠지 김쌈에서 졌다고 슬피 울었다는 것은 다소 은유적 표현으로 느껴진다. 아마 행사참여자들이 승패를 떠나 뒷풀이를 하면서 1달 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어울려 놀았는데, 이 뒷풀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세력 간의 대결을 오늘날의 스포츠처럼 가상전쟁 형식으로 치른 것인 만큼, 치열한 경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주체가 여성들인 것이 의아한데, 아마도 애초에는 밤·달을 상징하는 여성들이 쉬고 즐기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한해 중에 가장 큰 달이는 보이는 날이 음력 8월 15일인데, 한(瀚, 크다)과 가배에서 유래된 가우(嘉優)가 변한 가위를 합쳐져 한가위라고 하였다. 「크게 즐기며 노는 날」을 의미하는 한가위는 마침 하늘이 높고 야외활동하기에도 쾌적하여 왕실에서는 제사를 지냈고, 백성들도 이를 따라하여 묘제(성묘)를 갔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추석에 산소를 찾는 풍속은 신라의 경쟁국이었던 가락국에도 있었는데, 초대 수로왕의 묘제를 연 4차례(정월 3일·7일, 5월 5일, 8월 15일) 지낸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추석(秋夕)은 오경(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춘조월추석월(春朝月秋夕月)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예기가 삼국시대에 전해졌다는 점과 옥보고(신라 음악가)가 지은 노래명 「추석곡」으로 미뤄보아, 신라시대에 추석이라는 단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8월 보름에 행해지는 의례는 신라 외의 다른 나라에는 없는 풍습이었다고 한다. 839년 6월부터 8개월간 일본의 구법승 엔닌이 산둥반도의 적산 법화원에 머무르면서 저술한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신라유민들의 추석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그가 목격한 추석음식인 박돈·병식이 표기되어 있는데, 박돈(餺飩)은 대체적으로 국수·수제비로 보지만, 음식명으로 봐서는 신라의 떡 송편으로 보기도 한다. 얇게 편 밀가루피를 의미하는 박(餺)과 소를 얇은 피로 감싸서 만든 음식인 돈(飩)이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병식(餅食)은 쌀·조·보리 등의 가루를 반죽하여 찌거나 구운 과자류인데, 중국에서는 8월 15일 중추절에 먹는 보름달 모양의 과자를 월병(月餠)이라고 한다. 중국 중추절의 역사는 추석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데, 명절로써 중추절이 널리 퍼진 시기는 12세기 남송시대이며, 이 때 월병도 중추절 음식이 된 것으로 본다.
신라의 떡, 송편
보름달이 뜬 추석에 먹는 송편은 왜 반달모양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 연유가 적혀있다. 의자왕(백제 마지막왕) 말년인 660년 음력 6월의 일이다. 귀신이 왕궁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친 후 땅으로 사라졌는데, 그 땅 속을 파보니 거북이 한마리가 나왔다. 거북이등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당시 한 점술가는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차 기울어진다는 것이며,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점차 가득 차게 된다는 뜻"이라고 부정적인 해석을 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얼마 후 죽은 점술가의 해석대로 신라가 백제는 망하게 한 후,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신라가 초승달로 비유되었었다는 내용이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신라사람들은 신라의 번성을 바라며 반달모양으로 떡을 빚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같은 이야기인데, 신라가 통일되기 전에는 반달모양의 떡을 전혀 먹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송편이 추석음식으로 자리잡은 시기는 19세기 전후로 생각보다는 역사가 길지는 않다. 1816년(순조 16) 정학유(정약용 차남)는 「농가월령가」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농가에서 매달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적어 놓았다. 이 농서의 8월령에 오려송편을 추석에 먹는다는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올벼의 옛말인 오려는 제철보다 일찍 익은 햅쌀로, 오려송편은 햅쌀로 만든 송편이다. 송편은 원래 추석에만 먹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1670년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는 송편을 만드는 레시피가 나오는데, 현재처럼 떡 속에 콩가루 소를 넣고 솔잎으로 쪘다고 한다. 경기도 구리지역에서는 송편을 나이떡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이삭을 단 장대를 대문간에 세웠다가 중화절(음력 2월 1일)에 그 이삭으로 송편을 빚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송편을 머슴에게 나이 수만큼 나눠주고 하루 휴일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이는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머슴에게 사기를 불어넣는 차원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외면받던, 추석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아래와 같이 총 8번의 시험을 치러, 최종합격자 33명을 선발한다.
소과 : 초시·복시
대과초시 : 초장·중장·종장
대과시 : 초장·중장·종장
이후 33명은 국왕 앞에서 마지막 논술시험 진시를 치르는데, 진시에서 임금이 당시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출제한 문제를 책문(策問)이라고 한다. 책문에 대해 최종합격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작성한 답안을 대책이라고 한다. 진시가 중요했던 이유는 진시의 결과에 따라 최종합격자들의 등수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중기 이이가 치른 책문에 명절·속절의 구분에 관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이의 「절서책」에서는 중국성인의 고제(古制)에 맞지 않는 명절을 속절(俗節)로 보아야 하며, 솔절에 해당하는 사명일(설·한식·단오·추석)은 가례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주자가례에서 추구하는 사시제(四時祭)와는 달리, 사명일(四名日)은 가례에 근거가 없음에 따라 묘제(성묘)를 지양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참고로 사시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이고, 기일제(기제)는 사당에 있는 신주에 대한 제사이며, 묘제는 묘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하지만 이미 관습화된 사명일의 묘제관행을 폐지하기는 어려웠고, 그 대안으로 사명일을 사시제에 준하게 재평가한 것이 사시사명일이다. 사시사명일은 조선후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송시열도 "사명일을 절일로 부르기 때문에 묘에 가서 참배하는 예가 있다"고 평가했다. 19세기 전후로 사시사명일의 묘제는 한식(봄)·추석(가을)로 양분되었고, 특히 수확을 앞둔 추석은 농경의례로서 그 의의가 더 커져갔다. 설·단오는 묘제가 쉽지 않았는데, 낮이 짧은 설에는 궁궐에서 열리는 정조하례에 참가해야 했고, 단오에는 날이 더워서 제사음식이 쉽게 부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례적 명절로 남게 된 한식에 비해, 추석은 묘제와 농경의례적 가치를 동시에 가진 대명절로 도약한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기용할 의향을 비추자, 당시 최고의 재상 안영이 이를 반대했다. 이는 유가(儒家)는 번잡하게 장례·제사의 절차나 따지면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면, 안영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예상되는데, 그 만큼 현대사회에서 제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많아지고 있다. 주자가 「가례」를 통해 장례·제사에 대한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기술한 이유도 이미 극도로 복잡하고 사치스러워진 송나라의 장례·제사의 절차를 간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례에서 중요한 부분은 절차가 아닌 마음자세라는 의미였다. 죽은 조상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나를 위하여 실제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친족들이 모여서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에게는 바른 삶을 영위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 언급한 각성과 유사한데, 결국 자신을 알고 수련하며 잘 대해주는 것이 현생을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에게 강력한 지침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율곡 이이는 입문한 유학도를 위해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제례는 주자가례를 따르라고 하면서, 추석차례는 가을시제로 사당에서 간략하게 치르면되고, 인절미를 시식으로 올리라고 적어놓았다. 이이는 마음자세를 중시하는 주자의 생각을 이어 받아서 다음의 의미를 가진 신종추원(愼終追遠)을 강조했으며, 조선에 맞는 간소한 예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장례는 조심스럽게 하고,
제사는 조상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따르라"
추석 체급을 키워준, 일본
1935년 「의례준칙」을 제정한 조선총독부는 제례를 통폐합하였는데, 기제·묘제 이외에는 설날·추석에만 간소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정하고, 다른 제례는 모두 없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간소화된 차례절차도 그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1938년부터는 일제의 총동원령으로 제기들을 공출해가기 시작하면서, 기제사도 치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사극드라마 「연인」에서는 병자호란 전쟁통에 오랑캐가 놋그릇 제기들을 모조리 뺏어가는 바람에, 조선양반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못 지낸다는 설정이 나온다. 금속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금속제 제기가 귀금속과 견줄만한 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금속의 부족으로 왕실에서 흙으로 빚은 도자제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양반·서민들까지도 도자제기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1943년 자원통제 일환으로 일제는 추석에 떡을 만들지 말고, 새옷도 입지 말라는 발표를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압박에도 숨어서 지내던 제사·차례는 그 소중함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중함이 해방 이후에는 허례허식이 키운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날 설날·추석에 민족대명절이라는 타이틀은 안겨 준 것은 일본일지도 모른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한 정부는 제례의 간소화와 비용축소를 하고자 하였다. 기제사는 2대(조부·부)까지만 하도록 하고, 차례는 신정 아침에 떡국으로 밥을 대신할 수 있게 한 연시제와 추석은 송편으로 지내는 절사로 통일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가 1960년대 제사의 주체가 되었지만, 이들은 제사방식을 구체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가정의례를 간소화·표준화하고자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이후의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잘못된 정보들이 혼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사상과 관련하여 흔히들 알고 있는 홍동백서·조율이시는 왠지 왜색이 강하게 느껴지는 문구이다. 홍동백서(紅東白西)는 붉은 과일은 동쪽(오른쪽), 흰 과일은 서쪽(왼쪽)에 놓는다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홍백문화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홍백문화는 1180년( 헤이안시대 말기)에 벌어졌던 내전인 겐페이전쟁에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헤이시(平氏)의 붉은 군기와 지방세력 겐지(源氏)의 하얀 군기를 상징한다. 결국 1185년 겐지가 승리하면서, 이후 600년 이상 이어지는 무가정치(막부)의 시초가 되는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게 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홍백문화로는 연말가요프로인 홍백가합전과 당구게임 중의 하나인 겐페이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정부는 왜색을 제거하고 반공사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좌청룡·우백호의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홍백'을 '청백'으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밤·배·감(곶감)의 순서로 놓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조선초기에는 대추를 맨 마지막에 놓았다. 세종시대 조정이 만든 「세종오례의」에는 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과줄·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놓여진다고 되어있다.
40대 중반이 어릴 적부터 각인되어 온 추석날 이미지는 1~2주 전에 벌초를 가고, 차례상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장을 보며, 아침차례에는 친척들이 분주하게 시간을 맞춰서 모여들고, 예를 갖춰 차례를 지낸 후에는 차린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런 풍경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는데, 이는 차례는 물론 기제사까지 간소화하거나 없애는 집안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세태를 반영하여 명절제례를 더욱 간소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이 사그러진 현대의 법령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조항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로 차례는 명절 아침에 맏손자 가정에서 지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법령이 현실을 쫒아오지 못하는 모양이 진화적 불일치(Evolutionary Mismatch)와 유사하게 느껴지는데, 진화적 불일치는 몸의 진화속도가 문화·기술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제례에서 중요한 것은 법제·형식이 아닌 정성·마음이라는 것은 다시 한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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