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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막내를 왕위에 올린 막내, 이하응

by Spacewizard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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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점심식사는 회사마다 각기 특색이 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대기업의 식사문화는 각자의 식사값(외부 내지 구내식당)을 계산한 후,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여기저기 산책을 많이 했던거 같다. 이는 아무래도 돈의 평등에서 나오는 문화로 보였으며, 팀원(팀장 포함)이 아닌 다른 부서직원들과 주로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다른 영업회사에서의 식사문화는 달랐다. 주로 상사들이 식사값은 물론 커피값까지 계산함으로써 점심시간의 주도권을 상사들이 가지고 있었다.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식사 후 산책을 하기보다는 주로 커피숍에서 다같이 대화를 이어간다. 어떤 점심문화가 더 괜찮은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주어진 상황에 맞춰가는게 직장인의 자세가 아닐까. 몇년 전 을지로입구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점심 후 산책을 많이 다녔었는데, 즐거웠던 기억들이 몇 개 있다. 합이 맞는 선배와 함께 인근 빌딩 로비에 비치된 소파에서 쉬다가 오거나, 더 멀게는 정동근린공원·광화문·운현궁 등지까지도 걷고는 했다. 확실히 점심시간에 운현궁을 둘러보고 오면, 왠지 현실과 동떨어진 전통적인 느낌과 과거 흥선대원군의 권위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오늘은 문득 생각난 흥선군대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혼란기 종친의 모범상, 흥선군 일가

인평대군(인조 3남) 곤손이었던 이채중은 1815년 12월 은신군(사도세자 서자)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남연군으로 봉해지고, 종친(왕족)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4대손까지를 왕족(종친·종실·종반)이라 하였다. 남연군은 인현왕후(숙종 비)의 백부인 민정중의 현손 민경혁의 딸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흥녕군(이창응), 흥완군(이정응), 흥인군(이최응) 그리고 막내 흥선군(이하응)이었다. 참고로 아랫대 직계후손을 칭할 때 사용하는 호칭은 다음과 같다.

1대손 : (子)
2대손 : (孫)
3대손 : 증손(曾孫)
4대손 : 현손(玄孫). 검고 먼 하늘처럼 하도 멀기에 가물가물한 후손
5대손 : 내손(來孫). 멀어졌다가 돌아온 후손
6대손 : 곤손(昆孫). 뒤(멀리) 있는 후손
7대손 : 잉손(仍孫). 누차 거듭된 후손
8대손 : 운손(雲孫). 구름처럼 아득한 후손
9대손 : 이손(耳孫). 귀로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시간적 차이가 너무 큰 후손

10대손 이하 : 촌수의 숫자로 호칭

1820년(순조 20)에 태어난 이하응은 머리가 비상하여, 아버지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교육을 받았다. 1834년 15세에 정3품 당하관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24세에 종2품 흥선군 승진을 거쳐, 1846년 27세의 나이에 정1품에 올랐다. 이듬해 1847년 당상관 가운데 종친부를 실제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이 되었고, 종친으로서 매우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 사실 조선시대 종친들은 권력기관으로 진출은 어려웠다. 이하응도 3품 이상의 고위직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종친명단을 정리하거나 왕실장례를 관리하는 정도였다. 1852년(철종 3) 홍문관 부교리 김영수는 "종친들이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볻받도록 하소서"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외척이 왕족을 극히 경계하던 시기인 만큼 흥선군의 부자·형제들이 세상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나 싶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 정약용은 자신이 처한 정치적 처지를 고려하여, 항상 머뭇거리고 살피라는 의미의 여유(與猶)를 당호로 삼았다과 언급했었는데,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간에 퍼진 소문, 운현궁의 왕기

 

흔하게 회자되는 말이 있으니, 몰락한 종친 이하응은 세간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상갓집 개'로 불리며 불량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묘사된 이하응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미지이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는 왕족으로 태어난 이하응이 시련을 겪다가 결국은 실권자가 된다는 영웅적인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 소설은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을 초라하게 묘사하면서, 무려 17차례나 이하응을 '상갓집 개'로 표현했다. 작가는 드라마틱한 반전을 노린 의도였을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독자들에게 이하응의 초라하고 핍박받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이하응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철종시대부터 운현궁에 왕기가 떠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관상감에서 성인이 나실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민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상을 담당하던 관청을 서운관이라 하였고, 경복궁 내에 청사와 관천대를 갖춘 본감이 있었다. 세종시대 북부 광화방(현 현대건설 부근)에도 서운관 별감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 별감 앞 고개를 서운관을 따서 운현(구름재)이라 하였다. 이후 세조시대 들어 관상감으로 관청명을 변경하였다. 훗날 흥선대원군의 집은 인근 고개인 운현을 따서 운현궁이라고 하였다. 황현이 기록했던 관상감은 당시 흥선군의 집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렇게 공공연히 대권으로 거론되는 인물을 아무리 세도가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철종이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철종의 6촌인 흥선군은 궁·관가의 관심이 자신의 가문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이에 '시선 돌리기' 전략으로 일부러 파격적인 행동을 하고 다녔을 수도 있다.

 

당시 차기왕권에 대한 관심이 왜 이하응의 집안으로 몰렸는지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해보자. 영조가 죽은 후부터 조선이 문을 닫을 때까지, 조선왕권은 사도세자의 후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정작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후손이 승승장구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사도세자는 5명의 아들(의소세자·정조·은언군·은신군·은전군)을 두었는데, 적장자 의소세자는 3살에 요절했다. 이후 왕위는 정조(사도세자 2남)를 거쳐 순조(손)·헌종(현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헌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은언군(사도세자 서1자) 혈통에서 철종(증손)이 왕위를 이었다. 철종도 후사없이 사망하자, 은신군(사도세자 서2자) 혈통에서 고종(현손)과 순종(내손)이 나왔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채중(이하응 부)은 1815년 12월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남연군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종친(왕족)에 편입되었다. 왕이 후손없이 승하하는 케이스가 연거푸 발생하면서, 입양으로 왕가에 편입된 이하응 가문이 왕이 될 기회를 가진 것이다.

사도세자 후손 6명의 왕
사도세자 후손, 6명의 왕


상왕으로 올라선, 흥선대원군

 

1849년 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원왕후(순조 비)였다. 안동김씨인 순원왕후가 헌종·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는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1858년(철종 8)에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은 신정왕후(헌종 모)가 되었다. 풍양조씨인 신정왕후는 시어머니가 뿌려 놓은 안동김씨 세력을 뒤엎고 싶었을 것이다. 신정왕후는 안동김씨를 견제할 적임자로 유사당상을 맡아왔던 흥선군을 선택했고, 1863년 이재황(흥선군 2남)을 남편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왕통을 승계하게 하였다. 아들이 왕이 되면서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안동김씨측은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건의하였고, 실제 1866년(고종 3)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후 1874년까지는 흥선대원군이 상왕으로서 섭정을 하게된다.

 

흥선대원군은 정조 사후 60년 간의 세도정치가 많은 폐해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안동김씨의 권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영·정조시대의 탕평책을 다시 부활시켰다. 기존 노론(안동김씨 포함)은 물론 북인·남인·소론·서얼까지 능력만 있다면 관직에 등용하여, 당쟁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정책이 종친의 등용이었는데, 1869년(고종 6) 대군·왕자군·왕손을 제외한 종친은 과거시험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실제 종친만을 대상으로 직부전시하는 일이 잦았는데, 직부전시(直赴殿試)는 전시(과거 최종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전 글 <뒤늦게 만들어진 배신 아이콘, 신숙주>에서 조선시대 과거 대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차례 시험으로 이뤄지며, 최종시험인 전시에서 주어진 성적에 따라 임관품계가 갈렸다고 언급했었다. 흥선대원군은 사실상 종친들을 프리패스로 관직에 채워넣은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왕과 그 부모형제 간의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종친불사(宗親不仕)를 시행했는데, 이는 세종이 왕의 8촌 이내 종친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도록 정한 제도다. 왕과 가까운 종친일수록, 왕과의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공정한 법집행을 방해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과연 세종의 통찰력이 맞았던 것인가.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종친들이 고위관직을 독점하면서 조선의 망조가 깊어졌고, 결국 그 종친들은 일본귀족이 되는 길을 택하면서 나라를 등졌다. 

 

막내 이하응의 막내가 왕이 된 배경, 입후

1864년 철종이 죽은 당시, 남연군 가문에는 왕위를 계승할 만한 2명의 아들(응 항렬)과 5명의 손자(재 항렬)가 있었다. 순원왕후는 철종을 왕위에 앉히면서 남편(순조)의 양자로 입후하였고, 이후 신정왕후도 고종을 왕위에 앉히면서 남편(효명세자)의 양자입후하였다. 세도정치기 외척가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효명세자의 다음 세대인 '재' 항렬에서 후보자를 찾게 되면서, 자연스레 '응' 항렬을 가진 흥인군·흥선군은 제외되었다. 여기서부터 현대에는 흔치 않는 입후관계가 왕위 후보자를 좁히게 되는데, 의외로 연장자들이 탈락하게 된다. 이재원(흥완군 자)은 백부 흥녕군의 양자로 입후되었고, 이재면(흥선군 장남)은 흥완군에게 입후되었다. 5명의 '재' 항렬 중에서 연장자들(이재원·이재면)이 입후관계로 인해 국왕 후보에서 제외된 것인데, 이들 입장에서는 마음 속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서자의 신분이었던 이재선(흥선군 서자)는 애초에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가장 나이가 어린 7세의 이재긍(흥인군 아들)과 12세의 이재황(흥선군 2남)이 후보군으로 남았다. 최종적으로 이재황은 발탁되는데, 이재긍은 나이가 어린 점 외에 안동김씨 소생이었다는 점에서 신정왕후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흥선군이 바로 위의 형인 흥인군을 멸시하였는데, 이는 어릴 적부터 흥인군의 탐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흥인군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 이재긍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던 시기에도 흥인군은 철저히 외면당했고, 여러모로 불만을 가진 흥인군은 이후 민비에게 발탁된다.

남연군 가계도
남연군 가계도


정치의 중심지로 떠오른, 운현궁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은 증축공사에 들어갔고, 1864년부터 준공되기 시작했다. 왕이 사는 궁궐이 아닌데도 궁이라 불린 이유는 고종이 유년시절에 거처했던 잠저였기 때문이다. 이전 글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에서 순화궁이 인조의 잠저였다고 언급했었다. 운현궁은 왕궁과 같이 사대문을 갖출 정도로 넓었으나, 현재는 규모도 많이 줄었다. 운현궁에는 (老)자가 들어가는 3개의 건물이 남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남쪽부터 노안당·노락당·이로당이다. 노안당(老安堂)의 당호는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의 논어구절 노지안지(老子安之)에서 유래했는데, 여기서 국가원로인 흥선대원군이 편히 지내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평소 흥선대원군은 노안당에서 주로 거처했으며, 마지막에 임종한 곳이기도 하다. 1872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기 전까지 흥선대원군이 다양한 정책을 논의·결정했던 곳이기도 했다. 운현궁의 중심에 위치한 노락당(老樂堂)은 왕의 친모인 부대부인 민씨가 거처하던 안채로, 여기서 흥선대원군이 나이든 부인이 즐겨운 노년을 보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1866년(고종 3) 고종·민비가 노락당에서 혼례를 올린 이후부터는, 별궁으로 사용되면서 집안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 되었다. 별궁이 된 노락당을 대신하기 위해 1869년 지어진 북쪽의 이로당(二老堂)은 노락당과 연결되어 안채 역할을 하였는데, 이로당에 담긴 2명의 노인은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을 의미한다. 운현궁의 소유권은 대원군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다가, 1993년 서울시가 매입·정비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하응의 운명은 드라마틱한 면이 많다. 태어나기 5년 전에 아버지 남연군이 왕가에 입후되면서 종친가문이 되었고, 위로는 형이 3명이나 있었다. 불우한 젊은 시절을 비상한 머리와 타고난 처세로 극복함으로써, 44살의 나이에 작은 아들을 왕좌에 앉힌 이하응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것임을 분명하다. 물론 아들과의 권력다툼까지 서슴치 않았던 과도한 권력욕과 편협한 정책시각 등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누구나 왕조시대에 그 정도의 정상위치에 있었다면, 이하응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으랴. 민주화되지 않았던 전근대적 정치체제에서는 흔히 말하듯, 부자지간에도 권력을 나누지 않았다. 운현궁 당호에 노(老)자를 적용한 배경에는 이하응 부부의 불우·불안했던 젊은 날에 대한 보상심리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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