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카톨릭·개신교를 통칭, 기독교
신약성서의 예언을 실현한, 예수
구원을 입체화한 장치, 천국
중앙집권적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 개신교
18세기 말 청나라에서 들여 온, 조선의 천주교
당시 피지배층의 믿음을 이끌어 낸, 평등성
박해 과정에서 많았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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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기억으로는 1980년대 동네에 작은 교회들이 많았었다. 한번은 친구를 따라서 병설유치원을 운영하는 동네교회에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왠지 그 곳은 내가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밖으로 뛰쳐나온 적이 있다. 불교를 믿는 어머니와 함께 사찰을 찾을 기회가 간혹 있었기에, 어린 마음에 어머니의 종교가 곧 나의 종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불교신자이셨던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을 위해 기도를 하셨으며, 매달 초하루에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로 원정기도를 다니셨다. 어릴 적부터 불교에 익숙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딱히 믿는 종교도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널리 퍼져있는 만큼 많이 발생하고 있는 목사와 교회들의 사건·사고들은 접하면서, 이제는 기독교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퍼스타, 예수
예수의 일생은 신약성경의 4개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과 교리를 형성하게된 중심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는 기원전(BC, Before Christ) 4~6년경에 요셉(Joseph)과 마리아(Maria)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수의 출생은 성령의 작용으로 일어난 동정잉태(Miraculous Conception)에 따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베들레헴(Bethlehem)에서 태어난 후 작은 마을 나사렛(Nazareth)에서 성장한 예수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 성장하는데, 12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종교학자들과 논쟁하였다고 전해진다.
대략 30세의 나이에 침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에게 물에 잠기는 세례의식인 침례를 받은 후,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갈릴리(Galilee)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12명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선교를 부탁했다. 예수는 신약성서에 나온 예언들을 이루는 기적을 보여줬다. 동정잉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십자가형으로 사망하며 부활했고, 병자를 고치고, 교활한 자를 살리고, 눈먼 자에게 시력을 찾아주었다. 또한 제자들을 이끌며 복음을 전파하면서 메시아(Messiah)의 역할도 했다.
유대교를 계승한 예수는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했다. 하나님의 사랑·자비를 실천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신개념 「천국」을 도입하면서 구원을 입체화·시각화한 점은 뛰어난 마케팅적 요소였다. 인간의 삶과 존엄을 강조하였으며, 스스로가 약자(빈자·병자 등)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였다. 결국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 기득세력과 로마제국 지배층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예수는 유대인의 유월절(Passover)를 기념하기 위해 12명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제자 중의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후 게쎄마니(Gethsemane) 동산에서 기도하며 다가올 고난을 대비하던 예수는 유다(Judah)의 신고로 체포되어, 서기(AD, Anno Domini)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죽은 후 사흘이 지나서 부활한 후에도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가르침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유다는 은화 30개를 대가로 예수를 배신했다고 하는데, 단순히 금전적인 목적이었는지, 의견충돌·실망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수가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후자의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의 미묘한 변화도 당사자들은 쉽게 눈치챌 만큼 확연히 다가오는 때가 많다. 아마도 예수는 제자의 불만 내지는 심경변화를 미리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 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배신>에서는 전근대사회의 배신은 사회적 규범·가치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어, 배신자는 심각한 결과에 처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다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가를 치렀으며,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믿음이 되게 된다.
정치적 분열에 이어진, 기독교의 분열
기독교(Christianity)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를 만한다. 천주교(가톨릭)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기독교로, 정교회와 함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단이다. 가톨릭(Catholic)은 「보편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카타(kata, 전체에 걸쳐)와 홀로스(holos, 전체)가 합쳐진 말이다.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톨릭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전체성·개방성을 강조한다.
313년 밀라노(Milan)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끝났고, 39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국교로 지정된다. 394년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에 의해 395년 로마제국은 2개로 분열되었다. 476년 서로마는 붕괴되었지만, 동로마(훗날 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지속되었다. 로마제국 분열 전까지 기독교신도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였으나, 분열 이후 서로마가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당시 로마·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교구 간의 오랜 갈등이 지속되었고, 여러 신학적 문제에서 차이를 보였다. 결국 1054년 서로 이단을 선언하는 동서대분열(East-West Schism)이 일어나면서, 아래와 같이 교회가 분리되었다.
서방교회 :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
동방교회 : 비잔틴교회(훗날 동방정교회)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세계적인 교회지도자로 인정하며, 교황은 교리·도덕에 관한 무오(無誤)라는 절대권한을 가진다. 또한 성모마리아와 성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며, 그들을 통해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다. 변화가 많았던 서방교회와 구분하기 위해, 동유럽·중동에서 성장한 정교회(Orthodox Church)는 변함없는 정통성을 강조하여 왔다. 「올바른 신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소독스(Orthodox)는 오소(ortho, 올바른)와 독사(doxa, 신념·예배)가 합쳐진 말이다. 동방정교회는 여러 국가의 독립교회들로 구성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등이 있다. 근대 들어 지속적인 교회일치운동을 통해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화해 노력이 이뤄졌다.
개혁으로 불리는 또 한번의 분열, 개신교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늘어난 지식층은 바티칸의 교황세력보다는 개인신앙과 성경권위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개신교(Protestant)는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복음주의(Evangelicalism) 성향의 교파들을 총칭한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Luther)와 장 칼뱅(Calvin)이 당시 교황세력와 가톨릭 성직자들의 타락(특히 사치·출세)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교회의 타락은 국교화로 편입된 지배층들로 인해 4세기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는데, 가톨릭 특유의 전체주의·중앙집권은 타락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초기 개신교는 크게 루터교(루터파)와 개혁교(칼빈파·장로교)가 있었는데, 이후 성경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여러 갈래(루터교·장로교·감리교·참례교·성공교·성결교·오순절교·구세군 등)로 분파되었다.
국내 최초 천주교 신자, 이승훈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나와 혼인하였으니, 정약용의 매형이 된다. 1780년(정조 4) 이승훈은 20대 중반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 대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이벽(정약현 처남)에게서 천주교를 처음 접했고, 1783년(정조 7) 이벽의 권유에 따라 청나라 사신으로 북경에 간 아버지와 동행했다가, 1784년 2월 북경교회 남천주당에서 프랑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이승훈이 귀국하자, 이벽·권일신·정약용은 이벽의 집(현 수표교 근방)에서 이승훈으로부터 가르침·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벽의 집은 포교의 근거지이자 교인의 모임장소가 되었는데, 사실상 최초의 천주교회로 볼 수 있다.
이후 천주교인이 늘어나자, 명례방((明禮坊), 밝은 마을)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현 을지로입구 하나은행본점 자리)가 모임장소가 되었다. 천주교 신자 김범우는 역관·무역을 겸하며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넓은 집을 모임장소로 제공했던 것이다. 김범우 집 인근에는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위치했었는데, 이 터의 지세가 풍수적으로 매우 세고 불길하여 풍악을 울려 기를 누르려는 의도로 임진왜란 이후에 이전했다고 한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는 연산군이 장악원을 연방원으로 개칭한 후 원각사(현 탑골공원)에 두었다는 언급을 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얘기다.
1785년(정조 9) 을사추초적발사건으로 김범우의 집에 모였던 천주교도들이 체포된다. 추조(秋曹)는 형조의 별칭으로, 형벌이 「가을서리처럼 매섭다」하여 붙여졌다. 당시 이승훈, 권일신 형제, 정약용 형제 등은 학행·가문이 출중한 양반이라 풀려났는데, 주범 이승훈은 서학을 「사학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과 「천당을 부정」하는 벽이문(闢異文)을 짓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인 신분으로 밀양으로 유배된 김범우는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국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것이 1898년(고종 35) 김범우 집 부근 종현언덕에 명동성당이 세워지는 연유가 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북달재(내지 북고개)라 불리던 이 곳에 명나라 장군이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는 종을 가져와 달았다고 하여 종현(鐘峴)이라 붙여졌다.
이승훈은 을사추초적발사건 이후에도 배교·회개를 반복했다. 1795년 을묘박해 당시에는 10년 전 벽이문을 부연한 유혹문(喩惑文)을 써서 처형을 면하게 되는데, 「미혹됨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유혹(喩惑)이다. 이듬해 1796년에는 「주자백록동연의」를 써서 천주교와의 완전한 단절의사를 표시하고 유배에서 방면된다. 하지만 문장실력으로 수차례 목숨을 건진 이승훈도 1801년 신유박해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신앙과 배교를 반복해 온 이승훈은 이미 양치기 소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신선했던, 천주교
조선후기 청나라로부터 소개된 천주교(서교)는 당시 차별받던 피지배계층 내지는 여성들이 주로 믿었지만, 지배계층 중에서도 남인시파의 실학자들이 받아들인 경우도 많았다.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지배계층이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성향의 서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서학을 받아들인 남인들 중에서도 학문으로 그치느냐, 종교로 믿느냐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는데, 아마도 조상의 제사를 금지하는 부분에 있어서 거부감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시대에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노론들의 상소가 많았지만, 정조가 대놓고 탄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노론벽파들은 정조 측근인 남인시파를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를 문제삼았다.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발생한 신유박해에서 남인들이 포함된 천주교도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는데, 이때 정약용의 일가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 이전에도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진산사건)와 1795년(정조 19) 을묘박해(실포사건)가 있었다. 1790년 북경 교구장은 북경을 방문한 윤유일을 통해 조선천주교에 대한 제사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1791년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 윤지충는 모친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태운 폐제분주를 행하였다. 또한 천주교 예식으로 치뤄진 장례는 당시 양반종친들의 화를 돋구기에 충분했으며, 이는 당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는 신서파를 비난하면서 천주교를 탄압할 것을 정조에게 주청했다. 전라감사·진산군수는 체포된 윤지충에게 배교를 회유하였으나, 윤지충이 신앙을 굽히지 않으면서 결국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된다.
신해박해 이후 성직자의 필요를 느낀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교회에 성직자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한성에 들어왔다. 1795년 6월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인해 이 사실이 밝혀졌으나, 주문모 신부는 미리 피신하여 무사했다. 의금부는 주문모 신부의 피신을 도운 윤유일 등은 곤장을 맞아 죽었고, 2개월 후에는 이가환(이승훈 삼촌), 이승훈, 정약용이 체포된다. 이를 을묘박해라고 한다. 이때 승지 정약용은 종7품 금정(현 충남 청양) 찰방으로 7품계 좌천된다. 당시 정약용은 정조의 배려로 잠시 소나기를 피할 수 있었지만, 정약용과 그의 가족들은 정약용의 정적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까지 약 7년 동안 숨어서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신유박해 때 자수하면서 새남터에 효수되었다. 억새와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새나무터에서 유래된 새남터(노들, 사남기)는 한강북변의 모래사장으로 조선시대 연무장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활용되었다. 1468년 역모로 몰린 남이 장군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주문모 신부가 처형당한 이후로는 천주교 사제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반면 서소문 밖 네거리(현 서소문역사공원)는 평신도들이 주로 처형되었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들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역시 죽음을 대하는 자세이다.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자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길목에서 만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웃으면서 혜어졌다고 한다.
"내일 천국에서 만나세"
죽음 뒤에 있을 천당에 대한 강한 믿음이 현세미련·내세불안을 없애줬을 것이다.
천주교를 살리기 위한 내부고발자, 황사영
남인시파의 가문에서 태어난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에 정약현(정약용 이복맏형)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가를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문제는 천주교가 조선을 구원해 줄 새로운 사상임을 확신하고 심취한 것이다. 결혼한 해에 진사시를 소년급제한 황사영은 출세의 덧없음을 느껴 구원학문의 교리연구에 매진하며 천주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1801년(순조 1) 일어난 신유박해에서 황사영은 무고한 신도들과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이러한 박해사실을 외국에 알릴 각오를 한다. 황사영은 제천에 위치한 교우촌(성지) 배론으로 내려가서 토굴 속에서 흰비단에 박해사실과 그 대책에 관한 글을 적었으나, 이 백서를 배달하는 과정에서 체포된다.
배론은 지형이 배의 밑바닥과 같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1856년(철종 7) 프랑스인 신부가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를 건립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폐쇄되었다. 조정은 황사영의 백서(帛書, 비단·명주에 쓴 서한)을 보고 경악하게 되는데,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사 5-6만명을 보내 조선에 급파해 무력으로 개교를 시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황사영은 대역죄로 처형된다. 백서원본은 의금부의 문서궤에 저장되었으나, 관리들이 필사한 사본을 통해 백서내용은 세상에 알려진다.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오래된 행정문서는 파기되었으나, 백서원본은 파기 직전에 개화관료 이건영에 의해 입수되어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해졌다. 1925년 로마에서 열린 조선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석한 뮈텔은 교황청에 백서원본을 전달했다.
정약용의 인간적인 선택, 생존
대부분의 위인전에서는 정약용을 다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실제로 유학자와 관리, 실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에서 많은 천재적인 면모를 찾게된다. 하지만 일부 기록을 따르면, 정약용도 살벌한 당쟁과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는 정조의 죽음이 불러올 권력의 변화를 예감하고 처신에 각별히 조심하겠다는 각오를 「여유당」으로 표현했다고 언급했다. 정약용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노론세력의 선동·계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것도 사실로 보인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고향에서 압송된 정약용의 심문기록을 살펴보면, 정약용은 정약전(형)·오석충(친구)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동지들을 강하게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사영(조카사위)·이승훈(매형)·정약종(형)까지도 포함되었다. 심문과정에서 협조적이었던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배교의지를 인정받아 각각 전라도 신지도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된다. 하지만 정약종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아 가족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천주교회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이벽·황사영을 처남·사위로 둔 정약현은 애초부터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한성으로 재소환된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정순왕후의 배려로 각각 전라도 흑산도와 전라도 강진현으로 다시 유배된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는 단종복위 모의가 발각되었을 때 성삼문이 가장 먼저 압송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고문을 당하면, 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게 마련이다. 성삼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을 포함한 모의가담자의 이름을 실토했으나, 이미 죽을 각오를 하였기에 비굴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박팽년 또한 모의사실을 부인한다면 살려주겠다고 세조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반면에 모의세력 중에서 막판에 배신한 김질은 세조의 공신이 되어 호의호식했다. 사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정약용이나 김질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크다. 왕권의 정통성 내지 신앙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라는 것이 평상시에는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에서는 그 신념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유다의 배신에 따른 예수의 처형과 정약용의 배신에 따른 수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의 차이가 무엇일까. 배신하는 주체의 상황도 다양하겠지만, 배신당한 객체가 느끼는 분노감에서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한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예수는 유다를 용서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배교자 정약용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과 신도들은 아마도 사적인 배신감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인간 정약용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 같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천주교도를 택한 정치세력 노론벽파가 문제였지, 잘 나가던 정치인이자 자유롭게 서학을 탐구하던 나 또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희생양이라고. 어느 시절이든 정치인들의 레토릭(rhetoric)은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핍박받던 조선 천주교는 1886년(고종 23)에 와서야 프랑스와의 수교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20세기의 한국사에서는 종교적 구심점으로 기능하였다.
[Music] 구원의 전파
https://www.youtube.com/watch?v=voLO97bfg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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