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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투자

맨션과 함께 화려했던, 빌라

by Spacewizard 202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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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학년까지 나름 잘 정비된 주거지역 내의 2층 양옥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 그랬는지 불편함보다는 좋은 추억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가끔 어머니와 지난 추억에 관한 대화를 나눌때면, 어머니는 그 시절의 불편했던 기억들을 말씀하시곤 한다. 현관외부 화장실, 외부도 내부도 아닌 중간영역의 부엌, 연탄보일러, 열악한 단열, 항상 노출된 도둑침입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냉기로 가득찬 실내의 겨울추위가 가장 싫었다고 한다. 시골 외가집의 '불란서 주택'을 신축하면서 한옥별채를 한 채 남겨두었는데, 그 한옥별채에서 나무땔감으로 군불을 지필때면 도저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방바닥은 뜨거웠고, 실내 전반도 따뜻했었다. 그런 면에서 1970~1980년대 전국에 보급된 양옥은 외관만 그럴싸했지, 주거만족도는 낮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맨션아파트를 방문한 후에 든 생각이 기억난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집도 있구나"

 

당시 마산에는 양덕동 타워맨션, 산호동 용마맨션을 비롯한 고급 맨션아파트들이 공급되어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친구생일파티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던 타워맨션은 업타운(uptown) 느낌이 가득했다. 처음보는 가전·가구와 함께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친척이 거주하던 용마맨션에 놀러갈 때면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에 삼남매가 어머니에게 애처러운 눈빛을 한없이 보냈던 기억이 난다. 마치 부모가 된 지금 우리 남매아이들이 사촌들과 헤어질 때가 다가오면 눈시울이 적는 그런 느낌이었겠지. 국내에서 아파트시장이 처음 열리던 시절에는 주로 고급아파트 이름에 맨션·빌라를 붙였지만, 오늘날에는 아파트가 아닌 공동주택(다세대주택, 연립주택)과 다가구주택 등의 저가주택에 맨션·빌라가 많이 따라 붙는다. 대신 고급아파트는 대형시공사가 직접 네이밍한 명칭이 대신하고 있다. 오늘은 빌라와 맨션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도시 밖의 집, 빌라

 

고대로마에서 도시 밖에 위치한 주택을 빌라(villa)라고 불렀는데, 그 초기형태인 빌라루스티카(Villa Rustica)는 로마공화정시대에 등장하게 된다. 이전 글 <영원한 제국을 꿈꾸는 형제들,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로마를 3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고, 왕정시대를 뒤어어 공화정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왕정시대의 권력독점을 막고자 탄생한 공화정은 정치·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군사제도를 개편하게 되고,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로마의 장군·귀족들은 정복을 통한 전리품으로는 영토와 함께 노예를 얻게 된다. 공화정 출범 후 46년이 지난 BC 445년 통과된 「카놀레이우스법」은 평민과 귀족 간의 통혼을 가능케하였고, 이는 귀족수를 늘렸고 더 많은 전리품을 필요로 했다. 늘어난 귀족·노예, 그리고 엄청난 영토의 국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비해 많은 식량이 요구되었다. 이에 귀족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라티푼티움(Latifundium, 대농장)을 조성하고, 라티푼티움 내에 관리자를 위한 관사나 노예숙소 용도의 집을 지었다. '시골의'를 의미하는 라틴어 루스티쿠스(rusticus)의 여성형이 루스티카(rustica)인데, 이 소박한 농촌주택을 빌라루스티카(내지 빌라)로 불렀던 것이다. 참고로 '도시의'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바누스(urbanus)의 여성형이 우르바나(urbana)이다.

 

라티푼티움으로 조달되는 노예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는데, 이는 로마 밖에서 끌어온 노예 외에도 로마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복전쟁 초기 로마군은 군역의무를 지닌 시민·자영농들로 구성되었고, 무기도 직접 조달해야 했었다. 전쟁기간 동안 방치된 자영농의 농장은 황폐화되었고, 전쟁에서 복귀한 자영농을 황무지를 개간할 자금을 귀족에게서 고리로 빌렸다. 돈을 제때 갚지 못한 자영농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하였다. 라티푼티움으로 유입되는 노예들이 늘면서 빌라루스티카의 수도 많아지면서 빌리지(village,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빌리지는 복수의 빌라에서 생겨났다.

 

BC 2세기경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왕과 귀족들은 로마시내 밖에 휴양·과시를 목적으로 한 고급별장을 늘리기 시작했다. 빌라우르바나(Villa Urbana)로 불렸던 이 고급별장은 대체로 해안가·구릉지대 근처의 열기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로마 내에 위치한 귀족 소유의 대저택은 도무스(Domus)로 불렸지만, 로마 밖에 지어진 별장은 빌라로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같은 빌라라도 빌라루스티카와 차별화를 위해 빌라우르바나로 불렀다. 크고 견고하게 지어진 빌라우르바나는 그 유적들이 다소 남아 있는데 반해, 소박한 농촌주택이었던 빌라루스티카는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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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의미가 다른 일본의, 아파트

 

일본의 주택유형은 단독주택, 아파트, 그리고 맨션 3가지로 크게 구분된다. 2~3층 규모의 단독주택이 가장 흔한 주거형태으로, 보통 마당에 정원 내지 주차장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아파트는 한국의 아파트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아파트는 경량철골조의 2층 이하 공동주택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목조의 2층 건물만 가리키기도 한다. 공용현관과 발코니가 없는 것이 특징으로, 일본미디어를 보면 개별가구의 현관문이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형태의 공동주택을 많이 볼 수 있다. 국내에서 비교 가능한 건물로는 건설현장 내에 임시로 설치한 2층 규모 컨테이너박스 가건물과도 흡사하다. 일본의 주택명에 '코포·하이츠'가 포함되었다면, 아파트라고 보면 된다. 주로 코포는 목조나 경량철골조로 된 2층 공동주택을 말하며, 하이츠는 조립식으로 된 경량철골조의 2층 공동주택을 말한다. 언뜻 보기에도 구분등기가 어려워보이며, 한국의 다가구주택처럼 건물주가 임대주택으로 운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격이 저렴하여 일본서민들이 많이 거주하지만, 방음·단열·보안·지진에 취약한 편이다.

물론 한국의 아파트와 외형적으로 매우 흡사한 주거형태도 간혹 보이는데, 이는 일본정부가 직접 매입·관리하는 임대아파트 UR단지이다. 일본 도시재생기구(Urban Renaissance Agency, UR)은 공공주택임대사업을 목적으로 하여 1955년 설립된 일본주택공단의 후신이다. 일본 내에서 같은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으로는 1923년 동윤회, 1941년 주택영단이 있다. 일본주택공단은 1960~70년대 고도성장기 동안 뉴타운 내에 임대아파트 단지들을 공급하며 주택난을 해소했었다. 일본의 신도시 개발기법 중에 하나가 뉴타운 부지 가운데 대규모 UR공단을 세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상권·마을이 형성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현재는 버블붕괴·인구감소·고령화로 인해 신규공급보다는 개보수에 치중하고 있으며, 이는 1981년부터 개칭된 법인명에 정비·재생이 포함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중심지에 위치했던, 맨션

 

중세유럽에서는 기사 1명이 소유한 넓은 토지를 장원(manor)이라 불렀고, 이 장원을 중심으로 귀족(영주)과 평민(농부) 간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장원 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는 성벽을 높게 쌓은 장원청(manor house, 매너하우스)이 있었는데, 여기서 영주가 거주했다.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대저택을 의미하는 맨션(mansion)은 매너하우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영미권에서 '호화로운 단독주택'을 지칭했던 맨션은 일본으로 건너와 그 의미가 변형되었는데, 공동주택에 '호화로움'의 이미지를 덧입히기 위한 마케팅 목적으로 사용되면서 '호화로운 공동주택'의 의미가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맨션이 아파트보다 더 고급스러운 공동주택을 가리키는데, 일본에서는 맨션을 변형시킨 맨숀(manshon)이라는 명사까지 생겨났다.


일본에서는 한국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을 맨션이라 부르는데, 아파트와 맨션을 법적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철근콘크리트조·철골철근콘크리트조·중량철골조로 지어진 3층 이상의 공동주택을 지칭하는 맨션은 아파트보다 규모가 크고 튼튼한 구조의 공동주택이다. 한국아파트와의 차이점은 단지형이 아닌 주로 단일건물이라는 것인데, 이는 이미 일본의 대도시는 대지확보의 난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또한 높이규제가 심하여 주로 매립지에 높은 맨션들이 많이 들어섰다. 아파트와 달리 공용현관·발코니·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고, 1층에 높은 층고의 고급로비와 상업시설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타워형의 고층맨션은 우수한 설계(서비스면적·방음·단열·내진), 설비와 건물관리시스템(유지·보수·보안 등)를 갖추고 있어서 매매가격과 관리비가 매우 높다. 또 하나 맨션에 거주하더라도 차량·자전거 주차서비스에 대해 별도요금을 지급해야 한다.

 

공동주택의 기원, 인술라

 

로마제정 당시 정복전쟁 등을 통해 도시가 성장하고 인구가 급증하자, 도시 내의 고급단독주택인 도무스들은 공동주택으로 재개발되었다. 공동주택의 기원으로 알려진 인술라는 4~5층 규모의 콘크리트조 임대주택으로, 1층에는 상가가 배치되어 오늘날의 상가주택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정형으로 지어진 폐쇄적인 내부구조가 마치 섬처럼 보여서, 섬을 의미하는 라틴어 인술라(insula)가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아파트단지는 인근의 도시요소와 비교하면 하나의 독립되고 폐쇄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도시 내의 섬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인술라는 주로 중하층민이 거주하는 주택이었는데, 층에 따라 계층이 구분되었다고 한다. 주로 2층에 중산층이 거주했고, 층수가 올라갈수록 빈민층들이 살았다. 로마제정 초기에 이미 로마시내의 인술라 비중이 도무스의 10배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공동주택으로 가득 채워진 고대로마의 광경이 선뜻 믿기지 않는다. 인술라의 소유자들은 임대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고 8~10층까지 증축을 했는데, 2000여년 전의 로마의 건축술이 우수했다고는 하나 붕괴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패·부실을 기술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정층수 이상부터는 콘크리트가 아닌 목재를 사용하였을 것이며, 기본적인 주거설비(화장실·주방·난방시설·수도 등)도 누락시켰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AD 64년 인술라 밀집지역에서 발생한 화재는 6일 동안 지속된 로마대화재(Great Fire of Rome)로 이어졌다. 이후 네로황제는 인술라의 층수(6층 이하)와 이격거리를 규제했다고 한다.

고대로마 인술라 재현도 [출처:위키피디아]

 

부유층을 위한 공동주택의 시초, 한강맨션

 

국내 최초로 선분양·모델하우스(견본주택)를 선보였던 공동주택은 1969년 주공이 분양한 이촌동 한강맨션이었다. 공사가 완료된 1층에 평형별로 한 가구씩 아파트 내부를 공개하는 방식의 견본주택이였다. 당시는 마이너스 옵션인 골조분양방식이 주류였는데, 입주자가 본인의 취향에 맞게 마감(도색·벽지·전등 등)을 진행했다. 1969년 7월 분양을 시작한 한강맨션은 중앙공급식 온수난방시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분양률이 초기 60~70%에 불과했으나, 주공직원의 내부할당 끝에 1970년 3월 분양이 완료되었다. 이후 유명연예인(강부자·패티김 등) 입주와 생활편의성이 알려지면서 한강맨션의 인기는 급등하였는데, 1970년 9월 준공 이후 27평형의 매매가격이 450만원(분양가 335만원 대비 약 +34%)까지 상승했다. 한강맨션의 가격상승에 힘입어, 1971년 4월 주공이 분양한 한강민영아파트 748세대는 좋은 동호수를 선점하기 위해 전날부터 수백명이 몰렸고, 1971년 10월 서울시가 완공한 여의도시범아파트 1,584세대는 2개월도 채 안되어 완판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도시미화·주택공급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특히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남대문 일대부터 재건했다. 1958년 1월 7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수도 서울의) 중심부 주요 가로에는 4층 이상의 건물을 짓되 1층은 점포로 하고 2층부터는 주택으로 사용하면 토지이용효율도 높아지고, 외국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에 서울시내 간선도로변에 4~5층 규모의 상가주택 건설계획이 세워지면서, 1964년까지 서울에는 93개동의 상가주택이 신축되었다고 한다. 1959년 지어진 4층 규모의 관문빌딩은 서울시내 최초의 상가주택(주상복합)으로, 서울역에서 나서자마자 보인다고 하여 이승만이 명명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1960년에는 대형아파트 건설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정권몰락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까지도 아파트의 공급공식은 시민을 위하여 공공자금을 활용하는 것이었으나,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의 상승으로 중산층 이상의 주거수요를 충족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재정에 의존하지 않는 건설비용 조달방안이 필요했었고, 당시로는 실험적인 방식인 선분양을 한강맨션에서 실현한 것이다. 한강맨션 견본주택 기공식에서 당시 정일권 총리는 장동운 주공총재를 봉이 김선달로 비유하기도 했다. 한강맨션 이후 국가재정에 의존하지 않은 민간주택(맨션아파트)은 시장재화로 거래되면서, 투자상품으로의 프리미엄·매각차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늘날 국내 아파트단지들은 과거 성(castle)에 버금갈 정도로 다른 도시공간과 구분되는 섬(insula)이다. 그리고 아파트단지 주변의 정비대상지역에는 빌라·맨션이 혼용되는 2-4층짜리 공동주택(연립주택·다세대주택)이 가득차 있다. 연립주택은 4층 이하의 200평 초과, 다세대주택은 4층 이하의 200평 이하 주택을 말한다. 성 밖의 주택이라는 의미에서는 '빌라'라는 표현이 맞으며, 도시 내 주택이라는 의미에서는 '맨션'도 딱히 틀린 표현이 아니다. 다만 고급주택이었던 맨션·빌라우르바나가 아닌, 소박한 농촌주택이었던 빌리루스티카 정도로 보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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