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동산·금융투자

반복되는 부실의 역사, 아파트

by Spacewizard 2024. 1. 2.
728x90

연말이 다가오면서 올 한해의 부동산시장을 정리하고, 내년의 시장상황을 예측하는 보도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주택가격은 경제성장, 매입자금(대출·전세가율), 공급량(신규분양·재고출회)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면서 결정되는데,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23년에는 분양가 상승이 뚜렷했으며, 그에 대한 풍선효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구축아파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또한 2022년부터 계속된 PF부실로 2023년 상반기에는 중소시공사의 기업회생 신청이 증가했고, 연말에는 한 대형시공사가 부활된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이전글 <금리와 인플레에 무너진 다리, 브릿지론>에서는 2022년 이후 금리인상, 건축원가 상승 및 주택경기 침체 등이 동시에 맞물리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들면서, 브릿지론 연장과 본PF 전환에 실패한 사업장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언급했었다. 또한 <점점 현실화되는 위험의 전염, PF>에서도 2022년 상반기부터 시작된 원자재가격(철근·시멘트 등)의 상승은 시행사업의 수지를 악화시켰고, 건축원가 상승분을 분양가에 반영할 수 없는 한 중장기적으로 아파트 공급부족이 뒤따를 수도 있다고 언급했었다. 오늘은 최근의 부동산시장의 현황과 함께 1960년대 아파트의 등장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주택공급 부족을 가져올 인상된, 건축원가·분양가 

 

2023년말 부동산개발시장에서 가장 큰 부담을 가지는 시장주체는 부동산신탁사일 것이다. 책임준공형관리형토지신탁(책준관토) 구도의 사업에서 공사가 중단되거나 사용승인 행정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시공사의 사업비 조달역량 부족이 그 원인이다. 부동산신탁사는 정해진 책임준공기한(책준기한) 내에 사용승인을 부득하게 되면, 대주에 대한 손해배상의무를 가지게 된다. 물론 부동산신탁사가 대주와의 신뢰관계·소통을 바탕으로 책준기한을 연장시킨다면, 다시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기한이익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주가 손해배상을 언제든지 청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2023년에 이어 2024년까지도 부동산신탁사는 PF부실사업에서 부족한 유동성을 보충해야 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대주의 손해을 보전해줌으로써 영업손실을 확정하는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파트가격을 인상시킨 가장 주된 요인은 물가상승이었는데, 이는 화폐발행·대출총량의 증가가 결국 화폐가치의 하락을 초래하면서 명목가격을 높이기 때문이다. 2023년 한해 동안 서울아파트 평균 분양가격이 44.6% 가량 오른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4분기 평균 3.3㎡(평)당 분양가가 1분기(2,593만원) 대비 +1,157만원 상승한 3,750만원이라고 한다. 이 조사내용이 맞다면, 2023년은 평당 분양가가 2천만원대 중반에서 3천만원대 후반으로 업그레이드된 역사적인 한해로 기억될 것이며, 서울아파트 전용 84㎡(33평형) 평균 분양가는 8.5억에서 시작하여 12억원대까지 상승한 것이다. 수도권·지방도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분양가가 상승세를 보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1~2년 동안 진행된 원자재가격·인건비 폭등이 분양가 급등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문제는 향후 예정된 규제(환경·안전)로 인해 공사기간 연장이 고착화되면서 분양가상방압력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2024년에는 '2030 국토교통 탄소중립 로드맵'에 따른 제로에너지건축물 인증 의무화와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공동주택 층간소음 대책'에 따른 규제가 실시될 예정이다.

 

2023년 매매된 수도권아파트 중 구축(준공 10년 이상)은 거래비중이 증가한 반면, 신축(준공 10년 이하)는 거래가 줄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축이 선호도가 크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으로 인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저렴한 구축이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가상승에 의해 지지되는 높은 분양가가 매수대기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 시기였을 수도 있다. 공급부족도 주택가격의 하방경직을 강화하는 주된 요인이다. 잊혀질만 하면 한번씩 등장했던 2024~2025년 주택공급 부족 전망이 2024년을 목전에 두고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서, 향후에도 신축의 희소성은 높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재인 정권에서 급등한 주택가격에 당황한 무주택자들이 2020~2021년 무리한 대출을 레버리지로 주택매입을 서둘렀다. 하지만 2022년 들어 금리인상과 주택가격 하락에 부담을 느낀 차입매수자들이 이자비용 부담에 손절(급매)하면서, 신축·구축 모두 주택가격이 하락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신축이 하방경직성이 높기 때문에, 2023년에는 하락율이 높았던 구축이 매력적인 투자처로 비춰졌다.

 

한반도에 아파트를 처음 도입한, 수탈자본

 

현재 「주택법」에서는 주택으로 쓰는 층수가 5개층 이상인 주택을 아파트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아파트의 초기형태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했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 벽돌로 건축된 3층 규모의 회현동 미쿠니아파트로, 경성 미쿠니(三國)상회가 일본인 직원을 위한 관사용 사원아파트로 세웠다. 이후 1932년 콘크리트로 지어진 4층 규모의 도요타아파트(현 충정아파트)는 중앙정원형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미쿠니아파트와 달리 최초의 임대아파트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충정아파트는 더 높은 임대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1940년 호텔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숙소인 트레머호텔(Traymore Hotel)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인민군 재판소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합동고문단 본부로 사용되었다가, 1962년 공매를 통해 주거용으로 전환되면서 유림아파트가 되었다. 1980년대 충정로를 따서 충정아파트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미쿠니상회는 경성에 다수의 아파트를 건축했는데, 그 배경에는 석탄수탈로 축척한 거대자본이 있었다. 해방 후 대구 소재의 연탄회사 대성산업공사(창업주 김수근)가  미쿠니석탄공업을 불하받았고, 1957년 서울에 설립한 자회사 대성연탄을 설립했다. 대성연탄이 건립한 마장동 연탄공장(현 마장삼성아파트)과 저탄장(현 대성유니드아파트)은 과거 미쿠니석탄공업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과거 마장동은 대성연탄공장, 한전 내연발전소, 고려가스가 집결한 에너지 클러스터였고, 왕십리역은 석탄·시멘트 등의 하역지였다. 미쿠니상회는 1935년 내자동에 4층 규모의 관사용 미쿠니아파트(현 서울지방경찰청 부지)와 후암동(구 삼판동) 삼판아파트를 세웠고, 1936년 회현동 취산아파트(현 아일빌딩), 그리고 1939년 적선동 적선하우스를 건설했다. 내자동 미쿠니아파트는 해방 이후 주한미군에 무상대여되면서 미군숙소인 내자호텔로 활용되었다. 내자호텔 1층 커피숍은 박정희 일행에게 술시중 드는 여인들이 궁정동안가(현 무궁화동산)로 이동하기 전에 대기하던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아파트로는 황금아파트(1937년), 청운장아파트(1938년), 국수장아파트(1940년) 등이 있다. 194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하여 영단주택의 공급을 통해 심각한 서민주택난을 해소하고자 하였는데, 영단(경영재단)은 그즈음 일본에서 생겨난 민관협력의 성격을 가진 중간형태의 특수법인이다. 하지만 실제 영단주택은 일반서민이 아닌 군수산업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공급되었는데, 전쟁을 앞두고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런 의도는 목조형 영단주택에 모르타르(mortar)를 칠한 광경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전쟁 중 도시화재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방도시에 대규모 단지형 영단주택이 공급되었고, 그 중 1942년 세워진 3층 규모의 목조형 혜화아파트가 있다. 해방 후 조선주택영단은 주택난 해소를 위한 존속가치를 인정받아 미군정 감독 하에 있었으며, 1948년 조선주택영단은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다. 1962년 대한주택영단은 대한주택공사법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주공)로 바뀌었고, 2009년에는 주공과 한국토지공사이 통합되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되었다.

 

한국전쟁 후 부유층의 전유물, 아파트

 

해방 이후 공동주택의 초기 선례를 남긴 중앙산업은 1946년 창립하여 건축자재을 생산하던 회사였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중앙산업은 1956년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동포직원들을 위한 기숙사 용도로 주교동에 3층 규모의 중앙아파트(현 중앙프라자)를 건축하였다. 그 건너편에 또 다른 6층 규모의 중앙아파트는 중앙산업이 1969년 준공한 건물이다. 중앙산업은 1958년 종암동에 3개동 5층 규모의 종암아파트를 건축하였는데, 이는 세대별로 독립된 소유권을 가진 분양형 공동주택으로써 해방 이후 최초의 아파트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인 마이어가 설계한 종암아파트는 최고급 자재를 사용한 서양구조를 갖췄으며, 준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벽난로를 갖춘 거실, 싱크대, 연탄보일러,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현대식 아파트에 감탄했다고 한다. 대한주택영단은 준공된 종암아파트를 인수하여 일반인에게 불하(분양)하였는데, 단층주거에 익숙했던 당시의 주거관념과 물자(석유·물·전기)낭비라는 인식으로 인해 분양성과는 저조했다고 한다. 1993년 철거된 종암아파트 부지에는 현재 종암선경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초기의 아파트 위치
초기의 아파트 위치

박정희 대통령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는 북한에 이미 널리 보급된 문화주택(아파트) 때문이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농촌에도 조립식 공법의 유럽식 고층주택을 보급했는데, 이에 필요한 기술·인력은 동유럽으로부터 전수받았던 것이다. 북한과의 경쟁구도를 이어가던 박정희는 서둘러 아파트 건립을 독려했고, 이에 대한주택공사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단지형(10개동 642세대)인 마포아파트를 2차례(1962년 1차, 1964년 2차)에 걸쳐 준공되었다. 이전 글 <한국인을 호화유람선에서 살게한, 르 코르뷔지에>에서는 마포아파트가 르 코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언급했었다. 도화동 일대 마포형무소의 농장터에 세워진 마포아파트는 초반 입주율이 저조했었는데, 연탄가스 중독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연탄가스 누출위험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현장소장이 직접 숙박하는 일화도 있다. 마포아파트는 원래 10층 규모에 석유난방, 수세식 화장실, 엘리베이터, 어린이놀이터, 분수, 조경, 그리고 실내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더스트 슈트(dust chute)까지 갖춘 고급아파트로 계획했었지만, 물자낭비라는 비판으로 인해 엘레베이터가 없는 연탄난방의 6층 규모로 변경하여 준공되었다. 연탄가스에 대한 두려움이 누그러지고, 생활의 편의성이 알려진 1963년말경 마포아파트는 대부분 분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입주민은 대부분 중상류층이었고, 아파트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철거된 마포아파트의 재건축조합이 국내 최초의 재건축조합이다.

 

서울에 변화를 가져온 불도저, 김현옥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전 세계로 방영된 서울시청 주변의 슬럼지역의 모습은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충분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울시장 김현옥은 박정희에게 서울 도심부의 적극적인 개발의지를 내쳤고, 종로 주변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2개의 고층건물(낙원상가·세운상가)를 건립했다. 1968년부터는 남산 주변에 외국인 전용의 힐탑아파트와 공무원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김현옥이 고층아파트의 입지로 남산을 택한 이유는 경부고속도로에서 한남대교를 건너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고, 기술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한다. 자기의 우수성을 타인에게 나타내 보이거나 과시하려는 욕구를 현시욕구(exhibition needs)라고 하는데, 이는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김현옥도 박정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현시욕구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별론이지만, 성수JC에서 동부간선도로(장암방면)를 타고 가는 길에 큰 언덕을 덮고 있는 한양대학교의 전경이 펼쳐지는데, 개인적으로 그 꼭대기에 자리잡은 도서관(백남학술정보관)이 매번 눈에 띈다. 이는 높은 지대에 세워진 건물이 그 규모에 비해 더 웅장해보이는 현시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엄청난 실행력을 가진 인물로,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육사동기로는 노재현·최덕신이 있다. 1961년 대령 김현옥은 5.16쿠데타에 가담하여 부산시정을 장악했고, 1962년 부산시장으로 임명된 후 4년간 재직했다. 1966년 김현옥은 14대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된다. 김현옥에 대한 평가는 손정목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겠다.

 

"성석린이 초대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이 1935년 6월 13일이었으니, 1995년 6월 관선 마지막 최병렬까지 모두 1,425명의 한성판윤·경성부윤·서울특별시장의 자리를 거쳤다. 그들 1,425명 중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이 김현옥이었다. 재임 4년간 실로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숱한 지하도를 팠고, 140개가 넘는 보도육교를 놓았으며, 청계고가도로를 그가 만들었다. 남산에 두 개의 터널을 뚫었고, 불광동길·미아리길도 그가 넓혔다. 한강개발·여의도개발·강남개발도 처음 시작한 것도 그였다. 400동의 시민아파트를 지었고, 광주대단지도 그가 만들었으며, 봉천동·신림동·상계동 등지에 거대한 불량지구 마을도 그가 만들었다. 한마디로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숱하게 많은 공약을 남발했으며 적잖게는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하루에 많을 때는 10건이나 되는 특별지시를 내렸으며, 시청직원들은 이 특별지시를 처리하는데 밤낮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서울 도시계획에서 엄청나게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728x90

주택부족의 해결책에서 재앙이 된 이유, 부실공사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저부가가치로 인해 경쟁력을 잃은 농업을 쇠퇴하였고, 농촌인구는 기회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였다. 이주민이 몰려든 서울은 주택부족으로 인해 주택가격이 급등하면서, 농촌에서 올라온 가난한 이들에게는 서울의 주택가격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가였다. 이렇다보니 이전에는 주거환경으로 열악하여 접근이 힘들었던 고지대·산비탈·하천주변에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된다. 서울시는 도시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판자촌을 합법적 주택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거인프라(상하수도·전기·전화·치안·의료·소방 등)가 매우 열악했다. 당연히 범죄·질병·화재의 발생비율이 높은 도시 내 취약공간이 되었다.

 

종로와 남산에서 아파트 건설경험과 자신감을 쌓은 김현옥은 서울시민의 주거형태를 판잣집에서 시민아파트로 빠르게 전환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1969~1971년 3개년 동안 서울 달동네에 시민아파트 10만호를 건립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11평 규모의 시민아파트는 방 2개와 마루·부엌으로 설계되었고, 부대설비로 연탄난방·공동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파트를 선보이려 했던 조급함부실공사 이어졌는데, 지질검사·측량을 생략하였고 타사업지의 설계도를 그대로 차용했던 것이다. 결국 1969년 와우산 중턱의 60도 경사에 와우아파트가 준공되었는데, 1970년 4월 1개동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준공시점에는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하중을 버틸 수 있었지만, 땅이 녹으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도 와우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별다른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와우아파트는 설계비를 아끼기 위해 금화아파트 설계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서울시가 예산사정에 따라 책정한 건축비는 일반적인 건축비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니, 시공사는 부족한 건축비를 메꾸기 위해 건축자재(철근·시멘트)를 덜 투입하는 저가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선정된 건설사가 무면허업자에게 하청을 넘기면서 건축실행원가는 더 내려갔다. 게다가 김현옥이 제시한 아파트 건설기간은 6개월이었다고 하니, 예산이 충분했다고 한들 날림공사를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현옥은 와우아파트 사고로 사퇴하게 되었는데, 치밀한 준비·계산 없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으니 자업자득으로 볼 수 있다.

 

2023년 4월 인천 검단의 LH(한국토지주택공사) 공공아파트 지하주차장 슬라브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7년부터 LH는 공공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무량판 구조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무량판 구조는 수평재인 대들보(beam) 없이 수직재인 기둥(core)·슬래브(slab)가 바로 연결되는 건축구조이다. 이 구조는 보가 없는 만큼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충격·하중에 취약할 수 있다. 건축공사는 지상골조보다 지하터파기의 공사단가가 높은데, 특히 암과 물이 많은 국내 지질구조상 터파기 단계에서의 비용절감 노력을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LH도 보를 없애고 터파기의 층고를 낮출 수 있는 무량판 구조를 도입했을 것이다. 문제는 설계·시공상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무량판 구조는 전단보강근의 누락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 철저한 현장관리·감리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민간아파트는 이러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에 공장에서 전단보강근을 배근한 구조물을 제작했었지만, LH는 위험절감 노력은 소홀히 한 채 비용절감이라는 과실만 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공공기관들이 부족한 예산과 높은 부채라는 경영상 어려움을 안고 있기 때문에 누가 LH의 사장·관리자·실무자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붕괴사고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50여년 전 서울시가 발주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사례를 포함한 '공공개발에서의 역사적 실패'를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2023년 현재에도 대형시공사들이 준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정을 앞당기거나, 물가상승에 따른 예산부족으로 건축자재를 덜 투입함으로써 건물이 붕괴되는 소식을 가끔 접한다. 50여년 전과 별반 달리 보이지 않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은 고금을 불문하고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1970년 4월 서울시장을 자진사퇴한 김현옥이 1971년 10월 내무장관으로 발탁된 부분에 대해서는 쿠데타 공신 혜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 손정목 교수가 언급한 김현옥의 평가대로라면 어느 인사권자라도 김현옥은 그냥 두기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인정신만 조금 내려놓는다면 더 좋았겠지만.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