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자문해보자. 업종·회사·경영자·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내정치, 원만한 인간관계, 컴퓨터활용능력, 근면성실, 영업력, 관리력 등이 거론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금융권 영업직과 대기업 관리직을 모두 경험해 바에 따르며, 연차에 따라 필요역량은 조금씩 달라진다는 결론이다. 어느 조직에서건 주니어급에서는 관리력·근면성실, 시니어급에서는 영업력·사내정치가 필수역량이지만, 연차를 불문하고 갖춰야 하는 자질로는 단연 보고력을 뽑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보고력은 듣기 좋은 목소리와 말주변이 유창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날수록 잘 뽑아낸 보고서에서 탁월한 보고력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이미 지극정성을 갈아 넣기 때문이다. 기업 내 필수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보고서는 운영·성과·목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정보와 분석을 제공하는바, 정보를 구성하고 복잡한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며 적절한 언어·어조를 사용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보고서는 작성자의 전문성·기여도를 보여줄 수 있는 도구이며, 그 작성스킬은 도제(徒弟)시스템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대입논술이나 대학리포트와는 그 작성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직에서는 직원들에게 시스템적인 교육을 전파하지만, 결국 빼어난 리포터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뛰어난 고수(장인)이 있어야 빠르게 배울 수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첫직장이 영업직종이었던 관계로, 몇년이 지나도록 보고서를 작성할 일이 없었다. 당시 드라마 속에서 보고서 못 썼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혼나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두번째 직장이었던 대기업 손해보험사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는데, 대기업들 중에서도 보고서에 있어서는 일가견 있는 그룹사였다. 회사내 모든 부서가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지체없이 보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직도 한 수석님(차장급)이 해준 말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데, "우리의 가장 큰 생산품은 보고서다"라는 것이다. 이전 직장에서의 생산개념은 '수주계약을 체결하여 회사에 수수료를 입금시킴으로써 회사재무에 직접 영향을 주는 활동'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보고서가 생산품이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었다. 이런 낯선 환경이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고 두려웠지만, 다행히 빠른 적응력으로 금새 보고주무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고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인 2006년 11월에 읽은 한권의 책이 큰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나탈리 골드버그의 저서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Writion Down the Bones」이다. 오늘은 보고서와 글쓰기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제1원칙 전진배치, 메시지
보고서를 만드는 동안 끊임없이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보고대상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대상에 따라 보고내용의 심도와 단어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업무파악도가 높은 부서장·직속임원에게는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격식없는 보고가 가능하지만, 타부서·외부고객에게는 최대한 평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보고서를 뽑아내야 한다. 물론 보고대상과 무관하게 모든 보고내용은 명확한 결론(메시지)을 담고 있어야 한다. 먼저 담고자 하는 결론을 헤드(head, 하이레벨) 목차에 서술하고, 그 결론이 나온 배경·이유를 바디(body, 로우레벨) 목차에서 나열한다. 이러한 두괄식 표현은 가독성·전달력을 모두 높여준다. 개인적으로는 헤드목차 1꼭지에 구체도에 따라 2단계의 바디목차를 즐겨 사용한다. 보고서 작성에 익숙해지면, 약간 게임을 하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전달하고자 내용들을 몇 개의 문단으로 나열해 놓은 후, 목차레벨을 퍼즐 맟추듯이 옮기다보면 어느듯 질서있는 목차가 잡히게 된다. 참고로 헤드목차를 단어나열식으로 끊어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보다는 서술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사의 내용파악에 도움을 준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한, 보고서
보고서를 생산하는 주무들을 초안이 단번에 패스할 것이라는 기대를 보통은 하지 않는데, 주무들이 작성한 보고서의 보고대상은 보통 2~3단계를 거친 상부로 보고되기 때문이다. 결국 1차 보고받는 자가 2차 보고자가 되고, 2차 보고받는 자가 3차 보고자가 되는 식이다. 즉 보고받는 자도 결국 자신만의 톤앤매너를 보고서에 녹여야 하기 때문에, 초안은 수차례에 걸쳐서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수정된다. 자신의 작품(보고서)이 붉게 난도질되는 광경을 처음 본 주무는 무기력함과 허무함에 당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안도감을 가진다. 이 또한 보고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고의 공헌도를 독차지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려는 상사의 의도를 생각하면 씁쓸한 부분도 많다.
보고서는 정보공유와 이를 통한 의사결정의 지원을 기본기능으로 한다. 재무성과, 시장동향, 프로젝트 경과 등 회사 내의 다양·중요한 정보를 보고서를 통해 명확·간결하게 전달함으로써, 의사결정권자가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보고서의 큰 역할은 회사시스템 내에서 각자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입증책임은 소송에서 어느 증명이 필요한 사실의 진실여부가 불명확할 때,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어 법률판단을 받게 되는 당사자 일방의 위험(불이익)을 말한다. 소송이 낯선 일반인들은 미흡한 증거수집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불이익이 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입증책임은 법원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적용되는데, 특히 기업 내에서 명확한 R&R(역할과 책임)을 부여받아 일하고 있는 근로자에게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회사에 금전적인 손실 내지 평판훼손을 입혔을 경우, 사규에 근거하여 징계위원회에서 재판과 유사한 절차를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 형태로 남긴 보고서는 사라지는 말과 달리 반영구적으로 남으면서 증거효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보고서는 보고대상을 위한 것이 아닌 작성자를 지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종이가 아닌 뼈에 새기는, 글쓰기
골드버그의 저서는 읽는 내내 글쓰는 요령 뿐만 아니라 용기·통찰력을 충만하게 해줬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골드버거가 생각하는 작가의 임무는 철학적이면서도 직관적이다. 삶의 덧없음(무의미)·사소함·유한함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며, 삶을 이루는 순간들에 대한 경건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뼛 속까지 내려가라는 표현은 인생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서 나의 본질을 직면하고, 나의 인생에 경탄과 애착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술적으로는 단어를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블로거나 저자들이 상업적 목적을 위해 글을 쓰고, 조직 내 보고서 또한 넓은 범위에서 상업적인 글쓰기이다. 하지만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적당량의 분량·심도의 글을 쓰다보면, 글쓰는 목적의식(본질)을 잃은 채 그저그런 작문으로 남게 되면서 흥미를 잃게 된다. 보고주무로서 뿌듯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현안의 본질을 간결하게 담은 보고서 출력본을 마주할 때이다. 폰트·글자크기·줄간격, 그리고 적당량의 헤드와 바디가 선사하는 뿌듯함은 마치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킨 예술가의 심정에 버금간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예술의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데, 예술에 가까운 글쓰기는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가 깨닫게 해준다. 골드버그가 말하는 글쓰기가 인생과 세상을 더 아늑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듯이, 보고서는 회사 내에서 정보소통책·위기타계책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의 재무와 미래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안내할 수 있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으며, 자신의 바깥에서는 어떤 배움의 길도 없다고 한다. 본인이 지금 여기 페이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 또한 내가 가진 지식·감정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자룡이 헌칼 쓰듯' 원페이지 보고서를 자유자재로 출시할 수 있는 역량은 개인적인 성취감은 물론, 자부심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물론 손에 익은 헌칼처럼, 손에 익은 키보드 만한 큰 무기가 없다. 보고·결재수단이 IT의 발달로 인해 수많은 디스플레이들로 대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상사·경영자와의 신뢰관계를 견고히 해주는 수단은 손에 잡히는 페이퍼이다. 영업직종으로 다시 복귀한 현시점에서 돌이켜 봤을 때, 가장 뿌듯하고 소중한 경험 중에 하나로 다가오는 것이 '보고서 작성을 수련'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주변에 정형화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경쟁자가 없는 환경이다 보니, 이유있는 자신감을 배가되기도 한다. 주변의 변호사 한분은 답변서면 하나를 작성하더라도, 의뢰인의 인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다. 이를 본 의뢰인은 활자화된 그의 정성을 느끼면서 감동하고 감사해 한다. 장인의 자세로 작성하는 보고서는 그냥 종이 위의 글자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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