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배상책임보험과 관련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원고가 되었다. 변호사가 소장을 작성하여 보낸 준 당일, 인지세 130만원 가량을 대법원에 납부하면서 본격적인 소송전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험사의 정보력·재무력이 커지면서, 보험소비자를 다루는 보험사의 솜씨가 고도화된 느낌이다. 물론 보험사고에 대한 의견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보험소비자는 최대한의 보험금을 요구할 것이고, 보험사는 최소한의 보험금에 합의하고자 한다. 보험사는 국가도 자선단체도 아니기 때문에, 주주를 위해서라도 철저한 조사를 거쳐서 최소한의 보험금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추후 업무상 배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분쟁당사자 간의 체급차이와 그로 인한 싸움기술의 수준이다. 보험사 직원들은 정해진 가이드라인·내규에 따라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할 것이며, 여기에는 추가조사·소송 등의 방법이 포함될 것이다. 반면 보험분쟁이 생소한 보험소비자들은 한번 자신감을 잃게 되면 귀찮은 이슈에서 조속히 해방되길 원하고, 더군다나 소송은 준비·절차·결과에 대한 괜한 공포감으로 기피하기 십상이다. 이렇듯 보험사의 형식적인 초반조치에도, 대다수의 보험소비자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싸움은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다.
소송을 잘 활용하는, 보험사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해보자. 선임한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에 손해사정서를 제출했는데, 얼마 후 보험사는 면책(부지급)을 통보하였다. 물론 보상요구금액이 매우 높기는 했다. 하지만 면책의 근거로 제출한 5페이지짜리 법률의견서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아마도 보험사의 협력로펌이 사실관계·법리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도 없이 형식적인 의견서를 납품한 것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보험사의 협력로펌은 그 보험사의 법무팀에서 관리직급(수석변호사·송무팀장·법무팀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들이 운영하는 로펌이다. 이들 로펌·보험사는 티키타카(tiqui-taca)한 관계로, 서로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있다. 무엇보다 로펌은 소송건을 만들어야 돈을 버는 구조이기 때문에, 분쟁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인 면책의견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어설픈 갑옷(법률의견서)을 입은 보험사 직원은 보험소비자들에게 거침없이 칼날(면책의견)을 휘두르게 된다.
보험업 규모가 커지면서 법적 분쟁과 함께 내부의사결정도 법률자문에 기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물론 소송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작성한 문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의 없는 법률의견서라 할지라도 감히 다툴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험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허무한 순간이 있었는데, 자신감이 넘치던 손해사정사도 보험사의 면책통보·법률의견서 앞에서 주저없이 사임했던 것이다. 합의금의 15%에 달하는 수수료로 받기로 한 손해사정사가 쉽게 포기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보험사들은 면책 띄울 맛이 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얼마나 보험소비자들을 타격감 좋은 상대로 생각할지.
물론 보험사 입장에서 보험사기가 워낙 횡행하다 보니, 보험금 지급에 대한 엄밀하고 보수적인 검토는 필요해 보인다. 그렇기에 소비자들은 귀찮더라도 법지식·소송절차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번은 다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형사사법절차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면,
경찰조사·송치·기소 등의 일련의 수사과정이
훨씬 덜 두려울 것이다"
민사도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힘이다. 물론 소의 실익, 변호사비용 그리고 시간투자 등 다양한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소송전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험사도 고액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판결(내지 조정·합의)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는데, 이는 보험사 입장에서 의사결정을 제3자(판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책임문제(업무상 배임 등)에서 비켜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용부담을 느낄 수 있는 개인과 달리, 회사는 법률자문비용과 소송비용을 기꺼이 부담하는 경향이 있다.
기울어진 싸움터에서 일을 키우는, 보험사
보험사고는 보험계약에서 정한 보험사의 보험금지급책임을 구체화하는 불확정한 사고로, 보험사는 보험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만 보험금을 지급한다. 보험사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특정성·우연성이 요구되는데, 이는 보험계약에서 특정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사건에는 보험금청구권의 성립·내용·소멸 등을 쟁점으로 하여 제기되는 사건 일체를 말하며, 크게 다음과 같이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보험금청구권은 3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된다.
보험금청구소송(원고 보험계약자) : 보험계약자가 보험금지급을 요구하며 제기
보험금청구권 부존재확인소송(원고 보험사) : 보험사가 보험금지급책임을 부인하며 제기
구상금청구소송(원고 보험사) :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한 후, 제3자를 상대로 제기
보험계약자가 보험금에 대하여 보험사와 이견이 있다면, 우선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대응방향이다. 개인적으로도 초기단계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예상치 못한 손해사정사의 이른 사임 때문이었다. 변호사도 처음에는 으레 소액사건으로 생각하여, 분쟁조정으로 진행하자고 했었다. 보험사와의 분쟁이 생긴 이해관계인은 분쟁조정위원회(금융감독원 산하)에 분쟁조정민원을 신청할 수 있는데, 금감원은 사실관계를 조사·검토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합의를 권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 분쟁조정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의·의결을 거치게 된다. 근데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에 제출한 자료 일식을 전달받아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는 손해사정금액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손해사정금액을 들은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지체없이 민사소송을 준비하자고 했다.
"그 정도의 높은 보험금(소가)이면,
소송으로 바로 진행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사망사고·중상해(영구장해, 5년 이상 한시장해 등)는 심각한 피해정도와 고액보험금을 감안하면, 소송으로 진행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소가가 높을수록 법원·보험사가 각각 산출한 보험금액의 차이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액보험금이 지급될 것으로 예상되는 보험사고는 보험사 입장에서는 비상사태이며, 보험금을 낮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 보험소비자가 요구하는 보험금을 다 지급할 바에는, 보험사는 '못 먹어도 고' 심정으로 소송을 진행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패소가능성이 농후한 보험사건도 추가비용(지연이자·변호사비용)을 감수하면서 작렬하게 패소(내지 합의)하는 것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소송전략이 크게 나쁘지 않은 이유는, 일단 지급시기를 연기할 수 있고, 지급보험금에 대한 책임(해태·배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는 싸움, 민사소송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을 원고, 소송을 당하는 사람을 피고, 변호사를 법률대리인이라고 한다. 이는 형사소송에서 소를 제기하는 이를 검사, 피소된 이를 피고인, 변호사를 변호인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된다. 소장에는 당사자의 인적사항(이름·주소·연락처 등)과 청구취지·청구원인을 기재해야 하는데, 상대방(피고)에게 원하는 것과 그 이유를 각각 청구취지·청구원인에 밝히면 된다. 그리고 청구원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으면, 함께 첨부하여야 한다. 민사소송은 원고가 법원에 소장을 접수하면서 인지세를 납부하면 시작된다. 소송경험이 없다면, 소송이 세금으로 공짜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이 제공하는 민사소송서비스는 무료가 아니며, 소가가 커질수록 지불해야 하는 인지세가 높아진다. 법원은 접수된 소장을 심사하게 되는데, 주로 관할법원, 누락내용, 소가, 인지대·송달료 납부여부 등을 확인한다.
이후 법원은 피고에게 소장부본을 송달하고, 피고는 답변서를 송달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30일을 경과하더라도 법원에서 지정한 판결선고기일 전까지 답변서를 제출하면 된다고 한다. 답변서에는 원고의 청구취지·청구원인에 대한 답변을 기재해야 하는데, 크게 일반적 답변서와 형식적 답변서로 구분된다. 30일 이내에 답변서 제출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간단한 내용의 형식적 답변서를 제출하여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는 주로 소장에 대한 검토가 미비하거나, 변호사 선임이 늦어지는 경우에 활용된다. 이번 보험사건도 상대측 로펌에서 형식적 답변서를 제출했는데, 다음과 같이 청구취지·청구원인에 대한 답변이 간단히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소장에 제시된 추가적·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할 시간과 명절(구정)연휴를 감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구취지에 대한 답변
1. 원고의 피고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원인에 대한 답변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준비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법원에 출석하여 변론하는 재판일을 변론기일이라고 하는데, 답변서가 제출되면 법원은 변론기일을 지정한다. 최근 사건이 많아서 최소 3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변론기일이 너무 안 잡힌다 싶으면 법원에 변론기일지정신청서를, 변경기일을 변경하고 싶으면 법원에 변론기일변경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변론기일 전에 상대방의 주장을 미리 파악·분석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필요한 증거의 범위와 관련이 된다. 피고의 답변은 원고주장에 대한 일치·불일치(부인)·부분일치로 구분된다. 이 중 일치하는 주장에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피고가 원고의 주장을 일부라도 부인한다면 그에 대한 증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듯 법정에서의 판결을 입증대결이기 때문에,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증거와 스스로 확보할 수 없는 증거를 명확히 구분하여 임해야 한다. 스스로 확보할 수 없는 증거는 확보 가능한 기관에 미리 신청해둬야 한다. 현실의 법정은 미디어 속의 광경과는 사뭇 다른데, 사건당 주어진 5~10분 내에 그간 제출한 서류·증거를 확인하고, 판사의 질문에 변호사가 답하는 정도이다. 변호사 간의 치열한 공방과 설전은 없다.
여기서 또 중요한 부분이 판사의 말(주로 의문·궁금)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판결문을 작성하는 판사의 말은 사실상 시험의 출제의도와 같다. 출제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주어진 시간 내에 정답을 놓치듯이, 판사가 의문시하거나 궁금해하는 부분을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 준비없이 내 놓는 말은 다시 주워담기 어려우니, 다음 변론기일까지 차분하게 서류로 준비해야 한다. 몇 번의 변론기일에 걸쳐서 상호 간에 충분한 주장·증거를 제출하였다면, 심리를 종결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보통 마지막 재판일로부터 1달 전후로 판결이 있는데, 판결에 이의가 있다면 판결문 송달일로부터 2주 이내에 해당 법원에 항소장을 접수해야 한다. 이렇게 민사소송 1심을 마무리하는데, 보통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도 소요될 수 있다.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면, 당황한 당사자는 정신줄 놓은 나머지 스스로의 정신·신체에만 신경을 몰두한다. 사고의 인과관계와 사고현장의 전후상황을 환기시킬 만한 여유가 없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은 언제든지 보험사고나 형사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의 정신·신체 추스림과 함께 추후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초동조치도 신경써야 한다. 보험사고나 형사사고에서 스스로의 과실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확보하는데, 굳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배우자·지인에게 사고상황의 정리를 부탁만 하더라도, 후회할 만한 일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사고현장에서의 「증거가 될만한 무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이 옅어지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보험금은 보험사가 그저 주는 것이 아닌,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여 최선을 다해야 만질 수 있다. 학교에서 최소 10년 이상의 기본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 현대인들이지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훈련(법·경제)은 오로지 「수업료를 지불하는 경험」을 통해서 습득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손해보험사 임직원들이 고액의 성과급을 받는다는 기사가 많은데, 어쩌면 "방치된 가난·무식·무능이 누군가에게는 경제적 이익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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