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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잠실과 함께 쓸모 있어진, 탄천

by Spacewizard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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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88cc에서 발원된, 탄천

숯과 동방삭의 에피소드를 간직한 하천이름

잠실 육속화와 양재천 직강화로 점점 커가는 개발잠재력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Elksz9wdJAA

 

2023년 9월 서울시는 2029년까지 잠실 일대 수변공간(한강·탄천)에 생태·여가문화공간 조성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탄천하류 동쪽의 잠실운동장 복합지구 개발계획(스포츠·문화·MICE)과 함께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탄천하류의 서쪽에는 현대차 부지(국제업무·MICE)와 영동대로 복환환승센터가 개발 중에 있기 때문에 탄천을 중심으로 한 동서의 개발시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서울시는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탄천하류의 미래는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여 확연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미 현재의 탄천하류도 불과 몇 십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 많이 변한 모습이다. 탄천의 변화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은 그만큼 지리적·도시공학적인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은 탄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탄천하류 동측에 자리하는 잠실에 대해서 알아보자.

 

탄천의 공통된 유래, (탄)

 

1973년 성남시가 발족할 당시 분할된 행정구역은 3개(탄리·단대리·하대원리)였는데, 탄리는 태평동·신흥동, 단대리는 단대동·중앙동, 하대원리는 하대원동·성남동으로 분할되었다. 탄리(숯골)에서는 한성에 공급할 숯을 생산하였는데, 마을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숯물이 서쪽에서 흐르는 냇가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숯물로 인해 검게 물든 냇가를 탄천(숯내·검내)이라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숯을 직접 관리하였는데, 세종시대부터 장식(종8품)에 임명하여 숯을 철저히 관리·감독하게 하였다. 당시 궁궐에서 사용한 숯의 주된 용도는 한약제조·음식조리·다림질이었는데, 궁중문화를 즐겨 따라하던 부유한 양반들도 자연스레 숯을 찾게 되면서 숯의 수요는 점차 증가하였다.

 

탄천의 유래는 여러 버전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시대이다. 온조(백제 시조)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후, 탄천 일대를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군사들에게 배식을 하기 위해 많은 장작을 떼웠고, 이때 나온 숯들은 식용으로 사용할 냇물의 정화를 위해 냇물 속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이렇듯 숯들이 내를 가득채워 「숯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탄천을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전국에서 모인 10만명 이상의 대군으로 군사훈련 중의 하나인 대열(大閱)을 실시했다고 한다.

 

탄천의 유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픽션은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참고로 1갑자가 60이니, 삼천갑자는 180,000년이다. 어느 날 옥황상제로부터 동방삭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은 저승사자는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었는데, 검은 물빛을 이상하게 여긴 한 사내가 저승사자에게 숯을 물에 씻는 연유를 물었다. 이에 저승사자는 숯을 희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태연하게 답하자, 그 사내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스스로가 동박삼임을 드러냈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이렇게 우둔한 자는 처음이다"

 

사람은 항상 신중함을 몸에 베게 하려 노력해야 하고, 말 또한 쉽게 뱉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 삼년갑자를 피해다닌 동박삭은 어느 순간부터 경계심이 풀렸을 것이고, 낯선이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내 저승사자는 동방삭을 오랏줄(붉은 포승줄)로 묶은 채로 옥황상제 앞으로 끌고 갔는데, 동방삭의 죄명은 저승명부에 적힌 자연수명 60년을 몰래 삼천갑자로 조작한 것이었다. 저승사자가 숯을 씻던 냇물을 「숯내」라고 불렀다. 동방삭은 중국 전한 무제시대의 관료로,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말할 수 있는 1갑자(60년)을 살았다고 한다. 무제는 익살과 재치가 넘치는 동방삭을 평생 옆에 두었지만, 한낱 광대로 여기면서 높여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왕에게도 거침없이 익살을 드러내던 동방삭은 미치광이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출사를 속세를 피하는 수단으로 여겼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런 동방삭의 태도가 신선세계와 쉽게 결부된 배경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탄천의 저승사자 스토리와 유사한 모티브의 동양설화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마고할미이다. 어느 산 깊은 계곡 반석 위에 한 노파가 쇠절구공이를 바닥에 문질러 갈고 있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사람이 지나가던 사내 하나가 노파에게 쇠절구공이를 가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파는 쇠바늘이 필요해서 갈고 있다고 답하자, 그 사내는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쇠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소리는 처음이다"라며 스스로 동방삭임을 드러냈다. 그 순간 노파는 억센 손으로 동방삭을 잡았는데, 그 노파는 서왕모의 명으로 동방삭을 잡으러 온 마고할미였다고 한다. 마고(麻姑)는 직역하면 삼베여인으로, 대체로 나이가 많은 여인으로 표현되면서 뒤에 할미가 붙게 된다. 마고는 한국·중국·일본의 시조로 인식되며, 그에 인해 산파 내지 어머니의 상징이 되었다. 삼베가 옷의 재료로 사용되던 오랜 시간 동안, 여인들은 매일같이 베틀에 앉아 옷감짜는 일을 하던 직녀이자 어머니이자 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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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의 장수비결, 천도복숭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인문지리서 「산해경」에 따르면, 중국 서쪽끝 곤륜산 옥산(玉山)의 한 봉오리에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곤륜산은 황하강의 발원지로 중국인들에게 성지로 여겨진다. 서왕모의 시중을 드는 3마리의 청조(파랑새)는 음식을 제공하였고, 삼족오는 잔심부름을 하였다고 한다. 곤륜산에는 서왕모가 관리하는 불사의 열매인 반도(천도복숭아)가 열리는 반도원가 있었는데, 오리알 만한 크기의 푸른색 반도 1개를 먹으면 1만8천년을 살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반도를 영생의 상징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서 묘사된 반도원은 다음과 같다.

 

반도원에는 총 3,600그루의 복숭아나무를 3구역에 각각 1,200그루씩 심어져 있었다. 3,000년에 한번 열리는 입구쪽의 작은 반도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었고, 6,000년에 한번 열리는 중앙쪽의 달콤한 반도를 먹으면 불로장생이 가능했다. 그리고 9,000년에 한번 열리는 안쪽의 자주빛 반점을 가진 반도를 먹으면 태양과 달만큼 오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무제가 장생비법을 얻고자 신선에게 제사를 올리자, 칠월칠석 밤에 서왕모는 신선들을 거느리고 구름과 함께 9가지 빛깔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찾아왔다고 한다. 무제의 극진한 대접에 기분이 좋아진 서왕모는 반도 7개를 꺼내어 3개를 먹은 후, 남은 4개를 무제에게 주었다. 무제는 몰래 복숭아씨를 몰래 숨기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서왕모는 "선계의 물건인 반도를 지상에서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역사인물 동방삭이 신선세계와 결부되어 등장한다. 서왕모는 무제의 일행 중에서 있던 동방삭을 발견한 후, 동방삭이 자신의 반도를 3번이나 훔쳐 먹었던 것을 나무랬다. 사실 동방삭은 신선이었는데, 인간세계로 쫓겨나 무제의 신하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세계에서 4개의 반도를 먹은 인간 무제는 70세에 죽었는데, 천상세계에서 반도를 훔쳐먹은 신선 동방삭은 삼천갑자(18만년)를 살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오래 살려고 발버둥 쳐봐야 주어진 생을 살다가 죽기 마련이다.

 

강북에 붙어 있었던, 잠실

 

잠실은 원래 강북(광진구 자양동) 아래에 붙은 육지였다가, 1520년(중종 15) 대홍수로 인해 광진교-뚝섬 구간에 샛강(새내)인 신천강이 생기면서 하중도가 되었다. 하중도는 하도·하폭이 변하는 지점에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와 자갈 등 퇴적물이 쌓여서 유로변동으로 고립되어 형성된 하천 내부의 섬이다. 한강은 홍수가 발생할 때마다 유로를 변경하면서 자연제방이 침식되었는데, 과거의 한강은 홍수와 퇴적물들로 인해 수시로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보인다. 섬이 된 잠실도에는 아래의 3개의 마을이 있었다.

 

신천리 : 신천강에 면한 북쪽마을

잠실리 : 송파강에 면한 남쪽마을

부리도(부렴) : 서쪽마을

 

부리도는 홍수가 발생하면 「마을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그리 불렸으며, 농경지와 오래된 뽕나무가 있었다. 1970년 이전까지 잠실은 홍수의 대명사였는데, 특히 1925년 을축년대홍수는 잠실도 마을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래에 뒤덮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강폭을 거의 덮은 모래섬은 교통면에서는 이점이 있기도 했는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최단코스가 신천나루·송파나루(현 석촌호수)를 건너는 루트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중은 양잠을 장려하여 부리도에 뽕나무숲을 조성하고 동잠실을 설치했으며, 도성 서쪽 밖 연희궁(현 연세대학교)에는 서잠실을 두었다. 동잠실의 뽕나무숲이 홍수에 의해 자주 황폐화되자, 신잠실(현 잠원동)을 설치했다.

잠실의 변화
잠실의 변화

 

1971년 잠실도의 남쪽으로 흐르던 송파강을 매립하는 육속화는 잠실의 대전환을 가져왔는데,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홍수취약지역이 아닌 주거(아파트)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전 글 <위기의 영수증을 받기 시작한, 조합원>에서 현재 송파구 잠실은 전국민이 금싸라기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을 했었다. 또한 마치 배로 이동이나 한듯, 잠실을 단기에 강북생활권이 강남생활권으로 전환되었다. 잠실도는 육속화 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양주군, 1914년 고양군, 1949년 서울시 성동구에 속했던, 행정구역상 강북이었다. 잠실도를 원래의 자리였던 강북이 아닌 강남과 연결시킨 이유는 한강 연안의 홍수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시도였다. 과거의 한강은 구리에서 크게 휘어져 내려오는 물길이 잠실도에 막혀서 범람수량이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잠실도의 북동쪽 돌출부를 제거하여 직강화함으로써 물길을 뚫어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는 결국 신천강의 폭을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용인 골프장에서 발원한, 탄천

 

탄천은 용인시 법화산(기흥구 청덕동) 기슭에서 발원하여, 용인시(기흥구)-성남시(분당구·중원구)-서울시(송파구)를 거쳐 청담교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골퍼들이 서울 근교에서 자주 찾는 88cc가 탄천의 발원지이다. 조그마한 실개천으로 시작한 탄천은 분당구 구미동에서 동막천과 합쳐지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대치동에서 양재천과 합류하면서 또 한번 강폭이 넓어진다. 광교산·바라산에서 발원한 동막천은 낙생저수지와 그 아래 동막골을 지나서 탄천과 합류하고, 관악산에서 발원한 양재천은 과천 막계천과 합류하여 강남구·서초구를 가로질러 탄천과 합류한다.

 

본래 양재천은 (현)SETEC 부근에서 송파강과 직접 맞닿았었지만, 1970년대 개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구불구불하던 곡류하천이 직강화면서 탄천의 지류가 되었다. 「쓸 만한 인재들이 모였다」는 의미를 가진 양재(良才)에서 유래한 양재천은 그 상류를 공수천이라 불렀고, 탄천과 만나는 하류갯벌은 학탄(학여울)이라 하였다. 학여울은 「여울에 학이 빈번히 날아든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본래 탄천은 청담교에서 남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현)대청역 부근에서 송파강과 합류했었다. 하지만 을축년대홍수로 인하여 신천강이 한강의 본류가 되면서 송파강의 수량이 크게 감소했는데, 하나의 홍수로도 뭍의 모습과 수로의 위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이 하중도의 특징이었다. 잠실도 육속화 과정에서 송파강은 매립이 결정되었고, 이때 탄천합류부·신천강합류부·석촌호수만 남겨 두었다. 이후 한강·탄천·양재천을 직강화하면서 현재와 같은 강류를 보였으니, 결국 잠실구간의 한강은 과거의 샛강에 불과했던 신천강인 것이다. 연장된 탄천 옆의 부리도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대회를 대비한 종합운동장이 건설되었다.

 

탄천·양재천의 자연적 특성을 기회로 삼아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였는데, 1970년 이전까지 뻘밭이었던 탄천·개포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1974년부터 구로동·신림동에서 주택개발사업으로 성공한 정태수는 대치동 은마아파트 부지를 헐값에 매입했는데, 당시 양재천·탄천의 유수지 역할을 하고 있던 대치동 저지대는 가격이 저렴할 수 밖에 없었다. 정태수가 특유의 로비력을 통해 탄천제방 축조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후, 수몰지역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베팅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정태수의 모험은 큰 위기를 초래할 뻔 했다. 우선 1979년 완공된 은마아파트는 탄천제방 축조에도 불구하고 침수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부동산투기 억제조치로 인한 미분양으로 한보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었다. 다행히 1980년 1월 제2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유가·환율이 급등하자, 미분양분들이 채 1달도 안되어 완판되었다. 현재 강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파트인 은마아파트·타워팰리스는 준공 당시에는 미분양으로 사업주체의 애간장을 태웠었다. 하지만 시장참가자들의 외면을 받는 와중에도 미래가치를 정확히 내다 본 소비자(일각에 따르면 투기꾼)들이 있었다는 부분은 부동산시장에서 자주 회자되는 일화로 남아있다.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던 탄천은 지난 50년간 국내의 여타 물줄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 발전해 나갈 예정이다. 한 마디로 서울 동남권역의 젖줄이라고 할 만하다. 남쪽에서부터 1990년대 초반 조성된 분당신도시, 2000년대 후반 조성된 판교신도시, 2010년대 중반 조성된 위례신도시·문정법조단지, 그리고 현재 탄천 주변에는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 국제교류복합지구(종합운동장-코엑스), 수서·복정 역세권 개발이 진행 중이다. 탄천에서 저승사자에게 체포된 동방삭의 오랜 수명만큼이나, 탄천과 그 인근의 지역들이 오랜 세월 영광을 누릴 수 있을런지 기대된다.

 

[Music] 꿈이 흐르는 강

https://www.youtube.com/watch?v=f6TV6pvoRm0

A river where dreams flow #꿈이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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