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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공천권을 두고 시작된, 붕당정치

by Spacewizard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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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 인사

훈구정치·척신정치 끝에 등장한, 사림

내부견해 차이로 인한 계속된 분열, 분당

독선이 보여 준 최악의 선택, 조선정치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연말 인사시즌은 기대·불안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지난 업적·고과를 스스로가 높게 평가한다면 기대를 할 것이고, 남들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평가를 받지 못한 이들은 불안해 할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는 한정된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자리싸움의 역사였다. 일상적인 인사개편은 정해진 인사시스템 내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보다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피 튀기는 모험·도전이 필요했다. 과거에는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역·내전을 일으켜야 했지만,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평화로운 정권교체방법인 선거를 치르고 있다. 국가통수권자를 결정하는 선거시즌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가깝봐도 무방하다.

 

정치인들에게는 「생물학적 목숨」이 아닌 「정치생명」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들에게 선거의 승리가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을 연장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주기적인 선거시즌에 유권자들이 목격하게 되는 광경이 하나 있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천권자에게 줄서는 모습이다. 이러한 행태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왔는데, 오늘은 권력을 향한 정치인들의 욕망을 보여준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척신정치의 끝에 등장한, 사림파

 

사화(士禍)선비들이 겪은 반대파 숙청사건으로, 조선시대 4대 사화는 다음과 같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중종의 계비 2명(장경왕후·문정왕후)이 모두 윤씨였는데, 당시 다음의 2개의 파벌이 경쟁 중이었다. 

 

대윤파 : 윤임(장경왕후 오빠)

소윤파 : 윤원형(문정왕후 동생)

 

을사사화는 소윤파가 대윤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장경왕후는 중전이 된 지 8년 만에 이호(훗날 인종)를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죽게 되는데, 이어서 중전이 된 17세 문정왕후는 장경왕후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돌보았다. 딸만 내리 3명 낳은 문정왕후에게 별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전 글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에서 문정왕후의 딸 효순공주가 구사안과 혼인한 뒤, 중종이 순화궁 터에 있는 집을 고쳐주었다는 언급을 했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중전이 된 지 17년 만에 이환(경원대군, 훗날 명종)을 낳으면서 입장이 난처해졌다. 세자(인종)와 그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한, 친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이 희박해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쟁구도로 인해 대윤파도 인종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문정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악평을 기록하고 있다.

 

윤씨는 천성이 극악스럽고 명종이 즉위한 뒤로는 그 아우 윤원형과 중외에서 권력을 휘둘렀으며 20년 사이에 조정정사가 어지러워질대로 어지러워지고 국맥이 끊어졌으나,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그렇다면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 할 만한다

 

문정왕후가 천성적으로 표독했는지, 아니면 궁지에 몰린 자식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문정왕후는 늦둥이 아들을 정적들로부터 보호하고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동생 윤원형과 정난정(윤원형 첩)의 도움으로 대윤파에 맞서게 된다. 2001년 방영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문정왕후(전인화 분)가 온화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는데, 이와 달리 실제의 문정왕후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세자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독설·저주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전 글 <인간계에서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천연두>에서는 천연두에 걸린 경원대군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문정왕후가 남편 중종의 시신이 왕릉에 안치될 때까지 매일 아침 시행해야 하는 곡·제사를 금지시키려 하였다고 언급했었다.

 

사림파(士林派)은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심한 탄압을 견뎌내면서 성장해왔고, 1567년(선조 즉위) 이후에는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사림파들은 훈구정치를 청산하고, 명종시대 윤원형의 척신정치가 빚어낸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척신(戚臣) 왕실과 혼인을 맺은 가문 출신의 신하를 말하는데, 즉 외척(外戚, 외가 친척)이다.

 

당파의 시작, 이조전랑

 

도학정치를 시대정신으로 앞세워 사림파도 인사권(현 공천권)을 놓고 분열하였다. 이조전랑조선시대 조정인사를 담당했던 이조에 속한 관직이다. 전랑(銓郞)은 인선실무를 담당하는 6명(정5품 정랑 3명, 정6품 좌랑 3명)을 통칭한 직책으로, 전(銓, 저울)을 붙인 이유는 「공정하게 저울질하여 적절한 이를 추천」하라는 취지였다. 낮은 지위임에도 주요부서 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권한은 막강했는데, 그 배경에는 자대권(自代權, 스스로의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이 자리잡고 었다. 이조전랑의 자대권에는 이조판서도 관여할 수 없었기에, 이조전랑을 한번 차지한 계파는 인사권을 악용한 독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정치의 폐단으로 알려진 붕당(朋黨)도 결국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일어난 싸움에서 시작되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은 양사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선조 초기 척신정치의 적폐청산의 급진성을 둘러싸고, 다음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림 내 선후배 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여기에는 인순왕후(명종 비)가 또 연관되는데, 척신정치의 청산과정에서도 척신이 관여되는 것이다.

 

선배사림 : 심의겸(인순왕후 동생)

후배사림 : 김효원 

 

1572년(선조 5)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었으나, 거부당했다. 심의겸(이조참의)가 척신적폐의 중심이었던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발탁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75년 김효원이 다른 관직으로 발령이 나면서, 후임자를 선정해야 했다. 심의겸은 심충겸(심의겸 동생)을 추천하였는데, 김효원은 이조전랑의 직분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당시 심의겸·김효원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림파는 동서분당된다. 이 때 동서의 기준은 당사자들의 집 위치였다. 

 

서인(심의겸 집) : 서쪽 정릉방(현 정동) 

동인(김효원 집) : 동쪽 낙선방 건천동(현 인현동)

 

이이(부제학)는 당쟁을 중재하기 위해 심의겸·김효원을 각각 개성유수·부령부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미 양당의 대립은 뿌리가 깊어졌었다. 동인은 주로 이황·조식·서경덕 문하생들로 구성되었으며, 류성룡·정여립이 있다. 1582년(선조 15) 이이가 동서중재를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했는데, 서인에는 이이·성혼 문하생들이 많았다. 이이가 죽은 1584년(선조 17) 이후, 동인이 득세했다. 하지만 5년이 흐른 1589년 정여립(동인)의 모반에 따른 기축옥사로 동인(이산해·류성룡)이 수세에 몰렸지만, 2년 후 다시 동인세력이 회복했다. 1591년(선조 24) 광해군 건저(建儲·세자책봉) 건으로 인해 정철(서인리더)이 선조에게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의 보복 차원에서 동인이 기획·실행한 건저문제가 성공한 부분으로 비춰봐서, 당시 정쟁이 만만한 싸움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분당에 이은, 남북분당

 

현대정치에서도 이념 불문하고, 집권세력이 정적을 인정(흡수)하지 않은 채 독선에 치우치면 필히 부패(더 나아가 분열)하게 마련이다. 선조시대 세력을 키우면서 위기마저 극복한 기득권(동인)은 정적(서인)에 대한 처벌논조를 두고 다시 분열되는데, 이 때 강경파 북인(정인홍·이산해·이발)과 온건파 남인(류성룡·우성전)으로 남북분당된다. 당시 이산해·이발이 한성 북쪽, 우성전은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류성룡은 경산도 출신이었다. 학파적으로 북인는 조식·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반면, 남인는 이황의 문인(경상좌도 기반)이 중심이 되었다. 남인은 시비분별보다는 정파 간의 협동에 통한 정국안정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시국에 경쟁세력(서인·북인)들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에 분조와 적극적인 의병지원을 펼친 북인이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분조활동에서 지도력을 보여준 광해군과도 밀접해졌다.

 

1407년(태종 7)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를 좌·우도로 구분하였는데, 낙동강의 동쪽을 경상좌도라고 하였다. 이는 한성에서 지역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좌·우를 판단한 것이다. 참고로 다른 도의 좌·우 판단기준은 한강(경기도), 금강(충청도), 영산강(전라도)였다. 이후 경상좌·우도는 몇 번의 합병과 분할을 반복하다가, 1596년(선조 29) 하나로 합치면서 대구도호부 달성에 경상감영이 설치된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은 조정이 대구도호부를 경상도·전라도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경상감영이 불타면서, 그 북부에 위치한 안동대도호부로 감영이 옮겨갔다. 1601년(선조 34) 접근성을 이유로 다시 달성으로 경상감영이 이전되었다.

왕위계승자를 따른 대소분당, 북인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세력의 분열을 촉발하는 발단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개인의 탐욕, 정권창출의 공헌도, 세대갈등, 그리고 미래권력에 대한 배팅이다. 1606년(선조 39) 적통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조정은 또 한번 분열을 맞이한다. 선조는 적통계승을 고집하며 세자책봉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이는 선조 스스로가 적통 출신이 아니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통계승에 대한 선조의 의지는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건저사건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왕조가 붕괴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자, 피난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하지만 종전 후 선조는 후계자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북인은 미래권력을 두고 대북파(광해군 지지)와 소북파(영창대군 지지)로 분당된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태어난지 2년 후인 1608년 선조가 숨을 거두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광해군은 정치적 파트너인 대북파의 수적 열세를 학문적 정통성을 통해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간 상대적으로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1610년(광해군 2) 영남유생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책으로, 광해군은 동인의 오랜 염원이었던 5현 종사를 전격적으로 허락한다. 여기서 5현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을 말한다. 흔히들 종묘는 많이 들어봤어도, 문료에 대해서는 익숙치가 않을 것이다. 종묘(宗廟)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인 반면, 문묘(文廟, 문성왕묘)유교의 성인·현자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당태종은 공자를 유학 최고 성인으로서 문성왕(文宣王)에 추증했는데, 이후 공자(제자 포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 6) 완성된 문묘는 성균관이 관장했다.

 

하지만 1611년(광해군 3) 대북파 리더 정인홍이 회퇴변척 상소를 올리면서 정국은 크게 변화했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은 조식(정인홍 스승)이 이황으로부터 모함받은 부분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올린 상소에서 이언적·이황을 비판한 사건으로, 회퇴는 각각의 호인 회재·퇴계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스승 조식의 학통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벌인 개인정치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남인·서인들이 단체상소를 통해 이언적·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회퇴변척에 실패한 대북파는 다급해진 나머지, 더 배타적이면서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축출하면서 정적을 배격하려고 한 것이다.

5현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조선 5현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조선역사의 아쉬운 한 대목인데, 70대 중반의 정인홍의 비타협적인 사고·행동이 협치를 추구하고자 한 젊은 광해군의 정치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이 때 광해군은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정인홍을 배척하기에는 정치적으로 마음의 빚이 있었고, 그렇다고 그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니 힘들게 얻은 남인의 지지가 아쉬웠을 것이다. 회퇴변척 이후 정치적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의 각성은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나타났다. 이전 글 <노자가 알려주는 인생에서 필요한, 각성>에서 언급한 3번의 각성 중에서 서인은 적어도 첫 번째 각성을 하게 된 것인데, 서인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만약 지방에 있던 정인홍이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운명과 역사적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조반정 이전의 붕당의 탄생과 분당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인사권을 둘러싼 요직독점과 비타협적인 국정운영으로 인한 첨예한 반목·보복이 조선중기 정치판을 뿌옇게 덮으면서, 결국 민생파탄과 외세침략(임진왜란·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조선시대 정치행태는 현대정치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심리·욕망이 빚어낸 판에 박힌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은 200여년 간 지속되었는데, 정조시대에 와서야 이조전랑의 권한을 폐지했다. 물론 그 전에 숙종은 자대권을 폐지하였고, 영조는 전랑을 6명에서 4명으로 축소하는 등의 단계적 폐지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이조전랑의 손을 떠난 인사권을 국왕이 아닌 외척이 쥐게 되면서, 또 다시 노론독점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현대정치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정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는 것이다."

 

정치가 한정된 자원의 배분결정을 다루는 만큼, 최선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최악 대신에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선택일 수도 있다. 조선왕정의 정치에서는 미래는 없고, 최악만 선택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인류역사의 한 대목으로,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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