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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오지에서 시작된 문벌, 청송심씨

by Spacewizard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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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청송심씨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간혹 보인다. 경상북도는 전체 면적의 80% 이상이 산지로 덮여 있는데, 특히 경상북도 3대 오지(봉화·영양·청송)는 동쪽에 태백산맥이 자리잡고 있어 개발과는 거리가 먼 자연친화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3대 오지는 동쪽에 태백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청송의 폐쇄적인 지리적 환경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교도소를 유치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이전 글 <고령화를 피할갈 수 없는, 교도소>에서는 이미 4개의 교도소를 가진 청송군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신규 교도소 추가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 오지에서 시작하여 조선 최고 명문가문로 거듭난 청송심씨가 있었으니, 오늘은 청송심씨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경상북도 행정구역 [출처:위키피디아]

외척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태종

 

소헌왕후 심씨(세종 비)는 왕가(시댁)에 의해 아버지 심온가 죽고, 친정식구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 본 비운의 여인이다. 태종(이방원, 소헌왕후 시부)은 오래 전부터 외척을 경계했었는데, 처남 4명(민무구·민무질·민무율·민무회, 원경왕후 남동생)과 현직 임금의 장인인 심온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김한로(양녕대군 장인)에게는 유배형에 내렸다. 어찌보면 김한로의 운명을 심온이 대신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면서 김한로는 죽임을 면했고,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심온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후에도 4년간 국정을 감독하면서, 병권·인사권을 쥐고 있었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 상왕이 단행한 인사에서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태종의 병권 장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심정(심온 동생)이 한 발언이 문제가 되었는데,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태종에게 보고된 것이다. 사은주문사(사은사 수장)로 명나라에 간 심온이 귀국하기 전에, 심정은 의금부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처형 당한다. 아마도 태종은 심정이 가진 불만의 근원으로 형 심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온은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일부 경비병력의 이동을 상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투옥되었는데, 결국 사위가 내린 내린 사약을 받게 된다. 태종이 원했던 것은 애초부터 친정세력이 없는 왕후였을지도 모르며, 사돈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치밀한 외척제거작전의 시작점이었을 수도 있다. 태종은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기 전에 그를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제거대상에게 먼저 권력을 나눠준 다음 제거하는 전략은 아버지 이성계의 어깨 너머로 배웠을지도 모른다. 

 

조선 초기 잘 나갔던, 이방원 과거 동기 

 

참고로 1382년(우왕 8) 16세의 이방원은 진사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인 1383년(우왕 9)에 병과 7등(전체 10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과거시험의 최종등수는 다음과 같이 3개로 구분되었다.

 

을과 : 1~3등(장원 포함)

병과 : 4~10등

동진사 : 11~33등

 

이방원의 과거 동방(同榜, 동기)로, 당시 김한로(수석)·심효생(차석)·민무구(13등)·황희(14등)이 있었다. 이방원이 이성계의 자식들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1385년(우왕 11) 문과급제한 이방연(이방원 친남동생)은 조선 건국 전에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심효생은 이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1410년(태종 10) 41세의 민무구는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죄목으로 유배지 제주에서 동생 민무질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는다. 누나 원경왕후도 동생들을 살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겠지만, 죄목이 자식과 연관되었던 만큼 마땅한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민무구가 죽기 전에 태종을 원망하며 남긴 말로 인해 훗날 남은 2명의 동생도 사약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이방원도 원래 동북면 무명장수의 5남에 불과했으며 저승에서 반드시 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민무구 입장에서는 과거동기 겸 처남으로서, 매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과거의 행적이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고려에 시작된 조선명문가, 청송심씨

 

심홍부(청송심씨 시조)는 고려시대 벼슬을 지냈고, 공민왕시대 심덕부(심홍부 증손)은 왜구를 격퇴하는 공으로 청송백(沈洪伯)에 봉해졌다. 고려시대 봉작(封爵, 작에 봉하다)은 종친(부마)·신하(공훈자)에게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작을 수여했다고 한다. 신하에게 내린 백작(伯爵)은 다시 군백(郡伯)·현백(縣伯)으로 구분되었고, 작위와 함께 관직·식읍(食邑)이 주어졌다.

 

청송(현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삼은 심씨는 신덕부·심원부 형제대에서 2개파로 갈렸는데, 한성의 경파(京派)와 영남의 향파(鄕派)이다. 조선 태조시대 좌의정을 지낸 형 심덕부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성에서 벼슬을 하며 지내며 「서울집 이라 불렸으나, 동생 심원부의 자손들은 조선왕조의 벼슬을 마다하면서 현재 영남 일대에서 거주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청송심씨의 명성은 거의 서울집 출신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심덕부의 아들 7형제(인봉·의귀·계년·징·온·종·정)가 모두 입신출세하면서, 서울집은 다시 7개파로 나뉘어졌다. 그 중에서도 인수부윤공파(4남 심징)와 안효공파(5남 심온)가 큰 벼슬을 많이 했다. 6남 심종은 경선공주(태조와 신의왕후 2녀)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조선시대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가문은 3개(달성서씨·청풍김씨·청송심씨)에 불과한데, 심덕부-심온-심회가 여기에 해당된다. 

 

청송심씨는 조선시대 왕실의 대표적인 외척집안으로, 왕비 3명, 부마 4명, 정승 13명(영의정 9명)을 배출했다. 과거급제자는 총 811명(문과 194명, 무과 37명, 사심마시 578명, 의과 2명)에 달한다. 조선시대 정승을 배출한 가문 순위로는 다음과 같이 4위이나, 영의정을 전주이씨 다음으로 많이 배출했다. 아무래도 왕가와 같은 본관을 가진 전주이씨가 최고위직을 많이 차지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전주이씨 22명 (영의정 11명)

동래정씨 17명

안동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 (영의정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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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배출가문 순위도 4위이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 왕비(순조 비)가 되면서 안동김씨가 정치권의 중심에 섰다고 언급했었는데, 조선시대 동안 정승 15명과 왕비 3명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당쟁을 촉박한 인물로 알려진 심의겸도 청송심씨로, 이전 글 <공천권을 두고 시작된, 붕당정치>에서는 사림 내부에서 심의겸(인순왕후 동생)과 김효원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동서분당이 발생했다고 언급했었다.

 

청주한씨 5명

여흥민씨 4명

파평윤씨 4명

청송심씨 3명 (세종 비 소헌왕후, 명종 비 인순왕후, 경종 비 단의왕후)

안동김씨 3명

 

새 임금에 의해 2번 발탁된, 심지원


인수부윤공파(심징 후손)인 심지원은 사헌부감찰을 지낸 심설의 아들로,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1620년(광해군 12) 28세의 심지원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게 되는데, 가깝게 지내던 대북파 이이첨의 권력농단에 실망하여 벼슬을 놓고 고향에 은거했다. 인조반정 이후 심지원은 예문관 검열(檢閱, 정9품 전임사관)에 재임용되었고, 1630년(인조 8)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변방·내직에서 두루 요직을 차지한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느라, 왕실과 함께 하지 못한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실여부를 알기는 어려우나, 오늘날에도 난간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핑계로 가족의 병세만한 것이 없다. 인조가 죽은 후 심지원은 대사간·대사헌·대사성·평안감사·참판(병조·이조)을 거친 후 형조판서에 오르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새로운 임금이 들어서면서 관운을 타는 스타일이었다.

 

1652년(효종 3) 심익현(심지원 2남)이 숙명공주(효종과 인선왕후 3녀)과 혼인함으로써, 입지가 두터워진 이조참판 심지원은 1656년(효종 7) 66세의 나이에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효종은 자신의 단점을 서스름없이 말해주는 심지원을 신뢰하였는데, 효종도 자신의 언행이 거칠고 성급한 성미를 알고 있었던 듯 하다. 1662년(현종 3) 심지원은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참고로 1653년(효종 4) 효종은 출합하는 딸을 위해 인경궁(仁慶宮) 터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출합하면서 임금이 딸·왕녀에게 집을 제공한 역사는 이전 글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영조화길옹주에게 하사한 능성위궁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

중종혜순옹주에게 하사한 연경궁

인조정명공주에게 하사한 연경궁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

중종효순공주에게 하사한 구수영댁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

 

명문가문 간의 소송전, 산송


1111년(고려 예종 6) 여러 군공을 쌓은 윤관(파평윤씨 중시조)이 사망했는데, 임금이 하사한 땅(현 파주 인근)에 묘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윤관의 묘는 약 500여년 간 알 수 없는 연유로 잊혀졌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 심지원은 부친의 묘자리로 물색한 파주부지 아래에서 윤관의 묘비 조작을 발굴하였고, 이에 파평윤씨 문중는 심설의 묘소 옆(약 3m 거리)에 윤관의 묘를 복원했다고 한다. 1658년(효종 9) 왕실로부터 이 일대의 파주 땅을 하사받은 청송심씨가 문중묘역을 조성하면서, 조선 최고 권력가문 간의 산송(山訟·산소에 관한 송사)이 시작되었다. 청송심씨의 파주 땅 하사와 관련해서는, 당시 영의정에서 내려와 좌의정이던 심지원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듯하다. 

 

영조시대 양대 문중은 상소를 통해 임금의 판결을 바랬는데, 영조는 왕실과 혼사가 많았던 문벌 간의 다툼인 만큼 신중하게 다뤘다. 5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1765년 영조는 2개의 묘를 그대로 받들라는 내용의 전교(傳敎, 임금명령)를 내렸다. 두 문중이 영조의 명령에 반발하자, 영조는 왕권을 발휘하여 오래 묵은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영조는 양가원로인 70세의 심정최·윤희복를 직접 국문한 후 귀양을 보냈는데, 윤희복은 노구를 이끌고 귀양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1969년 7월 양가는 2개의 묘 사이에 담장을 설치하기로 한 화해각서를 교환하였으며, 2006년 드디어 300년이 넘은 산송이 종결되었다. 청송심씨 문중묘 19개를 파평윤씨가 마련해 주는 토지로 이전키로 한 것인데, 2008년 4월 이장했다고 한다.

 

이전 글 <정치력을 행사하는 비정치인, 벌>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사회적 신분·지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문벌(門閥)이 사용되어 왔다고 언급했었다. 청송심씨는 조선왕조에서 빼 놓은 수 없는 문벌이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왕가의 견제로 인해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문벌(귀족·세도가)이 주도하는 계급사회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능력사회에서도 가벼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가문브랜딩은 다시 한번 과거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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