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서 신탁(trust)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왠지 전문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은행에서 볼 수 있는 신탁상품 홍보는 거의 금전신탁에 관한 것이다. 금전신탁(money trust)은 고객으로부터 금전을 신탁재산으로 예탁받아 이를 대출·사채매입 등에 활용한 다음 일정기간 후에 원금·수익을 수익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신탁업을 영위하는 회사는 총 60개로, 겸영 46개(은행 18, 증권사 21, 보험사 7)와 전업 부동산신탁사 14개이다. 겸영 46개사는 인가 단위별로는 종합신탁업 38개, 금전신탁업 8개로 나뉜다. 부동산신탁업자는 부동산만 수탁받을 수 있고, 종합신탁업자는 부동산신탁이 가능은 하지만 업무제한이 있다. 현행 부동산신탁제도는 일본의 제도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1989년 한국감정원 직원들이 다녀온 일본출장에서 이미 정착된 부동산신탁업을 목격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은 신탁은행·재신탁은행이 과점체제를 이루고 있는 등 한국보다 신탁이 더 잘 정착되어 있다. 최근 PF시장 부실과 함께 부동산신탁사에 대한 대중인식도 많아지고 있는 바, 부동산신탁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최초의 신탁은행, 한국신탁은행
1968년 11월 설립된 한국신탁은행(훗날 하나은행)은 신탁업무만을 취급함으로써, 신탁자금를 동원하여 장기산업자금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한국신탁은행은 초기에 많은 시중자금을 유치하였는데, 여기에는 은행금리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신탁금리(24~28%)가 있었다. 문제는 자금운용이었는데, 국민경제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은행들의 영업행태는 대출 위주였기 때문에, 은행이 투자를 한다는 자체가 생소했다. 그렇게 시행된 투자대상 1호는 남산1호터널이었다.
한국신탁은행의 자회사, 한신부동산
1969년 2월 28일 한국신탁은행은 자회사 한신부동산을 설립했는데, 한신부동산의 설립목적은 한국신탁은행이 신탁자금을 투자하는 프로젝트를 위탁받아서 효율적인 공사·운영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신탁은 부동산이 아닌 금전을 신탁받는 형태의 금전신탁 형태였고, 신탁·운용을 통해 발생한 수익을 분배했다. 오늘날의 금전신탁은 투자대상이 증권을 포함하여 다양하지만, 당시 한신부동산의 투자대상은 부동산개발사업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한신부동산이 주로 취급한 신탁상품은 부동산설비신탁으로, 이는 신탁은행이 수탁자금을 부동산설비(인프라)에 직접 투자한 후, 발생한 이익을 신탁가입자에게 분배하는 제도였다. 한신부동산은 고속도로·터널·주택의 건설과 택지마련 등을 신탁사업으로 수행했는데, 대표적으로 남산1호터널, 울산·언양 간 고속도로, 평창동 서민주택단지, 북악터널 등이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그 동안 공공예산(정부·지자체)으로 충당해 온 사회간접자본 분야에 민간자본을 동원할 수 있게 되면서 재정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투자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신탁
1974년 정부는 「한신부동산 정리 및 한국신탁은행 수지정상화 방안」을 마련하여 그 해 10월 한신부동산이 설립 5년 만에 정리했다. 이후 정부는 한국신탁은행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무용한 신탁업무에만 국한시킬 수 없어 업무범위를 확장해야만 했다. 결국 1975년 한국신탁은행은 일반은행과 같은 수준의 업무범위를 가지게 되었고, 1976년 4월 서울은행에 의한 흡수합병이 결정되면서 8월 서울신탁은행이 출범한다. 참고로 1959년 9월 설립된 서울은행도 당시 영업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상태였다.
한신부동산이 불과 5년 만에 정리된 배경에는 높은 조달금리 부담과 사업성 평가역량의 부족에 있었다. 한신부동산의 수탁자금은 주로 한국신탁은행의 고금리 조달자본이었는데, 애초에 짧게 산정된 사업기간으로 인해 금융비용의 부담이 상당히 늘어났던 것이다. 또한 한신부동산은 사업수지분석을 제대로 할 평가역량이 부족했기에, 토지를 비싸거나 불필요하게 매입하여 사업성이 없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수익성을 외면한 투자들은 한신부동산·한국신탁은행의 동반부실로 이어졌다.
한신부동산은 프로젝트 준공 이후에도 제대로된 투자금 회수를 하지 못했는데, 남산1호터널의 경우에는 준공 이후에도 서울시에서 차량통행을 위한 주변도로를 구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전에 미리 협의체를 구성·준비하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공기관(서울시)이 민간영역에 쉽게 협조해 줄 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한국신탁은행은 남산1호터널 관할권을 서울시에 싸게 넘기면서 큰 손실을 보았다. 이후 남산1호터널은 시내교통난 해소와 높은 통행료 수입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관할권을 넘겨 온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차량진입로·버스통행로 확장과 보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역시 자기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데, 공공재의 투자에서 민간자본이 성공을 거두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토지공개념 실현수단으로 시작된, 부동산신탁
1990년 「4.13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시행」의 일환으로, 1991년 4월 부동산의 관리·처분·개발을 위탁하는 부동산신탁제도의 도입이 발표되었다. 1991년 5월 한국감정원(현 한국부동산원)·성업공사(현 한국자산관리공사)는 각각 자회사 한국부동산신탁과 대한부동산신탁(훗날 코레트신탁)을 설립하였고, 국내 최초의 부동산신탁사인 두 회사는 부동산신탁 영업을 시작했다. 1996년 5월 한국토지공사(현 LH)가 한국토지신탁, 1996년 12월 주택은행(현 KB은행)이 주은부동산신탁(현 KB부동산신탁)을 설립하였다. 1997년 12월 주택사업공제조합(훗날 대한주택보증·주택도시보증공사)이 주택공제부동산신탁(현 대한토지신탁)을 설립했다.
1990년대 정부가 신탁업 인가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토지공개념을 통해 유휴부지의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1997년까지 설립된 5개 신탁사의 모회사는 모두 공기업이었다. 토지공개념은 공익을 위해서 토지의 소유·처분이 제한 가능하다는 개념으로, 토지의 개인적 소유권을 인정하면서도 이용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한마디로 필요시 정부가 토지시장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1991년 부동산신탁회사의 업무는 관리신탁·처분신탁과 부수업무(컨설팅·중개·대리)에 한정되었으며, 개발신탁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듬해 1992년부터 부동산신탁사의 영업범위가 확대되었는데, 1992년 11월 개발신탁(차입형토지신탁), 1993년 3월 담보신탁, 1994년 3월 국유지신탁이 인가되었다. 국유지신탁은 유휴국유지에 시행자가 건물(빌딩·상가·체육시설·창고 등)을 신축하여 일반에게 임대하는 사업이었다. 부동산개발금융이 태동하던 1990년대에는 시행·시공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차입형토지신탁이 개발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신탁사는 부동산개발업자의 역할이 강했으며, 정부의 부동산정책 집행을 보조하는 기능을 주로 했다.1996년 7월부터는 지방공단개발 시행자가 부동산신탁사에 사업시행권을 위탁할 수도 있게 된다.
한신부동산 실패와 궤를 같이한, 한국부동산신탁
2001년 2월 2일 부도처리된 한국부동산신탁의 부실원인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는 건설경기 불황, 자산·부채 듀레이션 미스매칭(duration mismatch), 그리고 부실경영이었다. 개발신탁(차입형 토지신탁)에서 사업비 명목으로 신탁사 명의로 조달한 자금만기는 1년 미만의 단기였던 반면, 부동산개발 특성상 투자금 회수는 3~5년 가량 소요되었다. 이러한 듀레이션 불일치는 자칫 위험요인(분양·공사)의 발생으로 만기연장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신탁사 입장에서도 여러 개발신탁들 중에서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으며, 정상사업장들조차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부실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금리가 20%대로 급등하면서, 이자부담이 가중되고 영업환경·재무상황은 더 크게 악화되었다. 한국부동산신탁이 보여준 정치권과 연관된 불법대출과 허술한 개발사업의 관리역량은 과거 한신부동산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데, 한국부동산신탁도 부동산개발 경험이 전무한 모회사(한국감정원)의 퇴직자·전직자들이 실무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14개, 부동산신탁사
1998년 교보생명·삼성생명이 각각 50%의 지분을 갖고, 생보부동산신탁을 설립했다. 2019년 7월 교보생명이 삼성생명의 보유지분 50%를 인수하면서, 교보생명 100% 자회사가 되면서 사명을 교보자산신탁으로 변경했다.
2001년 3월 한국자산관리공사는 부실신탁사를 정리하기 위해 국민자산신탁을 설립한 후, 코레트신탁·한국부동산신탁으로부터 우량자산(토지신탁)·인력·전산설비 등을 양수하였다. 양도한 두 신탁사는 결국 법인청산되었다. 애초 국민자산신탁의 설립목적이 양수자산의 정리를 위한 한시적 운영이었지만, 기대보다 우수한 재무성과로 인해 2004년 한국자산신탁으로 사명을 변경한 후 계속영업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따라 민영화 대상기관으로 지정 후 매각이 추진되었다. 2010년 3월 문주현(현 MDM그룹 회장)은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하게 되는데, 인수를 위해 대신MSD사모투자전문회사를 구성했다.
2004년 이병철(현 다올금융그룹 회장)이 다올부동산신탁을 설립했는데, 다올은 '하는 모든 일들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의미의 순우리말이다. 2010년 3월 하나금융그룹이 지분 58%를 취득하면서, 사명을 하나다올부동산신탁으로 변경했다. 이후 2013년 하나금융그룹이 지분 100%를 확보하면서, 사명을 하나자산신탁으로 변경했다.
2006년 코람코자산신탁(전 코람코)는 부동산신탁업 본인가를 취득했는데, 코람코는 2001년 이규성(전 재무부 장관)이 설립한 리츠(REITs) AMC였다. 현재까지도 코람코자산신탁은 신탁업계보다 리츠업계에서의 단단한 입지·명성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2000년대 후반 코람코자산신탁 리츠부문을 이끌었던 인력들이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들이 현재 부동산 자산운용업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바로 이지스자산운용·마스턴투자운용이다.
2007년 8월 아시아신탁(전 원반알앤아이)는 부동산신탁업 본인가를 취득했는데, 원방알앤아이는 2006년 10월 정서진(전 세계일보 편집국장)이 설립한 부동산컨설팅업체였다. 정서진은 은둔가로 알려졌으며, 초기 최대주주는 정민희(정서진 아들)였다가 2016년 들어서야 정서진이 최대주주로 등재되었다. 아시아신탁 설립단계에서 2007년 7월 법무법인 광장의 고문으로 있던 김종창(전 금융감독원장)이 아내 명의로 지분 4%(4억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2019년 5월 신한금융그룹이 경영권 지분 60%을 인수했고, 2022년 5월 잔여지분 40%를 전부 인수한 후에 사명을 신한자산신탁으로 변경했다.
2007년 11월 국제자산신탁(전 코리아에셋인베스트먼트)는 부동산신탁업 본인가를 취득했는데, 코리아에셋인베스트먼트는 2000년 유재은이 설립한 투자자문사이다. 2019년 우리금융그룹이 경영권 지분을 인수하면서, 사명을 우리자산신탁으로 변경했다.
2009년 8월 무궁화신탁(전 알앤알컨설팅)은 부동산신탁업 본인가를 취득했다. 2016년 최대주주가 이용만(전 재무부 장관)에서 오창석(전 법무법인 광장 파트너변호사)으로 변경된 이후, 공격적인 계열 확대를 펼쳐오고 있다. 대표적인 계열사로는 현대자산운용·케이리츠가 있다.
2009년 12월 코리아신탁(전 새한자산신탁)은 부동산신탁업 본인가를 취득했다. 2018년 최대주주가 이노창(전 삼일회계법인 대표)에서 이현섭(이기승 장남)으로 변경되면서, 공식적으로 보성그룹에 편입되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기승 회장을 보성그룹 동일인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보성(전 보성건설)의 최대주주이기 때문이다. 코리아신탁은 설립 당시부터 실제 주주에 대한 풍문이 많은 편이었다.
2019년 신규 본인가를 취득한 3개의 부동산신탁사는 모두 증권사의 자회사이다. 신영부동산신탁은 신영증권(과반 이상 지분율)·유진투자증권이 합작했으며, 한국투자부동산신탁은 한국금융지주가 80%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대신자산신탁은 대신증권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 부동산신탁업계는 극심한 유동성 위기와 그에 따른 재무악화가 진행 중에 있다. 이전 글 <반복되는 부실의 역사, 아파트>에서도 2023년에 이어 2024년까지도 부동산신탁사는 PF부실사업에서 부족한 유동성을 보충해야 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대주의 손해를 보전해줌으로써 영업손실을 확정하는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14개의 부동산신탁사 중 어느 하나가 부도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2000년대 이후 부동산신탁사에 취업·근무한 이들이 생각하는 부동산신탁업계는 적자를 모르는 안정적·보수적 산업이었다. 하지만 20여년 넘게 이어진 견고함이 무너져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2년이다. 논어에 다음의 문장이 있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 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알면 마땅히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과거의 지식·고전이 가르침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흔히 사용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위 문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옛 것에서 배워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라는 의미이다. 핵심은 지나간 과거를 그냥 흘려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타임라인을 길게 펼쳐보면, 현 부동산신탁사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한신부동산·한국부동산신탁이 부도사태를 겪었고, 많은 교훈들을 남겼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현재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시장위험요인이 다시 한번 부동산신탁업계를 위협하고 있다. 돌아봐야 할 과거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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