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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투자

오래 전 글로 피어난, 파주

by Spacewizard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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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파주출판도시(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가 나오는데, 2007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당시 주말이면 친구와 함께 파주출판도시로 드라이브를 다니곤 했다. 나름 부동산개발 분야에 종사한다고 당시 핫했던 타운스우스 「헤르만하우스」를 둘러 보면서 시시콜콜한 평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파주에는 볼 만 공간이 꽤 생겼었는데, 그 중에는 「헤이리예술마을」도 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주택공급, 1기 신도시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6년부터 몇 년간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에 힘입은 전례없는 활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사회전반으로 번진 호황은 부동산시장 내 아파트가격을 급등시켰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수도권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이었는데, 1988년 9월 노태우 정권은 「200만호 주택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1990년 전후 국민학생·중학생 시절, 신문지상에서는 「베드타운」이라는 용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언론은 정부가 계획한 신도시가 잠자는 공간이라는 점을 비판하기 바빴다. 물론 정부도 신도시가 최소한의 자족기능을 충족하면서 충분한 주택공급을 할 수 있도록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시장에서의 공급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었기에, 다양한 용도(주거·상업·산업 등)를 고려한 마스터플랜보다는 신속성에 주력해야 했을 것이다.

 

출판 생태계의 개선, 출판도시

 

출판의 생태계는 집필·생산·유통 단계로 구성된다. 생산은 3사(출판사·인쇄사·제본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생산 3사가 모두 흩어져 있었다. 당시 출판사(편집·기획 담당)은 주로 서교동에 위치했었고, 인쇄사·제본사는 제지·기계회사들이 밀집한 을지로에 밀집해 있었다. 유통을 담당하는 총판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이에 따라 출판업계는 생산·유통의 생태계을 한 공간에 모을 필요가 있었고, 총판까지도 일원화하고자 했다. 1989년 출판인 단체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출판도시를 건설한 계획을 세웠고, 1990년 10월 360개사(출판사 263개)가 출판도시 건설을 목적으로 한 조합(출판도시조합)을 설립했다. 조합은 70억원 가량의 사업기금을 마련했고, 그 대상지는 일산신도시로 했다.

 

신도시 개발은 「택지개발촉진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개발목적은 주택건설용 택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출판도시와 같은 산업단지는 신도시 개발에서 우선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약 11만평 가량의 업무지구(일산신도시 동쪽)을 염두하고 있었던 출판도시조합은 여러 면(용도지정·분양가·배정우선권 등)에서 신도시 개발주체인 한국토지개발공사와 이견을 보였고, 결국 1994년 7월 일산신도시 내의 출판도시 건설계획은 무산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주거인프라(주거·상업·공원)에만 치우친 일산의 동쪽에 출판도시가 들어섰더라면, 서울·일산의 중간지대에 괜찮은 산업특구가 하나 생겼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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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의 교류를 위해 조성된, 통일로

 

조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통일로(統一路)는 서울역에서 판문점(개통 당시에는 문산)까지의 도로로, 아시안하이웨이 1호선과 1번 국도의 일부구간이다. 아시안하이웨이 1호선은 도쿄를 출발점으로 하여 한국-북한-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미얀마-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터키-불가리아 국경까지 연결되는 도로이다. 2010년 의주로를 통합하기 전까지 통일로의 기점은 홍은사거리였으며, 서울역-홍은사거리 구간이 원래 의주로였다. 조선시대 의주로는 9대 간선로 중 하나로,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였다.

 

통일로는 1970~80년대 파주로 가는 유일한 고속화도로였는데, 그 길의 탄생에는 범상치 않은 두 인물이 있다. 1971년 10월 초 박정희는 정주영(현대건설 회장)과 함께 차로 문산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대략 2달 내(정확히는 12월 5일까지)에 서울-문산을 잇는 4차선 도로를 만들 수 있을지를 물었다. 이에 정주영은 4개 건설사(현대건설 포함)라면 가능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라면 우문으로 들렸을텐데, 정주영은 대통령에게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4개 건설사(현대건설·대림건설·동아건설·삼부토건)은 공동으로 40km의 4차선 고속화도로를 만들었는데, 착공 후 불과 45일 만에 전국간 완공한 초단기 도로공사였다. 

 

현대건설 60년사」에 따르면,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제시한 완공일인 1971년 12월 5일은 북한의 남북적십자회담 방문단이 서울에 방문하기로 한 예정일이었다고 한다. 지난 여름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KBS방송을 통해 남북이산가족찾기를 위한 회담개최를 북한에 제안했는데, 이틀 후 북한이 평양방송을 통해 제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1971년 12월 5일에 북한 방문단이 서울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어느 매스컴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1971년 9월부터 1972년 8월까지 총 25차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지만, 1971년 12월에는 3일날 11차 회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통일로는 남북간의 치열한 대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그 결과물인 공동성명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공사일 수 있다. 결국 통일로가 완공된 지 7개월이 지난 1972년 7월 4일 다음과 같은 통일의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담고 있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원칙1.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원칙2.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원칙3.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통일과 신도시에 대비한, 자유로

 

자유로는 가양대교 북단에서 자유IC(임진각)까지 연결되는 고속화도로로, 임진각 내에 있는 「자유의 다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최북단을 종점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통일로와 함께 자유·통일을 상징하고 있으며, 실제 자유IC에서 통일로와 합류하여 통일대교로 이어진다. 통일 및 경기 서북부의 개발(일산신도시·통일전망대 등)에 따른 도로수요를 대비하여 전구간 왕복 10차선 규모로 건설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군인이 투입하여 노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로 일대의 상당부분이 접경지대·군사구역이었고,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쓰여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고양·파주는 홍수로 유명한 저지대였는데, 홍수 방지를 위해서라도 한강제방을 높이 쌓아서 그 위에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또한 덤으로 자유로가 생기면서 한강·임진강과 하천이 만나는 접점에 습지가 생겼다. 이는 서울개발 과정에서 알게 된 한강제방도로(강변북로·올림픽대로) 건설에 따른 공유수면 매립을 활용할 기회가 생긴 것을 의미했다.

 

도시가 아닌, 파주출판도시

 

1970~90년대 토지개발 목적은 최대한 많은 규모의 부지면적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기존의 지형을 깎거나 공유수면을 매립한 후 형질변경하는 방법이 주로 쓰였다. 물론 자유로 건설로 인해 만들어진 습지도 부지조성을 위해 매립되는 것이 우선 고려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단체의 반대로 습지는 보존하는 방향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토지개발공사는 출판도시조합에 문발리(文發里) 습지를 추천하여, 하천흐름에 따라 출판단지의 주요축과 토지이용이 결정되는 도시설계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습지자생식물을 조경용으로 식재하고, 높이를 규제(4층 이하)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기존의 자연을 살린 도시개발은 기존의 개발방식과는 달리 자연친화적이었다.

 

하지만 파주출판도시도 사실상 실패한 개발사례에 가까운데, 이는 산업 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을 적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도시와 달리 주거·상업 기능이 크게 부족한 파주출판도시는 퇴근시간 이후에는 공동화된다. 사실 누가봐도 출판도시가 아닌 「출판단지」인 것이다. MBC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한정원(김현주 분)과 송승준(김석훈 분)이 셔틀버스를 타고 근무지인 파주출판도시 내 출판사(지혜의 숲)로 통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심공동화도심인구가 주변지역으로 이동하여 도심의 상주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데, 일명 도넛현상(doughnut phenomenon) 이라고도 한다. 중심지(도심)와 주변지 간의 지가(地價) 차이가 인구이동을 야기하는데, 최근 서울인구가 경기도로 빠져 나가는 현상도 무관하지 않다. 인구가 빠져나간 중심지는 토지이용효율·활동성이 저하되면서 우범화되는 경향이 있다. 주변에 거대한 도시를 둔 소규모 파주출판도시의 공동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물론 지가 차이가 아닌 기능의 상실로 인해 한 순간 공동화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전 글 <밤과 행정이라는 과일의 도시, 과천>에서는 세종시의 탄생으로 행정기능이 일시에 이탈한 과천의 공동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오래 전부터 글과 관련된, 명당

 

1452년 89세의 황희가 세상을 떠나자, 문종은 황희의 장례가 치러진 탄현면(炭縣面) 금승리에 행차했다. 참고로 고양 탄현(炭峴)은 「숯고개」를 의미하는 탄(炭, 숯)과 현(峴, 고개)을 사용하는 반면, 파주 탄현은 현(縣, 고을)이 쓰인다. 한성으로 돌아오던 문종은 황희를 기리는 뜻에서 당시 교하현의 한 마을에 문발(文發, 글이 피어오르는)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55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글을 모아서 담아내는 출판생태계가 조성되었으니, 참 희안한 우연이다. 파주출판도시(현 문발동)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심학산이 위치한다. 심학(尋鶴, 학을 찾은)은 궁궐에서 도망친 학이 잡힌 곳이라는 구전이 있으며, 요즘도 겨울이면 많은 재두루미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이름이 바뀐 심학산은 원래 「한강물의 범람을 막는 산」이라는 의미에서 수막산(水漠山)으로 불렸는데, 당시 이 지역에 홍수가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학산은 한강·임진강·김포·황해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으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소문이 많았으며, 심지어 밤중에 몰래 묘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자유로 주변 문발동/갈현리 [지도:투어링위키]

이전 글 <공천권을 두고 시작된, 붕당정치>에서는 1611년 대북파 리더 정인홍이 상소한 회퇴변척이 실패함에 따라, 이후 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언급했었다. 그래서 였을까. 1612년(광해군 4) 이의신(역술관)은 임진왜란·모반이 잇달아 일어나는 이유로 한양의 쇠한 지기를 들며 도읍을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광해군은 천도에 동의했었는데, 이는 회퇴변척으로 인한 대북파의 위기감과 함께 정씨왕조설에 대한 소문과 임진왜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왕권강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명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천도예정지로 갈현리(葛峴里)를 유력하게 보는 의견이 있는데, 실제 교하천도를 논할 당시 교하군 읍치는 갈현리에 있었다고 한다. 과거 칡넝쿨이 많은 곳은 갈(葛, 칡)과 현(峴, 고개)을 합쳐 갈현(葛峴)이라는 지명으로 많이 쓰였고, 「가루고개·가루개」라고도 불렀다. 삼학산에는 고인돌도 꽤 남아 있다니,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본능적으로 명당을 알아봤나보다.

 

갈현리에 장릉(長陵, 인조 능)을 조성할 당시, 왕에게 보고된 풍수기록에서 갈현리가 길지임을 알 수 있다. 한북정맥에서 분맥한 오두지맥의 지기가 문산천·공릉천이 호위하고 있는 월롱산에 모여 갈현리로 내려와 강한 기를 갖고 있는 용맥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릉 중에는 다음과 같이 3개의 장릉이 있다.

 

영월 장릉(莊陵, 글 장) : 단종 능

김포 장릉(章陵, 장중할 장) : 원종(인조 부) 능

파주 장릉(長陵, 길 장) : 인조 능

 

광해군이 천도를 원했던 길지에 차기왕 인조가 묻힌 것이다.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파주가 상당히 북쪽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선시대 지도상으로는 중간 정도의 지점이었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의 남쪽 지방이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 방북 당시, 파주 일대는 부동산가격 상승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통일시대에는 파주가 북한과의 교류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지역가치가 높아질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지나서보니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언젠가는 다가 올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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