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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에서 중공업으로, 두산

by Spacewizard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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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전략컨설팅펌 맥킨지(McKinsey)의 컨설팅을 받은 두산은 소비재 위주에서 중장비·발전소 중심으로의 사업 포트폴리오의 전환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OB맥주·코카콜라·버거킹·KFC·한국네슬레·한국3M 등을 매각하였다. 그 매각자금으로 한국중공업(훗날 두산중공업, 현 두산에너빌리티)과 대우종합기계(훗날 두산인프라코어, 현 HD현대인프라코어), 밥캣을 인수할 것을 조언했으며, 두산은 이를 실행했다. 컨설팅 당시 4조원대였던 매출이 12년이 지난 2008년에는 약 24조원까지 상승하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북미·중국 건설기계시장이 침체되면서 두산그룹은 위기를 맞았지만, OB맥주는 지속적인 매출성장세를 이어갔다. 두산그룹의 밥켓 인수는 오랫동안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지만, 역시 경기는 사이클이다. 최근 북미 건설기계시장의 호황단계에 접어들면서, 두산밥켓은 보유 중인 현금성 자산을 활용하여 인수합병(M&A)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미 두산밥켓은 소형 굴착기와 유압부품의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기업인수에 나섰다. 오늘은 두산그룹의 시작과 훗날 겪은 고난의 여정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정답인가 참고자료인가, 컨설팅

 

컨설팅펌이 제공한 보고서는 참고자료 정도로만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현실에서 컨설팅은 경영진들의 의사결정을 드레싱하여 책임을 덜어주는 역할이 크기 때문에, 결국 컨설팅의 결과는 대주주·경영진의 의사가 반영된 경우가 많다. 물론 외환위기 이전에는 국내기업들이 외국계 컨설팅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하우스(In-house)에서 대안을 제시해 줄 만한 인력·시장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점차적으로 대기업급에서도 자체적으로 대안을 낼 수 있는 인하우스 역량을 갖추어 왔지만, 컨설팅펌에 대한 맹신이 사그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화려한 커리어를 갖춘 엘리트들이 제시해 주는 대안이라면, 속는 셈 치더라도 한번쯤 들어보고 싶은 것이 경영진의 마음일 것이다. 2012년 삼성 금융계열사로 이직했을 당시, 자산운용본부 내에 해외인력 TO가 할당되어 있었다. 아마도 외환위기 이후 인하우스 기획역량을 보강하려는 그룹 차원의 HR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솔직히 효과는 의문이다. 물론 그룹 차원의 경영진단과 더불어 외부컨설팅(BCG코리아)을 병행하면서, 경영방향을 중첩적으로 크로스체크하던 점은 인상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 LG전자도 맥킨지에 경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맡겼는데, 휴대폰 시장의 거대흐름을 놓치면서 거액(300억원 가량)의 자문료를 무색하게 했다. 2007년 취임한 남용 부회장은 맥킨지 컨설팅 결과에 따라 기술전문기업에서 마케팅전문기업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맥킨지의 마케팅 전문가와 외국인 경영진을 영입하고, 연구개발(R&D) 인력을 마케팅 분야로 배치했다. 마케팅 비용을 늘리는 대신 R&D 비용을 줄이는 과정에서, 스마트폰 기술 개발 및 시장 진출이 늦어졌다. 2010년 구본준 부회장이 경영을 맡고서야, LG전자는 맥킨지의 조언에서 벗어나 현장·기술 중심의 자체경영에 돌입했다.

 

고난의 시작, 인수합병

 

2007년 두산인프라코어는 미국 잉거솔랜드(Ingersoll Rand)로부터 건설중장비 사업부문 밥켓(Bobcat)을 약 49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세계 6위권 건설중장비 기업으로 도약했는데, 이는 국내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인수합병이었다. 인수자금의 80% 수준인 39억 달러 가량을 타인자본으로 조달하였기에, 자칫하면 부채의 늪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수 이듬해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중국건설경기가 악화되었고, 두산밥켓의 3개년(2008~2010년) 누적적자가 1.2조원이 넘어서면서 승자의 저주에 빠지게 된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경쟁에서는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비용지출로 인해 오히려 위험에 빠진 상황을 의미한다. 이후 두산은 그룹 차원의 유동성 위기와 함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울 때 팔았던 우량기업, 재매입

 

2020년 두산중공업이 모트롤BG를 물적분할한 뒤, 국내 PE컨소시엄(소시어스PE-웰투시인베스트먼트)에 4,530억원에 매각한 바 있다. 유동성 위기 상황에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매각이었다. 소시어스PE와 웰투시인베스트먼트는 각각 산업은행 출신의 이병국과 금호아시아나그룹 출신의 정승원이 설립한 사모펀드운영사다. 두 회사는 공동투자를 통해 2018년 HSD엔진(옛 두산엔진) 인수딜을 진행한 바 있었다.

 

1974년 동명중공업에서 출발한 모트롤은 민수부문(민간에 필요한 굴착기용 유압기기 등 제조)와 방산부문(K9자주포 포탑구동장치 등 생산)을 운영하고 있다. 2023년 6월 모트롤이 2개(민수·방산)의 법인으로 분할이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민수부문의 분할이 매각 목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나, 결국 2024년 두산밥캣이 모트롤의 민수부문을 2,460억원에 다시 인수하기로 했다. 소시어스PE-웰투시는 남은 방산부문은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경성 3대, 상인자본


1911년 시사신보는 50만원(현재가치 약 600억원 이상) 이상을 소유한 조선인 자산가 32명을 보도했는데, 대부분이 왕족·친일대관·거상들이었다. 익숙한 이름으로는 박영효(철종 사위)와 이완용·송병준·민영휘·민영달가 있으며, 거상으로는 김진섭(마포)·백윤수(종로)·김여황(개성)·강유승(진남포)가 있다. 백윤수는 조상 대대로 종로 육의전에서 견직물 시전을 이어온 거상이었다.일제강점기 초기 경성 3대 상인자본이 있었는데, 자본규모로 백윤수·김연수·박승직이었다.

 

1864년 박승직은 경기도 광주에서 박문회의 3남으로 태어났는데, 당시 소작농 박문회는 임의실(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에서 여흥민씨의 논 15마지기를 소작하고 있었다. 민영완은 소작농 아들 박승직을 총명하게 여겨, 1881년 해남 사또로 부임하면서 17살의 박승직을 책실(비서)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전 글 <누군가는 억울할 수 밖에 없는, 사법>에서 지방에 파견된 문무관리를 의미하는 사도가 변음하여 사또가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귀향한 박승직은 20대 초반에 포목행상을 시작했는데, 산골에서 싸게 구입한 베를 한성에서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1889년 한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방방곡곡을 행상으로 누빈 끝에, 1896년 33살의 박승직은 배오개(梨峴·이현, 현 종로4가)에 박승직상점을 개점했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명동 중국대사관 뒤쪽에서 세종호텔 뒷길까지 이어진 고개길(현 충무로2가)를 진고개(泥峴·이현)이라 언급했는데, 이 때의 니(泥, 진흙)와 이(梨, 배)는 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다르다.

박승직상점
박승직상점 1층 소매부 [출처:두산]

박승직은 포목도매의 성장과 함께 지방지점들을 통해 판매망을 넓히면서 품목을 다양화했는데, 여기에는 박가분도 포함된다. 처음에는 정정숙(박승직 부인)의 제안으로 단골선물용으로 여성용 분을 만들자고 했는데, 분가루가 갑자기 큰 인기를 얻으면서 1916년 정식상품으로 팔게 된 것이다. 1920년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상표등록된 박가분(朴家粉)식산국으로부터 화장품 제조등록 제1호를 취득하면서 국내 최초의 공산품 화장품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 전후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경영난에 봉착했으나, 1925년 기업공개(IPO)를 통해 외부투자를 유치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1931년부터 박승직상점은 다시 높은 수익을 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제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하게 된다. 훗날 두산이 맥주산업을 주도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1930년대 들어 박가분은 성분으로 인한 안전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제조점포 마저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1937년 박가분은 생산이 중단된다. 이는 연구개발에서 뒤처진 박가분이 상품경쟁력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은 납성분이 함유되지 않은 무연백분이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트 박두병으로 시작된, 두산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훗날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박두병은 조선은행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조선은행 입행은 일본인에게도 어려웠기 때문에 부친의 청탁으로 성사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개인적인 능력만 놓고 보아도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두병의 진로·경력으로 비춰 보아, 박승직은 박두병으로 하여금 가업을 이어가게 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6년 4년 간의 행원생활을 끝내고, 박승직상점의 임원으로 취임한다. 물론 박두병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무력감과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행 내에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직위는 대리급이었는데, 대부분의 조선인 조선은행원들은 직급에 연연하지 않은 채 적지 않는 월급에 만족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오히려 일제를 상징하는 기관에서 근무한다는 자만심으로 경제적 약자인 조선인들을 핍박했을지도 모른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경제적 약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고태수가 조선은행 군산지점 대리인데, 승진 가능한 최고지위까지 오른 조선인 고태수의 삐뚤어진 권세가 느껴진다.

 

박승직은 자신이 물러난 후의 상호에 대해서 박두병에게 언지했다고 하는데, 박두병의 가운데 글자 두()와 뫼 산(山)을 합쳐서 두산(斗山)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1946년 봄 상점상호를 박승직상점에서 두산상회로 변경했는데, 박두병이 조선은행을 퇴직한 지 10년만이었다. 박두병이 경영한 10년 동안 박승직상점은 큰 성장을 구가했는데, 밤마다 이불 속에서 미국 라디오를 들으며 해외시장정보를 분석하여 가격과 수요·공급을 예측했다는 부분이 인상깊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당시 정보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컸을 것이다. 해방 후 박두병(박승직 장남,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종업원들에 의해 소화기린맥주(훗날 동양맥주·오비맥주)의 관리지배인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2월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상호를 동양맥주(東洋麥酒, Oriental Brewery)로 바꾸었고, 영어약자 OB를 상호로 사용했다.

 

어릴 적부터 두산은 낯설지가 않다. 할아버지댁이 있던 경상남도 진동에는 두산유리(훗날 두산포장·두산테크팩) 공장이 있어, 몇몇 친척들이 두산직원이었다. 1998년 두산제관·두산유리의 합병으로 진동공장은 군산으로 옮겨갔고, 상호도 두산포장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두산유리 공장부지에는 아파트(한일유엔아이)가 들어서 있다. 1984년 5월 어린이날, 두산유리에 다니던 고모는 유치원생인 나(조카)를 위해 두산베어스 티셔츠·싸인볼을 선물해줬다. 그리고 프로야구(아마도 롯데자이언츠:두산베어스)를 관람하기 위해 마산공설운동장에 갔었는데, 어린 마음에 2번 놀랬었다. 하나는 엄청난 인파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많은 인파에서 두산을 응원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사실이었다. 마산은 부산과 함께 롯데자이언츠의 연고지로 유명했지만, 유년시절의 나는 고모와의 의리 때문이었는지 두산베어스를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청소년기 이후로는 롯데자이언츠와 NC다이노스로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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