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

by Spacewizard 2023. 3. 29.
728x90

병사들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설치된, 일본 화류계

예술적 면모와 비밀유지를 능한 게이샤, 쿠데타에 기여

조선시대 관기 비중이 높았으며, 주로 삼패기생이 방기 노릇

조선의 기생문화와 일본의 접대문화가 합쳐진, 요정(요리집)

전쟁 이후에도, 정치공작·비밀회동·불법청탁의 공간으로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UCxjU8RgC80

 

개인적으로 음주를 즐기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집의 역사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술집의 기원과 변천사에 대해 정리를 하다보니, 그 내용이 시대별·지역별로 워낙 방대하여 도저히 한번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오늘은 조선의 근대화와 함께 이 땅에 정착한 술집에 대해서 일단 해보자.

임진왜란을 앞두고 위안을 제공한, 일본 화류계

임진왜란 침략 3년 전인 1589년 교토는 남초현상으로 노총각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유곽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바로 일본 공창제의 시작이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교토유곽은 나가사키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전쟁을 앞두고 병사들의 성욕를 해소시켜 사기를 증진시키려는 의도였다. 워낙 많은 꽃과 버드나무가 있는 나가사키의 유곽이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형색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러한 유곽을 화류계(花柳界)라 불렀다고 한다.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으로 전해지면서 한국인도 즐겨 부르게 된다. 이후 공인된 유곽에 소속된 오이란(매춘부)는 일본인들의 성적 해방구 역할을 하게 된다.

꽃과 버드나무에서 유래된 화류계
꽃과 버드나무에서 유래된 '화류계'

쿠데타에 기여한, 게이샤

 

17세기 초반 유곽에서 최초의 게이샤(공연가)가 등장하는데, 오이란과 달리 남성이었다. 이후 인기 없는 오이란이 게이샤로 나서면서, 여성게이샤가 남성게이샤를 압도하는 동시에 오이란의 고객들까지 확보하였다. 17세 후반 강력한 중앙집권통치를 등에 업고 조닌(상인계층)이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소비처가 마땅치 않아 (性)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당시 유곽은 물론 야설·춘화·가부키가 큰 유행을 했다고 한다. 1779년 정부는 게이샤를 공식적인 직업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매춘행위를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게이샤의 인기는 떨어지게 되었지만, 예술인으로 이미지가 승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50년에 걸친 억압적인 쇼군정치에 염증을 느낀 하급 사무라이들은 쿠데타(유신)을 계획하게 되는데, 비밀리에 회동하여 모반을 도모할 장소가 필요했다. 당시 비밀회의 장소로는 게이샤 찻집 만한 곳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게이샤들은 비밀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쇼군통치의 막을 내리는데 있어 게이샤가 기여하면서, 게이샤들의 지위가 높이지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기생, 공노비

조선시대 공노비에는 2종류(선상·납공)가 있었다. 선상노비는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면, 납공노비는 공물납부의 의무를 지는 노비였다. 선상노비 중 하나였던 관기(官妓)법적으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생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민간기생 보다는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관기생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실 관기와 관비(공노비)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는데, 관아에서 임의적으로 관비를 관기로 만들기도 하고, 관기를 다시 관비로 내치기도 했다고 한다. 흔히 관기가 늙거나 병이 들면 다시 관비로 돌렸다. 「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도 관기였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 언급한 연방원에 모은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모아 왕실기생으로 삼았다고 언급했었다.

지역에 따라 기생의 등급이 달리 하기도 했는데, 서울기생(경기, 京妓)와 지방기생(관기)로 구분되었다. 관기 중에서 경기로 차출되는 경우, 이 기생을 상기(上妓)라 했다고 한다. 관기가 주로 지역고관의 잔치에서 활약했다면, 경기는 주로 궁중잔치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경기·관기 모두 행사가 자주 있는 편이 아니라서, 주업은 차라리 접대부에 가까웠다고 한다. 흔히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렀는데, 다분히 남성이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급이 낮은 삼패기생(일패·이패에 비해 급이 낮은 하급기생)은 사신·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방기(房妓) 노릇을 해야 했는데, 당시 어명으로 지방시찰 중인 봉명사신의 객고를 풀어주기 위해 방기를 두었다고 한다.

728x90

구한말, 요정영업의 시작

요정(料亭)은 기생을 두고 술·요리를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조선의 기생문화와 일본의 접대문화가 합쳐진 형태였다. 조선시대 진고개(泥峴, 이현)는 명동 중국대사관 뒤쪽에서 세종호텔 뒷길까지 이어진 고개길(현 충무로2가)이었다. 당시 남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현재의 명동·충무로 일대에 언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높은 고개가 아니었음에도 흙이 매우 질어서 통행이 불편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진고개 근처를 남산골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하급관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상인 10여 명이 일본공사관(현 예장동)이 위치한 진고개 일대에 자리 잡은 후, 1884년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1885년 진고개 일대(현 충무로1가·예장동·주자동)의 일본인 거류구역 지정이 있었는데, 이는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진고개는 일본에서 들여온 근대적 상품의 전시장이었는데, 일본 요리집·과자집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887년경 진고개 근처에서 최초의 일본식 요정정문루(井門樓)가 개업하였는데, 술·요리·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은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가게이름에 정·루를 붙힌 고급요릿집들이 속속 개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화월루·청화정·개건정·송본루·남산정 등이 있었다. 1900년 송병준이 개업한 청화정(淸華亭)에서는 밤마다 친일파들이 회동하여 스스로의 안위와 함께 매국을 논의하면서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왕실문화를 표절하면서, 요정의 전성기

경성에 요정들이 번창하는 가운데, 1903년 9월 공무원(전환국 기수)이었던 안순환이 명월관(明月館)을 오픈했다. 2층 양옥 형태였던 명월관의 위치는 세종대로 사거리 남동쪽(현 동아일보 사옥 터)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 궁내부가 폐지되면서 황실 소속이었던 요리사를 고용하면서, 조선요리(한정식)을 개발했다. 명월관 이전에도 요릿집은 여러개 있었지만, 수라에나 오르던 음식을 일반에게 제공한 곳은 명월관 뿐이었다고 한다. 1908년 대한제국은 외식사업으로 성공한 안순환을 전선사 장선으로 채용했다. 전선사(典膳司)는 궁중음식 담당부서였고, 장선(掌膳)은 전선사의 책임자(정6품)였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중기녀들도 2년 전 궁중요리사처럼 명월관으로 흘러 들었다. 관기제도 폐지로 관청에서 풀려난 기생들은 권번(사설기생조합)에 적을 두고 있다가, 고급요릿집(명월관·국일관·장춘관·고려관 등)에서 부르면 출장을 나갔다. 특히 명월관에는 인물·기예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아,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는 사교무대가 되었다. 당시 기생은 술자리에서 연주·춤·노래를 공연하고 시문을 지어 흥을 북돋는 역할을 하였다. 비싼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층 남성들이 고급요릿집을 주로 이용하다보니, 요정은 서민남성들에게 선망의 공간이었다. 명월관은 한국전쟁 중에 화재로 전소하게 된다.

2층 양옥식의 명월관
2층 양옥식의 명월관

공작정치의 공간, 또 다시 전성기

한국전쟁 이후 현대화된 모습의 요정이 생겨나면서, 요정문화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만 이 시기에는 기예로 흥을 돋우던 권번기생이 아닌, 술접대를 위주하면서 희롱의 대상이 되는 화초기생들이 주류였다. 정숙했던 요정의 본래 모습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5.16 쿠데타 성공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민정이양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만들고 대학교수들을 창당요원으로 선발해 창당교육을 실시했는데, 그 비밀장소가 춘추장(종로 낙원동)이었다. 앞서 일본의 개혁세력들이 비밀회동 장소로 게이샤의 찻집을 이용했듯이, 비밀스럽고 은밀한 정치공작의 장소로 요정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정치판의 비밀·고급스런 정보가 오가는 공간, 출처가 베일에 싸인 검은 자금이 거래되는 공간, 그리고 목적이 성사된 이후에는 술자리와 함께 잠자리로 이어지는 안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요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절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전 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의 공간들>에서 언급한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감시와 노련한 마담의 엄한 입단속 지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정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편안한 비밀공간으로 자리 잡자, 1960~1970년대 요정정치는 왜곡된 한국정치의 한 전형으로 굳어져 갔다. 그 시절 요정에는 정치인 외에도 당대의 실세(군장성·고위공직자·재벌 등)이 모여서 협잡·야합과 향응·접대를 통한 부당거래를 나눴는데, 세간에는 아래의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한다.

"역사는 밤에 이뤄지고, 정치는 요정에서 이뤄진다"

 

그러던 차에 '정인숙 사건'이 터지면서, 베일에 가렸던 요정의 실체가 알려지게 된다. 요정의 사회적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커졌지만, 그럴수록 요정은 은밀한 방식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1970년대 서울의 요정은 비밀요정을 포함해 100여 곳에 달했고, 그 중 접대부가 50명이 넘는 대형 요정은 1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 경제성장·유화조치(통행금지 해제 등)로 룸살롱(현대판 요정)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 때부터는 룸살롱에서 비밀회합이나 불법청탁이 이뤄졌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는 룸살롱의 변형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Music] 화창한 날의 몽상

https://www.youtube.com/watch?v=1IVaxBjOJSM

Reverie on a Sunny Day #화창한 날의 몽상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