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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잊혀져 있던 군정, 계엄

by Spacewizard 2024.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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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가동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VqAQZ3_fy3E

In Operation #가동상황

계엄(戒嚴, Martial law)군대를 행정·사법에 투입하는 국권발동을 말하며, 계엄령은 계엄을 선포하는 행정명령이다. 계(戒, 경계할)와 엄(嚴, 엄할)이 합쳐진 말로, 비상사태에 군대가 시민들을 엄격히 단속하고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에 의한 문민통제(civil control)을 기본으로 하며, 군사병력은 국민을 통치·통제하는 위치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전쟁·사변(내지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평시의 공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혼란·소요 ·일탈가 발생한다면, 정국안정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계엄을 통해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 계엄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군대가 치안을 맡으며, 추가적으로 군사·공안 목적으로 인원·물자의 동원이나 민간인 구금·체포 등의 물리력 동원이 가능하다.

 

해제 가능한 상태에 놓인, 계엄령


대한민국 「헌법」제77조와 「계엄법」에서는 계엄에 관한 사항은 정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지역·일시를 정하여 선포하고, 국방부장관·행정안전부장관이 이를 건의할 수 있다.

 

박정희가 시해된 1979년 10·26 직후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440일(1981년 1월까지)이나 지속되었으며, 그 후 40년 넘게 계엄선포는 없었다. 이는 1987년 개정된 현행헌법에서 계엄발동요건을 엄격히 했기 때문이다. 또한 계엄해제에 관한 국회의 사후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적의원 과반 찬성으로 계엄해제가 가능하도록 했는데, 현행헌법 제77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1. 대통령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2. 계엄은 비상계엄 경비계엄으로 한다.
3.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4.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5.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계엄령 하에서의 절대권력자, 계엄사령관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이 지정하며,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 경비계엄은 계엄사령관이 계엄지역의 군사에 관한 행정·사법사무를 관장하지만, 비상계엄「모든」 행정·사법사무를 관장함으로써 사실상 사법권·행정권이 대통령에게 귀속된다. 비상계엄 하에서는 군사법원이 일부 재판권을 가지는데, 내란죄·외환죄·국교관련죄·공안죄·폭발물죄·공무방해죄·방화죄·통화죄·살인죄·강도죄와 국가보안법 내지 기타 군사상 법령에 규정된 죄를 처리하게 된다. 비상계엄지역에 법원이 없을 경우에는, 모든 형사사건에 대한 재판을 군사법원에서 처리한다.

 

계엄사령관은 필요시 특별조치(체포·구금·압수·수색·거주·이전·언론·출판·집회·결사·단체행동)를 취할 수 있으며, 계엄지역에서 동원·징발도 가능하다. 부득이한 경우 국민재산을 파괴·소각할 수도 있다. 계엄사령관은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볼 수도 있는데, 이는 의정(議政)이 전시에 겸임한 최고군직이었다. 과거 사례를 보면 계엄사령관이 가장 우선적으로 행하는 조치는 국회의원 과반수가 모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이는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입법부 결의를 방해하는 행동이 위헌으로 판단될 경우에는, 사태수습 이후에 탄핵·내란죄를 추궁받을 수도 있다.

 

합동수사본부(합수본)계엄령 하에서 군·경찰·정부기관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특별기구로, 정부·군가 통제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는 군부 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정치체제를 장악하기 위해 합수본을 꾸렸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전두환(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정권이양 과정을 방해하면서 실질적인 국부독재권력을 장악했다.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결과를 중간발표 중인,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생각보다 많은, 계엄의 역사

 

1949년 11월 24일 「계엄법」이 제정되었는데, 계엄법 제정 전에 었었던 최초 2회의 비상계엄은 일본의 계엄령을 적용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총 17회의 계엄령(비상계엄 13, 경비계엄 4)이 선포되었으며, 한국전쟁 동안의 계엄은 전시계엄의 성격으로, 첫 전국 단위 계엄이었다.


1948년 10월 25일(비상계엄, 105일) : 여수·순천사건
1948년 11월 17일(비상계엄, 46일) : 제주 4.3사건
1950년 7월 8일(비상계엄, 126일) : 한국전쟁
1950년 11월 10일(경비계엄, 28일) : 한국전쟁
1950년 12월 7일(비상계엄, 123일) : 한국전쟁
1951년 3월 23일(경비계엄, 383일) : 한국전쟁

1951년 12월 1일(비상계엄, 130일) : 한국전쟁
1952년 5월 25일(비상계엄, 66일) : 한국전쟁(부산정치파동)
1960년 4월 19일(경비계엄, 4시간) : 4.19혁명

1960년 4월 19일(비상계엄, 51일) : 4.19혁명

1961년 5월 16일(비상계엄, 12일) : 5.16군사정변

1961년 5월 27일(경비계엄, 558일) : 5.16군사정변
1964년 6월 3일(비상계엄, 58일) : 6.3항쟁(한일협정 반대)
1972년 10월 17일(비상계엄, 69일) : 10월유신(대통령간선제)

1979년 10월 18일(비상계엄, 10일) :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27일(비상계엄, 456일) : 10.26사건(1980년 5월 확대)

2024년 12월 3일(비상계엄, 5시간 30분)

1년 넘게 지속된 계엄령이 3차례나 있으니, 당시 국민들은 얼마나 피곤하고 공포스러웠을까. 마지막 계엄령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지만, 검토했던 흔적들이 있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부는 계엄령을 통한 무력진압을 검토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국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수용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압박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었는데, 실제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세부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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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개헌 찬반 국민투표, 1975

 

계엄령이 선포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사건이 있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일자를 1975년 2월 12일로 정한 후, 투표일 2일 전에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는 말이 있다.

 

1974년 11월 최연소 야당대표 김영삼(신민당 대표)은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개헌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개헌추진위」를 조직하였다. 개헌운동은 사회 각 분야로 확대되어 재야인사·천주교도들까지 합세하면서, 야당·재야·종교단체로 구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조직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을 필두로 30여개의 언론사 기자들이 선언문을 채택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는데, 선언문의 내용은 정부간섭(정부기관원 출입 포함)과 불법연행 등을 거부하고 언론의 자유롤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4년 12월 20일 전후, 박정희의 지시로 동아일보·DBS(동아방송)의 광고가 대거 해약되었다.

 

하지만 곧 박정희가 당황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데, 백지광고를 대신하여 격려광고·성금이 전해진 것이다. 이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의 시국수습방안 중 하나인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1975년 1월 22일 TV연설에서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임을 발표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공산세력과 대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민투표 결과가 유신헌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기울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야당은 강하게 국민투표를 반대했다. 하지만 정부는 산하기관에 투표를 독려했고, 대학교수들은 유신헌법 찬성에 관한 칼럼을 작성했으며, 유신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까지 보급되었다. 찬반토론 없이 치러진 선거결과는 찬성 73.1%(투표율 79.8%)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은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오래된 평화가 가져 온, 망각

 

1987년 6월 19일 청와대에서는 제임스 릴리(주한 미국대사)가 전두환과 90분 면담을 나누고 있었다. 릴리는 전두환에게 미대통령(로널드 레이건)의 친서를 건냈는데, 그 서한에는 정치범 석방과 자유언론 신장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었기에, 이미 계엄령 경험이 있던 전두환은 언제든지 계엄령을 선포할 태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릴리는 계엄령 선포가 한미동맹을 해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사태 재발을 우려하는 말을 건내었다. 릴리와의 90분 면담이 끝난 후, 릴리는 외무장관으로부터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면담 내내 얼굴이 굳어 있던 전두환의 심정이 궁금하다. 계엄령이 해제된 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두환의 계엄령을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뼈 아픈 역사도 그렇게 쉽게 잊혀진다. 40여년 넘게 계엄령을 딴 세상 얘기로만 여겨 왔던 국민들은 과연 계엄령이 가지고 올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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