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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크리스마스 상징이 된, 나무

by Spacewizard 2024.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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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2024년에는 꺼내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가면서 트리에 대한 감성을 잃어갔고, 어른들도 자연스럽게 묻고 지나간 것이다. 어찌보면 아쉽겠지만, 이 또한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부분이다. 앞으로도 12월에 트리를 장식할 일은 없겠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의 의미는 한번 짚어보고 싶다.

 

1월 6일 주현절(주님공현대축일)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을 통해 메시아임을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고대 게르만족들은 성탄절·주현절 사이의 12일 밤 동안 푸른 나뭇가지를 집 안에 걸어두는 풍습이 있었는데, 촛불을 밝힌 상록수로 예수를 집 안으로 모셔와서, 모든 악령(불안·불화·질투 등)을 집에서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사용되는 전나무는 생명나무·낙원나무·선악나무로 여겨졌으며, 이는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의 탄생을 의미했다. 붉은 구슬은 나무에서 열리는 생명의 열매(사과·호두)를, 하얀 구슬은 원죄를 씻기 위해 희생한 예수의 몸을 의미한다. 트리를 장식하는 전구에는 다음 5가지 색상이 사용되는데, 각기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흰색 : 예수의 부활

녹색 :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빨간색 : 예수의 피
파란색 : 예수의 새벽별

노란색 : 동방박사가 건낸 황금

트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 독일 성령원

 

크리스마스 트리에 관한 기원설은 다양한데, 1419년 중세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성령원에 장식을 했다는 내용이 최초의 기록이다. 중세독일에서는 12월 24일 낙원연극을 공연했고, 무대중앙에는 사과·과자들로 낙원나무를 세워서 장식했다고 한다. 이 때 연극무대의 낙원나무가 훗날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중세독일에서 스피탈(spital, 성령원)은 양로원 내지 병원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낯선 손님의 방문에 대비하여 항상 3가지를 준비해뒀는데, 빵 한 덩어리, 양초 한 토막, 담요 한 장이다. 392년 기독교가 로마국교로 공인되면서, 재정지원을 받는 교회가 개별 기독교인들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면서 구호소가 생겨났다. 「구호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호스피탈리아(hospitalia)와 「방문객을 접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라틴어 호스페스(hospes)에서 유래한 영단어가 많은데, 호스피텔(hospital), 호스텔(hostel), 호텔(hotel), 호스피스(hospice, 여행자를 위한 수도원 숙박시설) 등이다.

 

종교개혁 전 트리기원 논쟁, 발트국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에 관하여, 에스토니아·라트비아가 각각 1441년(탈린 트리)와 1510년(리가 검은머리길드)를 주장하는 기원논쟁이 유명하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중간의 라트비아를 기준으로 북으로 에스토니아, 남으로 리투아니아가 위치한다. 2020년 김기덕 감독이 리가(라트비아 수도)에서 사망했다.

발트3국과 주변국 [출처:아틀라스뉴스]

1441년부터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시청광장에는 크리스마스 전후 1달 간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고 한다. 시청사는 1322년 이전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전에는 시장·축제장·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리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스톡홀름(스웨덴 수도)과 마주하고 있다.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알베르트 대주교가 검은기사단(십자군 일파)와 함께 닻을 내렸으며, 독일은 개종 명목으로 라트비아·에스토니아를 병합하여 리보니아 공국을 세워서 지배했다. 이후 수백년 동안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의 농노로 살았다. 15~16세기 리가도 한자동맹의 일원이 되면서, 발트해 연안의 해상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한자(Hansa)는 13~17세기까지 독일 북부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무역공동체로, 중세 독일도시에서 활동하던 상인조합을 이르던 한제(Hanse)에서 유래했다. 한제들은 동(발트해)·서(영국)로 영향력을 넓히고, 독자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교역로를 독점하면서 대항해시대 이전 중세유럽의 유력자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부를 축적한 리가는 8개의 탑과 요새(fortress)로 둘러졌고,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주변강국(독일·스웨덴·러시아 등)으로부터 외침을 당하며 성벽·건물이 훼손되었지만, 라트비아인들의 복원노력으로 지금까지 중세의 건물·거리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97년 리가의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리가에는 25개의 성곽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1698년(스웨덴 점령기)에 세워진 노란색의 「스웨덴문」만 남아있다.

 

1334년 세워진 검은머리전당(House of Blackheads)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시청과 마주하고 있는데, 15세기 아프리카·남미를 무대로 무역을 영위한 청년상인들이 결성한 「검은머리길드」의 조합건물이다. 성 마우리티우스가는 길드의 수호신이었는데, 검은 머리를 가진 흑인이었다. 1510년 겨울, 검은머리길드 회원들이 검은머리전당 앞에서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 파티를 즐긴 것을 시작으로, 리가의 트리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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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트리 기원, 마틴 루터

 

16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전역에서 트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중 「마틴루터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1521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루터는 숲길을 걷다가 달빛에 빛나는 초라한 전나무가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후 루터는 눈 쌓인 전나무가 마치 하나님의 모습과 같았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전나무를 집으로 가져와서 장식했다고 한다. 이때 전나무의 맨 위에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별을 장식했다.

 

1531년 독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프랑스에 속하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과거 프랑스·독일에 번갈아 속했던 대표적인 알자스·로렌 지역도시이다. 최초의 기록이나 발트국가에 대한 영향력, 종교개혁 발생지 등을 고려하면, 크리스마스 트리가 오늘날의 독일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독일풍습이었던 크리스마스 트리는 하노버 왕조의 영향으로 영국에도 전해졌으며, 19세기 앨버트 공(빅토리아 여왕 남편)의 영향으로 대중화되었다고 한다.성탄절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882년 에드워드 존슨(Edward Hibberd Johnson, 에디슨 동료)은 뉴욕 자택에서 최초로 전기로 밝힌 트리를 선보였다. 미국에서 트리용으로 널리 사용되는 구상나무(학명 Abies Koreana Wilson, 전나무 일종)의 원산지는 한국이며, 1920년 미국 식물학자가 제주도에서 처음 발견했다.

 

인류의 오랜 숭배대상, 나무

 

고대에는 어디서나 나무숭배사상이 존재했으며,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을 나무숭배에서 찾기도 한다. 바빌론 전설에는 죽은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 상록수가 솟아났는데, 이는 니므롯이 담무스 안에서 회생한 것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이전 글 <현대종교 뒤에서 여전히 숭배되는, 태양신>에서는 바벨을 건설한 니므롯과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 아들 담무스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고대종교에서는 상록수가 생명력의 상징이었으며, 이후 기독교가 동지·상록수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16세기 마틴 루터(Martin Luther) 기원설도 구전들의 재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대 북유럽(스칸디나비아)의 게르만족들에게도 상록수를 신성시하는 나무숭배는 보편적이었다. 4세기 이후 스칸디나비아의 이교도들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상록수가 크리스마스 축제의 일부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별·달·태양을 표현하기 위해, 도금한 도너츠·견과류·양초·사과들로 장식했을지도 모른다.

 

8세기 보니파스(St. Boniface)게르만족에게 유럽참나무(Oak, 오크나무) 숭배와 인신공양 풍습을 버리라고 설득하면서 오크나무를 도끼로 쓰러트리자, 그 자리에 어린 전나무(Fir)가 돋아났다고 한다. 이후 보니파스는 전나무를 예수의 나무라고 일컫으면서 기독교 상징물로 만들었다. 서양의 오크나무는 한국의 떡깔나무(Sweet Oak)와 엄밀히 구분되지만, 통상 오크나무도 떨깔나무로 번역된다. 과거 떡을 찔 때 떡 사이에 떡깔나무잎을 넣었는데, 두껍고 털이 촘촘한 떡깔나무잎이 떡끼리 달라붙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떡깔나무는 「떡 아래에 까는 잎」을 가진 나무였던 것이다.

 

구분이 어려운, 구과식물 

 

소나무과에 속하는 대표적인 나무로는 전나무·소나무·잣나무가 있는데, 모두 뽀족한 잎을 가지고 있으며 구과식물이다. 묶여나는 잎의 개수로 구분이 가능한데, 전나무·소나무·잣나무 각각 1개·2개·5개의 잎이 묶인다. 다만 잎의 길이는 잣나무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구과(毬果)목질의 비늘조각을 가진 방울열매로, 소나무의 구과가 솔방울이다. 전나무의 구과는 솔방울처럼 온전한 형태로 떨어지지 않고, 중심축 외의 실편·종자만 떨어진다.

 

잣나무의 구과는 솔방울보다 긴 편으로, 잣을 품고 있는 실편이 뒤로 젖혀져 있다. 보통 1개의 잣방울에서 100여개의 잣이 생산되며, 이런 잣방울이 만들어지기까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군복무 중이었던 2000년 가을, 행보관의 지시로 연병장 옆으로 늘어서 있던 커다란 잣나무를 긴 막대기로 털어서 잣방울을 떨어트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소나무·잣나무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잣방울에서 털어낸 굵직한 잣들의 진한 내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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