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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자연과 권력이 공존했던, 삼청동

by Spacewizard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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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좋아하는 길이 몇 개 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거주했었던 독립문 근처에서 시작하여 송월길·정동길을 거쳐 을지로1(프레지던트호텔~롯데백화점)까지 자주 걸었었다. 워낙 아기자기하면서도 클래식한 감흥을 주던 그 길 위에서의 추억을 생각하면 청춘이 떠오른다. 을지로 1가는 남북을 잇는 남대문로에 비해 유동인구가 적어서 한적한 분위기일 뿐 아니라, 마침 5년 동안 근무했던 직장건물도 있었다.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소공동 롯데 부지>에서 언급했던 미쓰이물산 경성지점도 을지로 1가 북측의 중간에 위치했었다.

 

삼청동도 여러모로 추억이 많은 공간인데, 특히 국군서울지구병원 자리가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현재의 국군서울지구병원이 리모델링하여 들어오기 전인 2010년까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사용한 건물이었다. 2005년 경 후배의 추천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일당 10만원이 넘는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 상시적 잡오퍼(job offer)는 아니었으며, 고등학생 전국모의고사가 치러지는 시즌(거의 매월 3~5일)에만 개별적으로 연락이 왔었다. 모의고사 OMR카드가 담긴 박스를 이동·정리하는 업무을 주로 했으며, 제한된 기간 동안 일을 마쳐야 했기에 야근도 종종 있었다. 당시 평가원 내부(건물·구내식당·정원)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 그 자체였지만, 특히 정원 위로 고요하게 내리는 햇살이 좋았다. 삼청동 끝자락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탓이다.

 

도교 흔적이 남아 있는, 소격동·삼청동

 

소격동의 가장 북쪽(삼청파출소 자리)에는 소격서 터가 있다. 소격서(昭格署, 구 소격전)은 도교 3청성신(三淸星辰)에 대한 초제를 집전하기 위한 관청으로, 쉽게 말해 하늘·신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초제(醮祭) 도사(道士)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해 여러 신에게 기도하는 도교의 제례의식으로, 초(醮)는 제단을 만들어 술·음식을 바치고 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도교와 관련한 관청이 있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왕실에서도 기복·흥망과 관련한 초제를 지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은 고려가 설치했던 도교시설을 대부분 폐지했지만, 소격서만 남겨두고 그 안에 도교삼위를 모신 삼청전을 세웠다. 성리학적 사회체계가 자리를 서서히 자리 잡으면서 도교경시풍조가 만연해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소격서가 혁파될 때까지 초제는 유지되었다고 한다. 삼청동이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는 다음의 2가지가 있다.

 

태청·상청·옥청 : 도교삼위(道敎三位, 도의 다른 3가지 모습)

산청·수청·인청 : 산과 물의 맑음이 사람마음까지 맑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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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에서 미술관까지의 과정에서, 보안사

 

소격동은 소격서에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현재 동 내에서 가장 비중 높은 공간은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지는 직전까지 남·북을 각각 국군기무사령부(구 국군보안사령부, 과천시로 이전)와 국군서울지구병원(삼청동으로 이전)이 위치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지는 원래 조선시대 종친부·사간원·규장각이 위치했던 곳이었다. 1928년경 일제는 고관대작을 위한 전용병원을 신축하기 위해 종친부를 동쪽(현 정독도서관 자리)으로 이전시킨 후, 2층 규모의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을 세웠다. 1930년대 3층으로 증축한 후, 해방 후인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병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남부권역은 보안사 본관으로 사용되었는데, 국군수도통합병원(전 수도육군병원, 훗날 국군수도병원)은 등촌동으로 이전했다. 북부권역에 대통령 전용병원으로 남긴 국군수도통합병원 분원이 국군서울지구병원의 전신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좌), 1930년대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우)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파사드는 1930년대 완성되었다. 이전 글 <한국인을 호화유람선에 살게한, 르 코르뷔지에>에서는 1928년 발표된 현대건축의 5형식 중에 자유로운 파사드가 포함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파사드가 그 초기형태로 볼 수도 있다. 지금봐도 세련된 클래식함이 느껴진다.

 

오르막 축대 출근길, 평가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과정 연구개발과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를 맡은 국책연구기관으로, 그 전신은 1985년 당시 문교부 산하 중앙교육연수원 평가관리본부에서 독립한 중앙교육평가원(훗날 국립교육평가원)이다. 1998년 청담동 청사에서 민간기관으로 출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1999년 삼청동 청사로 이전했다가, 2010년 4월 정동 청사와 2018년 2월 진천 충북혁신도시 신축청사로 이전했다.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11개 공공기관 중에서, 평가원이 10번째로 입주하는 것이다.


평가원 삼청동 청사는 원래 1970년 2월 설립된 중앙교육행정연수원 건물이었으나, 1999년 1월 수원 파장동으로 이전하면서 평가원이 사용하게 되었다. 1968년 영화 「단벌신사」에서는 연수원 정문으로 연결되는 오르막 축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데, 제법 큰 양옥건물들과 비포장도로가 인상적이다. 지금은 아무리 시골이라도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곳을 찾아볼 수 없지만,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 부자집 앞길도 울퉁불퉁 흙길이었다. 2007년 저 좁은 골목길에 주차하러 진입했다가, 막다른 길에서 후진으로 빠져나오려다 진땀을 뺏던 기억이 있다.

삼청로 10길 모습, 1960년대(위) 2020년대(아래)

전두환 권력의 시작, 삼청동

 

1980년 5월 전두환은 권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5·18은 성가셨을 것이다. 5월 4일 보안사령부에서 전두환은 시국수습방안 마련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으며, 5월 12일 시국수습방안을 확정한 보안사는 전두환에게 이를 보고했다. 시국수습방안의 크게 다음의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며, 5월 20일 이후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다고 한다.

 

비상계엄 전국적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하지만 예비검속 대상자를 확정한 전두환은 시국수습방안을 조기실행하고자 했다. 5월 17일 전두환은 전국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고, 하루에 2번 청와대를 방문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치인 연행·조사 계획과 비상계엄 전국 확대을 보고·요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최규하 압박카드가 전군주요지휘관회의 백지서명(白紙署名)이었다. 결국 5월 18일 0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공수부대(7공수 2개 대대)가 주둔하던 전남 광주에서 시민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전두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5월 19일 전두환은 보안사 기조실장을 광주로 파견하였고, 비상기구(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국보위 사무실은 삼청동 중앙교육연수원으로 결정되었다.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역임하던 시절이 1979년 3월부터 1980년 8월이었으니, 당시 소격동·삼청동은 전두환의 공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임시기구였던 국보위 설치명분은 다음과 같이 그럴듯 했다.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한다"

 

1980년 9월 2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확대·개편하였고,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8차 개헌(5공화국 헌법)을 통해 국회·정당은 해산되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는 헌법·법률상 국회의 권한을 부여받아 1981년 4월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6개월 동안 215건의 의안(법률안 189건 포함)을 의결하였는데, 국민기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에 위배하는 내용이 많았다는 평가이다. 지금이야 흔적을 확인할 수 없지만, 삼청동이 한때 민주주의의 악행이 일삼아지던 공간이었다.

삼청동과 소격동 위치 [지도:카카오맵]

삼청동은 의외로 도교의 중심지였으며, 도교사상에 걸맞게 조선 최고의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복궁의 좌측 근접권에 위치했던 만큼, 왕권과 밀접한 관청들도 밀집해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소격동에는 군권력의 중심이었던 기무사가 자리잡으면서 청와대를 보좌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비운을 틈타, 소격동 군권력이 나라를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삼청동은 잠시나마 국회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삼청동은 참 양극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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