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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조선여성의 핫플레이스, 숙정문

by Spacewizard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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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에서 회사교육의 일환으로 일주일간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수능을 앞둔 쌀쌀한 날씨에 낙엽이 흩날리는 삼청동 거리는 어디서든 운치가 있었지만, 한국금융연수원 후문 쪽 잔디밭은 마치 동화 속의 공간처럼 아름다웠다. 휴식시간이면 혼자서 산책로를 따라 후문 쪽으로 올랐었는데, 오후 석양에 반사되는 황금색 잔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전에도 11월 수능날 전후로 삼청동 감고당길을 즐겨 찾았는데, 늦가을의 찬바람과 청초한 경치, 그리고 길게 뻗은 석양은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 주었다. 그 시절 감고당길 끝에 있던 좁은 떡볶이집도 잊을 수가 없다.

 

골짜기의 업그레이드, 동천

 

조선시대 한성은 내사산(內四山, 백악산·인왕산·목멱산·타락산)에 둘러싸인 분지지형으로, 백악산은 다음 3개의 골짜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성 내사산과 외사산 [출처:통일뉴스]

삼청동천(三淸洞天) : 백악산 동쪽으로 흐름

백운동천(白雲洞天) : 백악산 서쪽으로 흐름
백석동천(白石洞天) : 백악선 북서쪽으로 흐름

 

중국에서 동(洞)은 바위굴에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거처할 만한 공간을 의미했다. 한반도에서도 오래전부터 골짜기(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자연부락을 동(洞)이라 불렀으며, 오늘날까지도 행정구역 단위로 사용되고 있다.근데 하천이름 옆에 천(川)이 아닌 천(天)이 붙은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동천(洞天)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나 신선이 사는 공간을 의미하며, 쉽게 말해 「수려한 골짜기」를 말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계곡을 놀이터 삼아 시를 읊으면서 놀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들을 신선급으로 격상시키고자 동(洞, 골짜기)라는 공간에 천(天)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동천(洞天)은 동천(洞川)·동문(洞門)보다 고상한 표현이라 생각하면 된다. 한성 내에는 다음의 5대 동천이 유명했는데, 이 중에서도 삼청동천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삼청동천

백운동천

옥류동천(玉流洞天) : 인왕산

쌍계동천(雙溪洞天) : 낙산 서쪽

청학동천(靑鶴洞天) : 목멱산 북쪽

 

한성 내 으뜸 골짜기, 삼청동천

 

백석동천은 홍제천으로 흘러든 반면, 삼청동천·백운동천은 개천(훗날 청계천)으로 흘렀다. 참고로 1914년 일제가 조선의 하천명칭을 정리하면서, 조선시대 내내 「개천」으로 불리던 하천을 「청계천」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사람들은 현재의 도시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도시는 과거의 도시 위에 세워진 것으로, 이는 도로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직선화되지 않은 도로는 과거 하천이 흘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삼청동삼거리에서 삼청공원으로 이어지는 차도와 세종대로사거리 북서쪽에서 세종문화회관 후문을 향해 난 사선도로는 각각 삼청동천·백운동천이 흐르던 자리였다.

 

삼청동천 상류 : 발원지에서 삼청동삼거리까지

삼청동천 중류 : 삼청동삼거리에서 동십자각까지

삼청동천 하류 : 동십자각에서 개천까지(중학·혜정교)

 

상류에 있었던 옥호정(玉壺亭)은 현재 칠보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별장으로, 김조순과 김유근(김조순 아들)의 소유였다고 한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는 정조가 김조순의 이름을 하사했으며, 임종 전에 순조를 부탁했었다고 언급했었다. 안동김씨를 세도가문으로 올려 놓은 김조순이 궁궐 근처에 별장을 짓는 권세를 누렸던 것이다.

 

중류는 경복궁 동쪽 궁장(宮牆, 궁궐 담장)을 따라 흐르면서 관가(궁궐 포함)과 민가를 구분짓던 자연경계 역할을 했는데, 동명(사간동·소격동·화동)을 통해 관아(종친부·사간원·소격서 등)가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글 <자연과 권력이 공존했던, 삼청동>에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부지에 조선시대 종친부·사간원·규장각이 위치했었다고 언급했다. 참고로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세워진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의 망루였다.

 

불편한 위치에 세워진 대문, 숙정문

 

삼청공원을 지나 북쪽 능선을 오르면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이 나오는데, 원래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두 이름은 북방경계를 엄숙하게 하여 도성 안을 편안하거나 맑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 북대문을 애초에 홍지문으로 명칭하려 하였으나, 사대부 세력의 반발로 숙정문(肅靖門)으로 정해졌다고 언급했었다. 산 중턱에 있는 문의 위치도 그렇지만, 문을 지나 이어지는 산줄기를 생각하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제로도 북문으로 더 불렸다고 한다. 백성들은 동쪽의 더 낮은 고도에 위치한 혜화문(惠化門, 동소문)을 더 자주 이용했는데, 경원가로의 접근성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1413년(태종 13) 최양선은 경복궁의 양팔인 창의문·숙청문에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문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지하라는 의미였다. 이에 2개의 문이 폐쇄되면서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숙정문이 축조된지 18년 만이다.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을 의미하는 창의문(彰義門, 북소문)은 인조가 즉위하면서 개방되었는데, 창의문을 통해 입성한 반정군에게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의문 문루 안에 들어가면 공신의 이름·작호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을 자하문(紫霞門, 자핫골 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의문 일대의 또 다른 명칭이 자핫골이었기 때문이다. 자핫골은 개성 자하동(紫霞洞)과 풍광이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

 

조선여성의 탈출구, 숙정문 나들이

 

조선시대 굳게 닫혔던 북문들이 음양오행설에 따라 개방되기도 했는데, 오방(五方)은 다음의 기운을 의미했다.

오방이 가진 의미

가뭄기에 종묘사직·명산대천 기우제를 지낸 후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마지막 수단으로 숭례문(불)을 닫고 숙정문(물)을 열었다. 이는 음기를 받아들여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의미였으며, 장마기에는 반대였다. 이렇듯 「물」의 의미하는 숙정문은 도성 내 아녀자의 풍기문란을 통제하는 수단으로도 의미를 가졌는데, 북문을 통해 들어온 음기아녀자 불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이 음기를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 하였는데, 이는 「부녀자의 음풍·풍기문란」을 의미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북문을 굳게 닫을 수 밖에 없었다.

 

한성 내에 퍼진 한 속설은 여인들의 북문행렬을 끊이지 않게 하였는데, 이는 정월보름날(음력) 숙정문에서 달맞이를 하면 떠난 신랑이 되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음력으로 음기가 가장 강력한 시기가 정월보름날이었다. 또한 정월보름날 이전에 부녀자가 북문을 3번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는 세시풍속도 있었다. 교통이 좋아진 오늘날도 보름 동안 삼청동을 3번 방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무리한 횟수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시 부녀자들은 이를 핑계 삼아 신년왕래를 빈번히 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문기간이 15일(보름)에서 연중으로 확대되면서, 한성 내 아녀자들은 보다 여유롭게 나들이를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북문은 집(갇힌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도피처였을 것이며, 이렇게 북문 근처로 모인 아녀자들은 억눌린 자유를 발산하면서 풍기문란을 행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반영한 속담도 있다.

"사내 못난 것 북문에서 호강받는다"

 

숙정문 바깥에는 뽕나무가 많았다니, 조정에서는 숙정문 밖을 상간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음란」을 의미하는 상간(桑間)·상중(桑中)에는 공통적으로 (桑, 뽕나무)이 포함된다. 그 만큼 뽕나무는 남녀 간의 풍기문란 장소로 인식되었다. 연산군은 창덕궁·창경궁 주변의 민가를 강제철거하고 숙정문을 동쪽으로 이건(移建)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후원에서 벌어지는 채홍잔치를 백성들이 내려다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란한 파티를 펼치는 왕도 문란한 풍기를 내뿜는 여인들의 눈초리는 부담스러웠나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는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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