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현대국가는 국가안보를 위해 정부·군조직 산하의 정보기관을 두고 있는데, 이는 국가정보가 해당국가의 존립과 타국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Intelligence Agency)은 국가안보를 위해 첩보·처리·선전·통제·방첩 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조직명 앞에 정보·보안·방첩·특무·첩보·공안이 붙으면 정보기관으로 보면 된다.
인간계에는 항상 존재하는, 간첩
간첩(間諜)은 한 국가·단체의 비밀·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대립관계에 있는 측에 제공하는 사람으로, 첩자·간자·첩보원·스파이·밀정·세작·프락치 등으로 불린다. 「간첩활동」을 의미하는 영어 스피어나지(espionage)는 스파이(spy)에서 유래되었다. 한자 그대로 간첩은 다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간자(間者) : 이간
첩자(諜者) : 정보수집
이간(離間, 사이를 떼어놓은)은 적진의 내부 와해·분란을 조장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첩보(諜報, 염탐하여 알리는)는 상대방의 정보·사정을 몰래 알아내어 자기진영에 알리는 행위로, 별다른 분석을 거치지 않은 수집정보부터 넓게는 분석·평가·자료작성 등의 활동까지 포함한다. 정보(情報)는 전쟁 중에 수집한 첩보를 바탕으로 분석·평가한 적의 상황·보고를 의미하기도 하고, 생활에서는 관찰·측정을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실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도록 해석·정리한 지식을 의미한다.
오늘날 정보기관에서는 신분공개 여부와 공작의 비밀성에 따라 다음 3가지 부류의 정보요원들을 두고 있다.
백색요원(화이트) : 합법적인 신분
회색요원(그레이) : 신분을 공개한 채, 비밀공작 수행
흑색요원(블랙) : 위장신분으로, 비밀공작 수행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는 인간정보(人間情報)로, 인간출처(대인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정보수집을 의미한다. 평소에는 화이트·그레이·블랙 모두 여러 방법(포섭·매수·회유 등)으로 휴민트를 수집하지만, 블랙은 필요에 따라 암살·파괴공작·사보타주 등을 실행하기도 한다. 타국 입장에서 보면, 블랙요원은 사실상 간첩이다. 방첩(防諜)은 적군의 스파이를 차단하는 방어적인 행위인 반면, 해외공작은 공격적인 행위이다. 공작(工作)은 특정 목적을 위한 전략적 활동을 의미한다. 방첩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보활동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으나, 근래 들어 준정보활동으로 분류한다.
국군 첩보부대의 현재, 정보사령부
1946년 1월 육군정보부대는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최초 발족하여, 1946년 8월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을 거쳐 1946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1948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대(훗날 제1과)」로 개편되었다. 1948년 5월 방첩임무를 수행하는 「조선경비대 정보처 특별조사과」가 설치되었는데, 1949년 10월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훗날 제3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 신설된 공작과(제2과)가 신설되면서, 한국전쟁 초기 육군본부 정보국은 다음 3개의 과로 구성되었다.
제1과(정보대, 훗날 MIG) : 첩보분석·판단
제2과(공작과, 훗날 HID) : 첩보수집(작전)
제3과(방첩대, 훗날 CIC) : 방첩
1951년 3월 공작과도 정보국에서 독립하면서, 첩보분견대본부(HID,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되었다. 당시 HID 소속 북파공작원을 「돼지」로 불렀는데, 이는 목장간판이 달린 소규모 안가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1년 HID는 육군첩보대(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개편되었는데,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이후 1968년 AIU 산하에 설악개발단이 창설되었다. 당시 침투보복 차원에서 창설된 특작부대로는 설악개발단 외에 선갑도, MIU, 684가 있다고 한다.
1972년 AIU와 육군정보대(MIG)와 통합되면서 육군정보사령부(AIC,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되었는데, 첩보의 통합(수집·분석·판단)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1990년 3군 정보부대를 통합·개편한 「국군정보사령부」는 1999년 국방정보본부 예하로 편입되면서 「정보사령부(KDIC, Korea Defence Intelligence Command)」로 개칭했는데, 현재 서리풀터널 일대가 과거 정보사령부 부지였다. 현재 해외정보 수집을 다룬다고 소개되는 정보사령부는 「회사」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휴민트 분야에 중점을 두는 만큼 대외노출을 피하기 위한 위장용이다.
정보사령부 내에서도 인간정보를 다루는 820특기는 특별관리된다고 한다. 100여단은 공작요원(북파공작 포함)으로 구성된 부대로, 임무특성상 820특기 출신이 수장(여단장)을 맡아 왔다. 820특기 내부에서 준장 승진자가 없는 경우에는 여단 내 최선임대령이 여단장 직무대리를 맡는 것이 관례였다. 사실상 1950년대 HID 내 북파부대는 현재 정보사령부 100여단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영화 「아저씨」에서 차태식(원빈 분)은 UDU, AIU가 통합되면서 만들어진 정보사령부 특임대 요원 출신으로 소개되는데, 비밀공작임무(적후방 교란, 폭파, 요인 암살·납치)를 수행했다. 영화에서와 달리, 1990년 해군첩보부대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는 AIC와 통합했을 것이다. 또한 차태식이 1998년부터 정보사령부에 근무한 것으로 보아, 당시 100여단 소속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무사로 널리 알려진, 방첩부대
1950년 10월 방첩대는 정보국에서 분리되면서, 육군특무부대(SIS, Special Investigation Service)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공임무가 점차 중요해지면서,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Security Command)로 통합되기까지 다음의 개편을 거치면서 조직을 갖춰왔다.
1953년 : 해군방첩대(NSU, National Security Unit)
1954년 : 공군특수수사대(OSI, 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1960년 : 육군방첩부대(CIC, Counter-Intelligence Corp)
1968년 : 육군보안사령부(Security Command)
1950~60년대 방첩활동이 매우 중요했던 안보상황에서, 방첩부대 요원들에게 메달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이 메달은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지녔던 마패와 유사했으며, 메달의 표면에는 당시 방첩부대가 지녔을 무소불위(無所不爲, 하지 않는 바가 없다)의 권한을 암시하는 다음의 문장이 새겨졌었다. 1955년 검거된 북한 무장간첩도 위조메달을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으며, 과거 방첩부대가 대수롭지 않게 월권(도·감청, 민간인 사찰 등) 행사를 했을 가능성의 반증이기도 하다.
"본 메달 소지자는 시기 장소를 불문하고,
행동의 제한을 받지 않음"
1977년 9월 3군의 방첩부대들이 통합한 보안사가 출범했다. 이후 보안사 단일채널을 통해서만 군첩보 수집, 공안수사, 군사보안·방첩, 정보전 지원 등이 처리되다 보니, 수집정보의 폭과 양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군정보를 독점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에게 직접보고가 가능함에 따라, 「보안의 권력화」도 강화되었다. 국방부장관도 보안사를 통제 할 수 없는 위치였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노태우는 각각 20대·21대 보안사령관 출신이다.
사찰기관이라는 오명, 기무사
1990년 보안사 소속 병사가 탈영한 후, 주요 정치인(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을 비롯한 민간인(130여명)에 대한 사찰자료를 폭로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0년대 중후반 민주화가 갓 자리잡은 시점에서, 군이 여전히 민간인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노태우 정부는 국방장관·보안사령관을 해임하고, 1991년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명칭을 변경되었다. 향후 군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하겠다는 취지로 기무(機務, 중요하고도 기밀한 정무)라는 명칭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1880년(고종 17) 국정총괄을 위해 통리기무아문(通理機務衙門)을 설치했고,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정치·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위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하지만 기무사도 30년 가까이 군인·민간인 사찰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군회선을 사용하는 유무선전화를 수시로 도청했다던지, 정치인들을 도·감청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아무래도 군인을 대상으로 한 사찰은 군 내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함이었을텐데, 사찰의혹이 붉어질 때면 보안검열로 대체했다고 한다. 기무사 보안검열의 목적은 예방이 아닌 타겟징계였기에, 군간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농성 현장을 촬영하던 기무사 대위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는데, 촬영기기에는 야당·시민단체 소속 인물의 일상모습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2011년 이 사건에 따른 손해배상소송에서 재판부는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배상(1.26억원)을 판결했다. 2011년 9월에도 기무사 장교들이 대학교수의 이메일·웹하드를 해킹한 사건이 있었다.
죽다 살아난, 방첩부대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기무사를 해편(解編, 풀어서 엮다)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조선시대 사화에 빗대어 「기무사화」라고도 부른다. 당시 다음 3대 사건에 연루되었거나 연루의심을 받은 요원(장교·부사관) 240명을 포함하여, 정원 30%(1,200여명)에 달하는 기무요원이 야전으로 방출되었다.
사이버 댓글공작
세월호 민간인 사찰
계엄령 문건 작성
이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재창설되면서, 특권의식이 거의 배제되었다. 윤석열 정부가 다시 국군방첩사령부(방첩사)로 개명되었다.
1999년 8월 논산 육군훈련소(연무대)에 입대하여 신병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2개 정도에 불과한 신축건물에서 생활했었다. 입소한 지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생활관에서 몇명이 호명되어 특수직무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몇일이 지나서야 기무사 차출대상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훈련소 동기들이 엄청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는데, 일단 기무사는 사복생활을 하고 머리도 기를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3차례의 인터뷰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탈락했지만, 아마 막바지까지 차출대상이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훈련소 퇴소 당시 듣도 보도 못한 특기번호 0000에 군간부들이 당황했으며, 심지어 자대배치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012년 육군병과에 따른 병사의 주특기번호가 6자리로 개편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4자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군생활 도중에 기무사 간부가 승용차를 차고 대대장을 방문하곤 했는데, 대대장의 조심스러워 하던 언행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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