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

오늘날과 달랐던 과거의, 시간

by Spacewizard 2024. 12. 15.
728x90

오늘날 사람의 생활패턴을 시간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가령 아침형·저녁형·새벽형 등이다. 개인적으로는 결혼 전까지는 새벽 1~2시까지 자지 않는 새벽형 인간이었지만, 결혼 후 아이들이 생기면서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밤에 일찍 자는 것이 왠지 인생의 낭비로 느껴졌던 시기가 지나고, 40대가 되면서 일찍 자는 것이 바이오리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심지어 자정을 넘겨 취침하면, 다음 날 종일 비몽사몽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인류는 칠흑(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있는)같은 밤이 보냈으며, 밤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상들이 달을 중시했던 이유도 과거의 달빛은 오늘날과 달리 유난히 밝았을 것이니, 얼마나 귀한 존재였을까. 사실 과거의 밤시간은 인생에서 의미가 크게 없던 시기였을 것이다. 현대인은 조상에 비해 더 많은 가처분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밤시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마치 공기가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 십이지시

과거 한반도의 하루는 12개의 시각(時刻, 시간의 한 순간)으로 구분되었는데, 쉽게 말해 과거의 1시각은 오늘날의 2시간이었던 것이다. 시각명은 십이지(十二支)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율력체계에서 사용되는 간지에서 뒤에 붙는 다음의 12가지이다.

 

(子, 쥐) : 23시~01시(삼경)

(丑, 소) : 01시~03시(사경)

(寅, 호랑이) : 03시~05시(오경)

(卯, 토끼) : 05시~07시

(辰, 용) : 07시~09시

(巳, 뱀) : 09시~11시

(午, 말) : 11시~13시

(未, 양) : 13시~15시

(申, 원숭이) : 15시~17시

(酉, 닭) : 17시~19시

(戌, 개) : 19시~21시(초경)

(亥, 돼지) : 21시~23시(이경)

 

밤시각(19시~05시)를 5개로 나눈 오경(五更)체계에서 순서대로 초경(初更, 일경)·이경·삼경·사경·오경이라 했다. 이경(자시)의 한 가운데를 자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00시(밤 12시)를 의미했다. 축(丑)은 북동쪽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시계에서의 위치와도 같다. 과거 북동쪽에는 귀문(鬼門, 귀신이 드나드는 문)이 위치한 방향이라 믿었기 때문에, 축시에 바깥출입을 자제했다. 오(午)는 오늘날에도 정오·오전·오후에 사용되면서 익숙한 단어이다.


경(更)은 다시 5개로 구분하여 (點)이라 하였는데, 1점은 약 24분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점이 지날 때마다 징을 쳤고, 경이 지날 때는 북을 울렸다. 조선 말기에는 정오에 대포(공포)를 쏘기도 했는데, 인천 오포산(오정포산, 현 응봉산)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처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없었더라도, 주야를 나름 정교하게 구분한 조상의 지혜를 알 수 있다. 관리들의 출퇴근 시간도 주야의 길이에 따라 조정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따르면, 근무시간이 하절기 12시간1(66제, 06시~18시), 동절기 8시간(84제, 08시~16시)이다. 여름보다 4시간 덜 일하는 겨울이 기다려졌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야간외출을 보장한, 조선

 

「경국대전」에는 여성들의 야간통행에 관한 다음의 규정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는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법규였다.

“초경을 위반한 자에 대해
곤장 10대로 벌한다”

 

낮시간의 바깥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조선여성들에게 밤시간의 자유로운 외출을 허용해준 것이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에서 나름 유연한 여성우대정책이었던 셈이다. 이사벨라 비숍(영국 지리학자)의 1898년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저녁 8시가 되면 큰 종이 울리는데 이는 남자들이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종이었다. 이때부터 여자들은 외출하여 스스로 즐기고 친구들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제도가 때로 폐지된 일도 있었는데 그러면 사고가 발생했으며, 이 때문에 폐지되었던 제도가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728x90

조선의 통행금지

 

야간통행금지(통금) 야간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킨 제도로, 과거 조명·치안 부재로 인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인정(人定)은 초경3점말(밤 8시경)에 28번의 종소리로 통행금지를 알리면서 성문을 닫는 것이고, 파루(罷漏, 물시계를 그치다)는 오경3점(새벽 4시경)에 33번의 북소리로 통금해제를 알리면서 성문을 여는 것을 말한다. 종소리의 횟수는 불교과 연관된다. 28수(宿, 별자리)는 하늘 적도를 따라 그 남북에 있는 별들을 28개의 구역으로 구분한 별자리로, 인정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에게 고하여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

 

불교세계에는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정상에는 도리천(忉利天, 육욕천 중의 2번째 하늘)이 있다. 미산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산봉우리에는 천인들이 사는 천성이 각각 8개씩(총 32천)씩 있는데, 중앙의 선견성(善見城)과 합하여 33천이다. 도리(忉利)는 33을 의미하는 범어 Trāyastriṃś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선견성에 사는 제석천(帝釋天, 범어 샤크라)은 도리천의 천주로, 우주행정을 총괄하면서 성불한 석가모니의 수호신이다. 도리천은 마야부인(석가모니 모)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며, 신라 선덕여왕이 묻히길 원했던 곳이다. 파루의 33천의 북소리는 하늘의 33천에게 고하여 하루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고자 한 것이다.

 

한성을 아우르는 통신수단, 종루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후, 그 다음해인 1395년 도성을 축성하면서 사대문·사소문이 세워졌다. 종루(鍾樓, 종각)도성 내 중심에 세워진 종을 단 누각으로, 1396년 2층 5칸 규모로 청운교 서쪽에 세워졌다. 1398년 광주(경기도)에서 주조한 종을 종루에 걸었으며, 이후 종루의 종소리에 맞춰서 8개의 성문이 개폐했다. 도성 내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종루의 종소리가 사이렌 역할을 했다. 1413년 종루는 순금사(巡禁司)의 남쪽이면서 광통교의 북쪽으로 이전하였는데, 현위치인 종로1가 교차로이다.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변천, 소동공 롯데부지>에서는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길이 직통이 아닌 종각을 우회하는 길이라고 언급했었다.

 

1440년(세종 22) 동서 5칸, 남북 4칸의 다락형의 건물로 개축되면서, 그 아래를 십자형으로 개통하여 통행을 가능하게 했다. 1458년(세조 7) 대종을 제조하여 새로 설치하였으나, 임진왜란 중에 종루·대종 모두 파괴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종각을 재건하고 다른 종을 옮겨 달았는데, 이는 명례동 종각에서 가져온 원각사 종이었다. 1504년(연산군 10) 장악원이 원각사(圓覺寺)로 이전하면서, 원각사는 폐찰되고 종은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원각사 종은 세조가 만든 것으로,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는 세조가 유생 양반의 반발을 무릎쓰고 흥복사터를 넓혀 원각사를 세웠다고 언급했었다. 원각사 종은 1536년(중종 31) 숭례문 안으로 옮겼고, 1597년(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이전되었던 것이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 인의예지만큼 중요한 신(信)을 사용하여 보신각(普信閣)을 불렀다고 언급했는데, 1895년(고종 32) 종각에 보신각 현판이 달리게 되었다.

1900년대 보신각 전경

일년 내내 크리스마스처럼, 통금 해제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은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수도권(서울 포함)에 통금정책을 시행되었는데, 처음에는 9시간(20시~05시)이었던 통금시간은 이후 6시간(22시~04시)로 단축되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통금은 전국적으로 확대시행되었다. 1961년 이후 통금시간은 4시간(00시~04시)으로 단축되었는데, 특수한 정치적 상황(혁명·계엄령)에서는 통금시간을 일시적으로 늘리기도 했다.

 

특정직업(경찰·기자)은 통금예외를 누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통금시간에 맞춰서 귀가를 서두르던 모습이 일상이었다. 미처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당시 새벽의 경찰서는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고 한다. 문을 잠근 채로 새벽 4시까지 영업하는 술집도 많았는데,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해장을 위해 해장국집을 찾는 진풍경도 있었다. 이전 글 <현대종교 뒤에서 여전히 숭배되는, 태양신>에서는 통금시절에도 1년에 2번(크리스마스·제야)은 통금이 없어 해방감을 느끼려는 이들로 밤거리가 붐볐다고 언급했었다. 크리스마스는 성(性)탄절로 인식되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실수로 태어난 아기들을 「크리스마스 베이비」라 불렀다.

 

1982년 1월 5일 자정, 1945년 광복 이래 37년 동안 지속된 야간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되면서, 자정에 울리던 사이렌과 거리의 바리케이트가 사라졌다. 시민들은 잃어버린 4시간을 찾았으며, 조명으로 빛나는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인류는 차츰차츰 빼앗겼던 밤시간을 찾아왔다. 굳이 새벽산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새벽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