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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품질이 낮은 수출품, 전자개표기

by Spacewizard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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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는 선진화된 투표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명목으로 후진국들을 대상으로 국가적인 원조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2013년 한국 중앙선관위는 국제민간기구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를 설립한 후, 사업예산 전액을 지원해왔다. 주로 전자개표기를 수출하고 선거시스템과 함께 관리노하우를 전수했었다. 문제는 한국 중앙선관위 원조를 받은 국가들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키르키스스탄·이라크·콩고·루마니아 등이 있다. 오늘은 키르키즈스탄과 이라크에서 일어났던 부정선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첫 선거원조,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Kyrgyz Republic)은 2015년 한국 중앙선관위가 최초로 제3국 선거원조를 한 국가이다. 2020년 10월 4일 키르기스스탄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친정부 성향 정당이 90%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지만, 이틀 후인 6일 중앙선관위원장이 총선결과 무효화를 결정했다. 야권지지자들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였고,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수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격렬한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선관위원장은 대규모 선거법 위반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총선을 다시 실시하기로 했다. 총선부정 이슈로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2021년 1월 사디르 자파로프(우파·민족주의)가 대통령이 되었다. 2021년 11월 총선 재선거에서도 우파·민족주의 정당이 대거 승리하게 된다.

 

이전 글 <한때 한반도 외교를 이끈, 위구르>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이 투르크계 국가이며, 840년 키르기스(Kyrgyz)가 위구르제국을 멸망시켰다고 언급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 중에는 고려인들이 있다. 고려인(高麗人)구소련 영토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주민 및 그 후손을 일컫는다. 1860년대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연해주(沿海州)를 넘겨받은 후, 조선인의 러시아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흉작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이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서, 국경이 맞닿은 연해주로 농업이주한 것이다. 이주 초기에는 연추(煙秋, 두만강 건너편) 부근의 지신허(地新墟)·추풍(秋風)에 정착하다가, 점차 연해주 전역으로 퍼졌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일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던 연해주로 정치적 망명이 급증했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던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주요한 근거지가 된다. 당시 한국인 이주민들은 다음의 2부류로 나뉘었다.

 

호(原戶, 근원) : 러시아로 귀화·정착

호(餘戶, 잔여) :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음

 

연해주 내 한인사회의 운영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충돌이 많았었는데, 이는 원호·여호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7년 소련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17만명 가량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적인 집단이주를 시켰는데, 일본 첩자의 소련 극동지방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집단이주는 고려인들의 삶을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많은 한국인 지도자·이주민들이 사망했다. 이 때 연해주에서 흩어진 한국인들은 오늘날 구소련(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우크라이나·몰도바 등)에서 자리를 잡았다.

고려인 강제이주 및 중앙아시아 도착 후 분산경로 [출처:서울신문]

미국에 의해 시작된 총선, 이라크

 

2003년 미국이 바트당(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후, 2005년 미국군정은 이라크에 의원내각제 시스템을 도입시켰다. 2018년 5월 실시된 이라크 총선에서는 한국업체로부터 수입한 전자투개표기 7만대 가량을 수입했는데, 이는 2달 가량 소요되는 개표기간을 단축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7월 전자개표·수개표의 결과가 큰 차이를 보이면서 선거불신이 증폭되었다. 스캐너 형태의 개표기에 기표한 투표용지를 직접 밀어 넣는 방식으로, 개표기와 연결된 중앙선관위의 서버에서 집계된다. 하지만 쿠르드족·수니파 정파가 해킹·조작의혹을 제기하였고, 상당수의 투표소 개표결과가 무효화된 바 있다.

 

1968년 이라크에서는 바트당(범아랍민족주의)이 쿠데타을 일으켰고, 수니파(이라크 소수종파) 사담 후세인은 쿠데타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7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세인은 20년 이상 권력을 유지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후세인은 시아파(다수파)를 억압했다. 후세인은 소비엔트연방과 연합한 이란(시아파)과 대립했었는데, 1980년 시아파를 지원하던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한 이유는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아랍권 전역을 번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1982년 시아파 반군의 암살시도가 실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아파 민간인 180명 가량을 살해했다. 결국 1988년 이란의 정전제의로 이란·이라크 전쟁은 끝났다.

 

미국의 친구에서 적으로, 사담 후세인

 

이라크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수행하던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중동의 군사강국이 되었다. 1990년 8월 후세인 정권는 쿠웨이트를 침공·병합하였는데, 쿠웨이트는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민족주의자에 의해 이라크령으로 주장되어 왔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침공배경은 풍부한 석유자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991년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미국 포함)에게 패배하면서, 미국에 의한 흥망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걸프전 이후 내려진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는 이라크를 경제적 궁핍으로 몰아 넣었고,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군을 진압한 후세인은 철권통치를 강화하면서, 시아파에 대한 탄압·고문을 이어나갔다.

 

2001년 알카에다는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를 일으켰다. 알카에다(al-Qaeda)오사마 빈라덴이 창시한 반미국·반이스라엘 국제테러조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극단적 살라프파 무슬림)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하여 무자헤딘(이슬람 의용군)이 연대한 조직에서 기원한다. 빈라덴이 반미투쟁을 무자헤딘을 재결집한 계기는 미국이 성지를 더렵혔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걸프전을 계기로 미군은 사우디아라비아 내 성지(메카 메디나)에 상주했던 것이다. 

 

사실 중동국가들도 알카에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알카에다의 과격함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알카에다와 한번 엮이면, 미국의 응징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데, 9·11테러 당시 후세인 정권은 알카에다를 지원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미국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고, 이 전쟁에서 패한 후세인은 전범재판을 통해 2006년 12월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이라크를 집권한 시아파는 수니파를 박해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수니파는 테러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정통성이 결여된 집권, 쿠데타

 

「정부에 일격을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쿠데타(coup d'État)는 통상 무력(武力)으로 정권을 붕괴·편취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양의 정변(政變)과 같은 의미이다. 훈련된 지배세력의 일부가 이미 가진 권력을 보다 강화하거나, 아예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비합법적·무력적 수단을 통해 기습감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민 입장에서는 경제·사회적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배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이동에 불과하기에,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혁명(revolution)과는 차이가 있다. 정통성이 결여된 쿠데타는 독재를 통해서 정권이 유지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파시즘과 유사하다. 이전 글 <영원한 제국을 꿈꾸는 형제들, 이탈리아>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집단·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파시즘에 대해 언급했었다. 새뮤얼 헌팅턴(미국 정치학자)은 쿠데타를 다음의 3가지로 분류한다.

변혁적 쿠데타 : 이집트(1952년), 터키(1960년), 5.16군사정변(1961년)
정권수호친위쿠데타 : 구스타프3세(1772년), 10월유신(1972년)
거부의사의 쿠데타 : 나치(1944년), 칠레(1973년), 5·17쿠데타(1980년)

 

변혁쿠데타는 혁명적인 군부(중·말단 장교 위주)가 정부를 해산시킨 후, 군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조직을 만들게 된다. 권력자가 직접 기획하는 친위쿠데타대중질서의식·효율성을 증진시키고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진행한다. 거부의사의 쿠데타는 대중들의 집단적 참여와 군부에 대한 일련의 저항행동에 대하여 억압·학살의 방향으로 자행되며, 군부 내 고위급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헌팅턴이 말한 3종류의 쿠데타가 모두 일어났으며, 그 때마다 비상계엄령이 발령(확대)되었다. 이전 글 <잊혀져 있던 군정, 계엄>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총 17회의 계엄령 선포가 있었다고 언급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늦여름, 동네에서 놀던 중에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기동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었다. 당시 걸프전과 후세인은 국민학생도 관심을 가질만큼 유명했던 전쟁이었고, 후세인은 악마 그 자체로 묘사되었던 기억이 난다. 훗날 걸프전 2~3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과 후세인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국제정치가 상황(국익)에 따라 급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어쨎든 후세인은 내 생애 처음으로 기억되는 현재진행형 전쟁의 주인공이다. 또한 무력으로 권력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무력에 의해 생을 마감한 아주 흔한 패턴의 역사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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