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일 경기도가 의정부 부용산 일대를 숲체험 관광명소로 조성한다고 밝혔는데, 이 부용길에는 시인 천상병의 작품 귀천의 소풍길과 조선초기 대신 신숙주의 묘를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배신자의 대명자로 인색하기 그지 없지만, 그는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그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려서는 외가 덕을 보고 장가 가서는 처가 덕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장인집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했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이이는 외가(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고, 파주(처가)에서 오래 살았다. 조선선비들은 자식이 다 자란 뒤에야 식구들을 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 호남에는 다음의 3개 명촌이 있었다.
영암 구림마을
정읍 무성마을
나주 금안마을
신숙주(1417~1475)는 나주 금안마을의 외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신숙주보다 한 살 어린 성삼문(1418~1456)은 홍주(현 홍성)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숙주는 관직은 얻은 아버지를 따라 7살 전후로 상경했다고 한다.
세종의 총애를 받은, 신숙주 가문
식년시(式年試)는 3년 주기로 치르는 과거시험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과거였다. 중시(重試)는 정기(10년)적으로 시행하는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승진시험으로, 당하관 이하 문무관 내지 아직 관직이 없는 문무관 합격자가 응시할 수 있었다. 중시 합격자는 최소 1계급에서 장원은 4계급까지 특진되었다.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별시(증광시·알성시·별시·외방별시·정시·친시·충당대시·기로과 등)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치러진 횟수는 다음과 같았다.
정시(庭試) : 189회
별시(別試) : 126회
알성시(謁聖試) : 97회
증광시(增廣試) : 67회
외방별시(外方別試) : 60회
춘당대시(春塘臺試) : 20회
친시(親試) : 11회
기로과(耆老科) : 9회
별시 중에서도 증광시는 식년시에 버금가는 규모의 큰 시험이었다. 증광시는 원래 임금 즉위를 축하하는 의미로 즉위년(내지 이듬해)에 치러지는 과거시험이었으나, 선조대부터는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실시되었다. 친시는 왕이 친히 시험관이 되어 실시하는 시험으로, 정해진 급제자수도 없었다.
박팽년(1434년 세종, 을과 2등) : 형조참판, 사육신
이개(1436년 세종, 동진사 3등) : 수찬, 사육식
하위지(1438년 세종, 식년시 을과 1등) : 예조참판, 사육신
성삼문(1438년 세종, 식년시 정과 19등) : 승지, 사육신
신숙주(1439년 세종, 친시 3등) : 영의정
강희안(1441년 세종, 정과 23등) : 예문관 대제학
유성원(1444년 세종, 병과 4등) : 사성, 사육신
성삼문은 20세, 신숙주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성삼문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문과 급제를 이뤘지만, 신숙주는 연년으로 소과·대과에 급제하는 재능을 보였다. 신숙주가 치른 친시는 급제자가 10명이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도 본인능력이 어느 정도만 받쳐주면 아버지·가문의 덕을 충분히 볼 수 있었던 시대였던지라, 신숙주에게는 세종이 총애한 신장(대제학) 아들이라는 타이틀도 따라 다녔다고 한다.
신숙주는 집현전에 근무를 하면서 엄청난 독서력을 보였다. 장서각에서 밤새 독서를 즐기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숙직을 대신하는가 하면, 한번은 늦은 밤까지 궁궐에서 책을 읽다가 잠든 모습을 보고 세종이 어의를 덮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가졌던 신숙주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 등 동아시아 8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는데, 이는 일본·중국과의 외교활동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 없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고 전해지지만, 한글의 반포·보급 작업은 집현전 학자들이 수행했다.
집현전(集賢殿)은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인재를 모아 놓은 학문연구·국왕자문 기관으로, 정치적 관여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집현전 소속 학자들은 항상 붙어서 일을 하다보니 소속감·자부심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인재들 간의 경쟁심도 상당히 고취되었을 것이다. 신숙주는 박팽년·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썼고,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한 운서의 편찬·집필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학자의 자문을 받기 위하여,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왕래했었다고 한다.
1447년 국정리더를 점검하는 중시(문과)에서 성삼문·신숙주는 각각 장원·을과로 급제하였다. 8~9년 전의 대과 성적과 달리, 성삼문이 신숙주를 압도한 것이다. 신숙주는 뛰어난 지략과 업무능력을 답안에 제출했겠지만, 세종은 국정운영의 올바른 마음자세를 내비친 성삼문의 답안이 세종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는 내심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던 성삼문의 활약을 보고, 질시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수양에게 배팅한 동갑내기, 신숙주
단종이 즉위한 후, 안평대군·수양대군을 내세운 종친·관료 간의 정치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신숙주는 양측에서 영입제의가 있었다고 하니, 유능한 인사이더였음에 틀림이 없다. 1440년(세종 22) 신숙주는 함길도 도관찰사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어, 6진을 개척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 김종서·신숙주는 서로의 충심과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미뤄보아 신숙주는 기득권(안평·김종서)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열위에 있던 수양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불시의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죽음을 함께 할 동지를 찾고 있었다. 당시 수양은 다음의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사직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
계유정난이 발생하기 14개월 전 어느 날, 신숙주는 수양과의 술자리에서 동갑내기 수양의 진심어린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다음의 말과 같이, 리더가 충신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이런 점에서 수양은 인간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숙주는 수양을 선택한 대가로 목숨을 비롯한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했을 것인데, 이런 점에서 신숙주도 보통 배짱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후 세조는 신숙주와의 관계를 이상적인 군신관계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급으로 칭했다고 한다.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 태종의 위징
신숙주는 명문지역에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고, 입조하여서는 왕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입신하였다. 이전 글 <조선 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성종의 즉위 배경으로 정희왕후의 의지, 장인 한명회의 영향과 함께 신숙주 등의 훈신의 이해관계가 있다고 언급했었다. 1475년(성종 6) 사망한 신숙주는 조선선비들로부터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 출간한 일부 서적들에서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을 찬양하고, 배신의 상징인 수양과 신숙주를 폄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부인 윤씨의 자책과 정순왕후를 탐했다는 행동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다만 신숙주에 실망한 백성들이 쉽게 변하는 녹두나물을 흔히 숙주나물로 부른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신숙주의 선택과 세조의 폭음·예민함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왕조시대를 경험하지 못해 본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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