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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

by Spacewizard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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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씨에서 유래된 이름, 양양 하조대

잡학에 능했던 하륜, 신촌(무악) 일대 천도 주장

얼자(정도전, 하륜) 출신의 전성시대, 조선초기

절망, 처세, 승부수, 행정력, 물질적 성공을 보여준 인생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egYrNaNOgAY

 

강원도 출장을 다니다 보면, 가끔 양양 하조대 근처 카페에 들러서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곤 한다. 과거 벽지에 가까웠을 동해안 해변은 오늘날 청춘들의 핫플레이스로 변해 있다. 하조대(河趙臺)라는 이름은 조선초기 대신 하륜(1347~1416)과 조준(1346~1405)에 관한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사실여부는 확실치 않아 보인다. 2008년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배우 최종원이 하륜의 역할을 했었는데, 모든 것을 이룬 늙은 하륜이 정전에서 물러나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롱테이크 장면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건네는 뇌물을 거부하지 않았을 세속적 이미지와 능수능란한 처세, 허를 찌르는 말투를 통한 조정능력과 대처가 잘 표현된 늙은 하륜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하륜이 은퇴한 시점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이미 없었는데, 하륜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륜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초기 대신을 떠올리게 하는, 하조대

 

강원도 양양군 동해바다 갯바위 위의 소나무 숲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하륜·조준의 성씨를 따서 하조대라 불렸다. 여말선초 조준·하륜이 하조대에서 은거·유람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준·하륜의 사망시기가 11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말년을 하조대에서 같이 보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고려말기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한 하륜은 양주로 유배당했으나,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관찰사(경기)에서 시작하여 태종의 최측근으로 영의정까지 승승장구했다. 조준은 하조대와 가까운 강릉에서 군수를 지내다 조선개국에 동참했다.

 

하조대의 유래와 관련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하조대 부근에 하씨 성을 가진 젊은 미남이 살고 있었는데, 이웃마을에 살던 조씨 성을 가진 처자와 마음을 나눈 사이였다. 문제는 처자의 쌍둥이 여동생도 이 사내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했던 사내는 쌍둥이 처자들 중 누구 하나 선택하지 못한 채, 하조대에 올라가서 바다에 몸은 던졌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는 남녀의 성씨에서 글자를 따왔는데, 어느 유래가 맞든지 사람의 성에서 정자의 이름이 유래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등과에 이은, 명문가의 사위

 

1347년 태어난 하륜은 19세가 되던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면서 소년등과였다. 하륜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인복(이인임 형)이 동생 이인미(이인임 동생)의 딸과 혼인을 시킴으로써, 하륜은 고려 말기 권문세족 성주이씨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17) 감찰규정 하륜은 좌천을 당하는데, 신돈의 국정농단을 규탄했기 때문이다. 1388년(우왕 14)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이성계가 이인임 일파를 숙청한 무진피화(戊辰被禍)가 있었는데, 이 일로 이인임 측근(임견미·염흥방 등)의 일가는 극형에 처해졌고, 이인임은 유배를 가게 된다. 당시 하륜도 양주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지에서 조선개국을 맞이 한다. 당시 하륜 유배의 배경에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입장을 가졌다는 설과 이인임의 인척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륜은 2번의 요동정벌론 모두 반대했었는데, 이는 고려말 최영의 요동정벌과 조선초 정도전의 요동정벌이다. 하륜은 개국한 지 1년이 지난 1393년(태조 2) 9월 경기도 관찰사로 복직한 후, 권력을 잡기 위해 많은 기회를 노리게 된다. 이색의 문하생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유학을 공부한 하륜이었으나, 학(풍수지리·관상 등)에했고 한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 정도전도 풍수에 맞춰 공간을 배치했다고 언급했었고,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도 세종이 경복궁 풍수설에 집착하여 여기저기 거처를 옮겼다고 언급했었다. 겉으로는 성리학의 나라를 표방했던 조선에서도 풍수지리는 지식인의 지적 역량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93년 12월 하륜은 중앙입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주 계룡산 신도읍 추진을 반대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무악(현재 연세대 일대)로의 천도를 주장했다.

 

지금의 신촌 일대, 무악산 천도 주장

 

태종시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하륜도 성취하지 못한 2가지가 있었는데, 무악산(현재 안산) 천도운하 건설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신도읍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 중 하륜이 추천한 무악이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터가 좁다는 반대에 부딪히면서 결국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이 새도읍이 되었다. 당시 누구의 추천으로 새도읍이 결정되느냐가 아마도 정국주도권을 누가 쥐었지를 판단한 수 있는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종시대 이방원이 정국주도권을 잡으면서 잠시 수도를 개경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시 한양으로의 재이전 이슈가 나올 때 마다 하륜은 무악천도를 주장했다고 한다. 하륜은 무악을 조선의 국운을 크게 상승시킬 지형으로 보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주장한 무악이 도읍으로 결정된다면 정치무대의 중심에 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새도읍 후보지, 무악 출처 역사저널그날
조선 새도읍 후보지, 무악 [출처:역사저널그날]

새도읍(한성)이 안정화된 이후, 하륜은 운하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1412년(태종 12) 충청도 태안군 서쪽 산마루에 위치한 순제(안흥량)에 운하를 파서 조운할 것을 왕에게 청했는데, 당시 그 곳은 수로가 험조하여 전라의 조운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순제에 운하건설 시도가 있었으나, 돌산(암반)이라는 지질적 한계로 인해 실패했었다. 운하건설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한 조사단들은 하나같이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다고 태종에게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하륜은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건설을 강행하였고, 그 결과 노동력만 낭비하였다. 1413년 하륜은 다시 용산강(현 원효대교 북단)에서 숭례문까지 운하건설을 주장했다. 한성 근처의 지리적·경제적 효율성을 감안한다면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당시 기술적 한계를 느꼈던 태종은 민력의 낭비를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천도·운하에 대한 집착에서 하륜의 정책적 스케일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적의 적은 우방, 정도전과 불화

 

이성계와 돈독한 사이였던 차원부가 작성한 연안차씨 족보에 따르면, 정도전과 하륜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도전은 우연(차씨집안 사위)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하륜은 강승유(차씨집안 사위)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족보는 정도전과 하륜이 첩의 외손자로서 얼자 출신이라는 것을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을 빌미로, 자신의 태생적 비밀을 기록해 놓은 차원부와 그 일족을 개성 근교에서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차원부의 죽음에 아주 분노하였다고 하는데, 이방원 입장에서는 '권력을 탐한 서자 하륜의 음모'라는 방패막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다. 참고로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합친 말로, 둘다 첩의 자식을 말한다. 첩의 출신에 따라 상민첩의 자식을 서자라고 하며, 노비첩의 자식을 얼자라고 하였다 .

 

태조시대 정도전의 권력독점으로 인해, 하륜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정도전이 작성한 외교문서인 표전문이 공근(공손하고 부지런함)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정도전을 입조하라고 명한 '표전문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정논의에서 오직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정도전 입장에서는 상당히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건재한 가운데, 하륜이 명나라로 보내져서 표전문 사건을 해명하는 뒷수습을 하게 된다. 이후 정도전과의 불화를 겪던 하륜은 같은 처지에 있던 이방원에게 정치생명을 걸면서 권력핵심으로 도약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판도를 어느 정도 예상한 정도전도 1397년 하륜을 계림부윤으로 좌천시켜 이방원과 떼어 놓으려 했지만, 얼마 후 하륜은 관찰사(충청)로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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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을 기획한, 관상가 양반

 

하륜은 기본적으로 권력과 돈, 그리고 잡학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을 처음 보고서는 장차 크게 될 인물상임을 깨닫고, 민제(이방원 장인)를 만나서 만남의 주선을 청했다고 한다. 하륜은 관찰사(충청)로 재임하던 중에 이방원을 왕좌에 앉히기 위한 왕자의 난을 직접 기획하였는데, 이때 이방원의 잠저인 한성 북부 준수방(현 통인시장 인근)에서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1398년(태조 7) 무인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남은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그 해 10월 정종은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후 1400년 1월 박포가 이방간(회안대군)을 책동하여 도모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이방원이 진압한 후, 박포·이방간을 유배 보냈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달리 그 장소가 개경이었는데, 정종시대 잠시 한성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이전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하륜의 건의로 세자에 책봉된 이방원은 1400년 12월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태조 가계도
태조 가계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어린 아들 둘을 잃은 태조는 불충불의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며 함흥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차례 사자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들을 감금·살해하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1402년(태종 2) 12월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현재의 의정부 인근까지 내려왔는데, 태종은 부왕을 맞이 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 때 태조가 태종을 해칠 가능성을 염두한 하륜의 기지 덕분에 태종은 2번의 피살위기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우선 활을 잘 다루는 태조가 활을 이용할 것을 대비하여 천막 곳곳에 큰 기둥들을 세웠고, 예상대로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는 순간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하륜은 태조가 태종에 근접하는 순간에 발생할 수 있는 우발사태를 우려하여 태종에게 술잔을 직접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잔을 받은 태조는 옷소매에서 쇠방망이를 꺼내면서 웃어 넘겼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골육상쟁을 목격한 아버지의 심정이라면, 그 원흉인 태종을 해칠려는 심정·의도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잔치를 끝나친 후, 태조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재의 의정부에서 장기간 머무르게 된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대신들이 태조에게 정무를 보고하기 위해 이 지역을 자주 찾았다고 하여,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충신의 마지막 간언, 태종의 실망

 

하륜은 죽기 4개월 전인 1416년(태종 16) 6월에 태종에게 밀봉한 글 하나가 올렸는데, 거기에는 황희·심온이 매우 간악한 소인배이니 중책을 맡기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태종은 지신사 조말생에게 큰 실망감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이 치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

 

이는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들 간의 불화를 미리 눈치채지 못한 본인의 과실을 자책하는 말로 보인다. 벼슬에서 물러난 하륜은 11월 초겨울에 70세 노구를 이끌고 함남 정평에 있는 제왕능침을 돌아보던 중에 정평군아에서 숨을 거둔다. 충신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황희와 하륜, 세종의 인색

 

하륜이 말년에 저격한 두 사람 중 황희는 수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겼으나, 세종의 장인인 심온은 태종의 손에 죽고 만다. 결과적으로 하륜이 절반은 맟춘 것이다. 하륜이 죽고 얼마 후 양녕대군을 옹호한 황희도 태종에 의해 4년간 남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지만, 1422년(세종 4) 세종에 의해 복직한다. 사실 황희도 뛰어난 행정력 못지 않게 세속적인 물욕도 큰 사람이었는데, 1431년(세종 13) 황희가 영의정으로 임명된 후 열흘 가까이 반대하는 상소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머쓱한 황희도 사직상소를 계속 올렸지만, 세종이 수리되지 않았다. 이후 19년간 왕과 영의정 관계로 국정을 이끌어간 점을 고려하면, 과거 황희를 비난하던 이들에 대한 세종의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하륜에 대한 세종의 평가는 인색한 편인데, 1431년(세종 13) 3월 "태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하륜의 문장을 권근에 비한다면 마치 문서를 알아보고 처리하는 아전과 같다'라고 하셨는데, 그 뒤에 내가 하륜에게 경서를 물었던 바, 과연 깊이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장에는 비록 짧았으나 이재는 뛰어난 데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1431년(세종 13) 9월에는 "전에 지나간 대신들을 말하자면 하륜·박은·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륜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이고, 은은 임금의 뜻에 맞추려는 신하이며, 원은 이만 탐하고 의를 모르는 신하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세종의 평가는 영의정 황희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과거 신하들의 과실을 크게 내비춘 것일지도 모른다.

 

서얼의 신분으로 태어나 소년등과한 천재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을 것이다. 당시 최대 권문세족 일가의 사위가 되면서 고려 말기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갈 기반을 확보하였으나, 처가의 몰락과 함께 유배를 가면서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배라는 어둠 속에서 굵은 하나의 빛이 비췄으니, 조선의 개국이었다. 물론 개국 후에도 정도전의 견제를 받으면서 좌절이 많았을 것이다. 하륜은 이런 청장년기의 여러 성쇄를 겪으면서 처세를 익혀 나갔을 것이고, 이런 경험들이 이방원을 선택한 승부수와 노년의 노련한 정치력 내지 행정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속적인 성공과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게 마련이고, 이러한 성공·풍요를 향한 욕망은 내면의 공허함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하륜은 타고난 머리와 달리 신분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꼬리표가 될 태생적 한계가 크나큰 내면의 공허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뭐가 되었던 전근대시대에서 자신의 재능과 처세를 마음껏 펼친 한 인간의 모습에서 큰 영감을 느끼게 된다.

 

[Music] 덧 없는 꿈

https://www.youtube.com/watch?v=h24XDDw9Ci8

Ephemeral dreams #덧 없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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