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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서울] 공주댁 근처의 공간, 소공동

by Spacewizard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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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 편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20층 사무실에서 건너편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2개의 직사각형 건물이 부조화스러운듯 조화롭게 나란히 서 있다고 느꼈다. 아마 1979년 3월 전면 개관할 당시, 소공동 롯데호텔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호텔로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참 잘 먹고 다니던 30대 초반, 1층 뷔페식당 라세느를 다닐 때도 30년이 훌쩍 지난 건물같지 않게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았었다.

 

상경 초반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 명동을 즐겨다녔는데, 당시 롯데호텔과 웨스턴조선호텔 내부를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내가 날 때부터 롯데는 재벌이었으니 금싸라기 자리에 백화점과 호텔을 세운 것이 당연하게 여겼으나, 더 과거에 어떤 용도로 누구 소유였을지가 궁금했다.

 

대신과 선교사의 집, 이후 영사관

 

조선시대에는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 일대이 택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이 곳에서 거주하던 이조판서 민창식이 구식군인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 새뮤엘 뮤어(Samuel F. Moore)가 설립한 곤당골교가 들어섰는데, 백정을 상대로 포교를 한다하여 백정교회로도 불렸다. 여기서 곤당골은 16세기 선조시대 홍순언(역관)과 명나라 원씨여인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홍순언의 도움을 받은 원씨여인이 귀국하는 홍순언에게 선물로 보은 글귀가 새겨진 비단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홍순언의 동네를 보은단골이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변형되었다.

 

보은단골 → 고운담골 → 곤담골 → 곤당골

 

미장동(美牆洞, 고운담골)을 줄여서 미동(美洞)이라 한다. 1884년 이탈리아는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외교공관을 두지 못했는데, 17년이 지난 1901년 12월 곤당골교회가 나간 자리에 이탈리아 영사관이 /들어섰다. 하지만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탈리아 영사관은 서소문(현 대한항공 서소문사옥 자리)로 이전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사관은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개인 부호의 임대사업지

 

이탈리아 영사관이 서소문으로 이전한 후, 낙산 부호인 이씨 부자(이봉래·이용문)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1906년 이 곳에 최초의 근대식 도서관인 대한중앙도서관 임시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09년 이봉래는 사립봉명학교를 설립했다. 봉명학교 교사평수는 144평에 불과했으나, 교지평수는 1,450평에 달했다고 한다. 이봉래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관련 사업을 영위한 인물로, 1913년 일본인 2명과 함께 자동차운송사업을 시작했다. 승합차를 수입하여 전국 9개 노선(충청도·평양 등)을 운행했다. 2014년 이용문이 용산에 위치했던 경성운전수양성소에서 최초의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1918년 이후 봉명학교가 없어지면서 작은 단위로 분할되었고, 안쪽에는 30여채의 셋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후 어느 시점에 성업사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세계대공황 이후 저당권 설정에 의해 유입된 담보부동산이 급증하자,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처분하기 위해 성업사(成業社, 조선식산은행 자회사)가 설립되었다.

 

유명 중국집, 아서원

 

1918년 아서원은 봉명학교의 동쪽에 개업했다고 하니, 아서원과 봉명학교는 동일 필지 내에 나란히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금정 일대에는 화교들이 밀집하여 거주하고 있었으며, 많은 화교들이 음식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아서원에서는 연회, 총회, 회합을 비롯한 각종 모임들이 벌어지던 곳으로 유명했다. 당시 일반적인 중식당 건물형태는 2층 건물의 1층에는 홀이 있고 2층에는 방이 있었다고 한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관청에서 풀려난 기생들은 사설기생조합인 권번에 적을 두고 고급 요릿집으로 출장을 나갔다고 언급했다. 아서원 같은 고급 중식당에서도 기생을 불러서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만큼 당시의 중식당은 고급요리집으로 인식되었고, 단품이 아닌 코스요리를 주로 팔았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총회가 비밀리에 아서원에 열렸다. 1950~1960년대 정치인들이 밀실정치의 장소로 중식당을 많이 이용하였는데, 이는 독립된 방에서 코스요리를 즐기면서 오랜 시간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재벌의 손에서, 대형빌딩

 

1935년 성업사는 이 부지를 조선 제일의 재벌이었던 노구치 시타가우에게 매각하였다. 인접지 일부를 추가 매수한 노구치는 1938년 당시의 대형빌딩인 조선빌딩을 세워 고층부(6~8층)를 반도호텔로 운영되었다. 이후 조선빌딩은 흔히 반도호텔로 불리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작업복을 입은 60대의 노구치가 조선호텔에 들어가려다가 수위에게 제지를 당하면서 면박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노구치는 조선호텔을 뛰어 넘는 호텔을 신축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몇 년 후 조선호텔 바로 옆에 당시 최고층 8층짜리 조선빌딩을 세워 고층부에 반도호텔을 오픈했던 것이다. 조선빌딩의 신축을 위해 명도된 아서원은 새로운 자리로 옮겨 영업을 계속하였는데, 이전된 위치는 조선빌딩의 동쪽편 안쪽이라고 한다.

 

해방 후 조선빌딩은 미군정을 총괄했던 제24군단사령부 및 미군장교숙소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1949년 3월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무쵸(John Joseph Muccio)가 임명되면서 최초의 미국대사관이 조선빌딩에 입주하였다. 1952년 7월 서울로 환도한 미국대사관은 파괴된 반도호텔의 길 건너편에 있는 옛 미쓰이(三井)물산 경성지점 건물(현 그레뱅뮤지엄)로 이전하게 된다. 참고로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건물은 1937년 세워졌으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대사관, 미국문화원, 서울시청 을지로별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이전사옥(좌), 1937년 신축사옥(우) [출처:TBS]

전쟁통에 건물 일부가 파괴된 반도호텔을 한국정부가 매수하여, 국군 공병단의 복구공사를 통해 1954년 9월 호텔로 다시 오픈하였다. 제1공화국(이승만 정권) 때 이기붕 민의원의장이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당무를 보기도 하였고, 제2공화국(윤보선 정권) 때는 장면 총리가 별도의 관저를 마련하지 못하여 반도호텔에 임시집무실을 두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1일에는 교통부 직영호텔 9개(서울 2, 지방 7)의 관리권 이양에 따라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이 동시에 국제관광공사의 소유로 넘어오게 된다.

 

금싸라기 땅의 현 주인, 롯데

 

1974년 6월 국영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반도호텔 매각과 관련한 일반 공개경쟁 입찰을 진행하였고, 단독응찰한 호텔롯데가 낙찰받았다. 박정희 정부에서 신격호가 국내 재벌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는 의외로, 1970년 롯데제과의 껌에서 검출된 쇳가루·모래가루였다. 박정희는 신격호(롯데제과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롯데껌 파문을 무마해주는 대신, 해외에서 일군 재산으로 반도호텔을 인수하여 신축호텔을 지으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당시의 국가경제 수준에서 호텔사업의 투자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도 약속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전두환 정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소공동 부지 확보 외에도 외자도입법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른 각종 세금면제, 사실상 백화점 허가, 잠실개발 특혜 등 일반인이 보기에도 엄청난 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호텔롯데는 국립도서관 부지(현 롯데백화점 주차장 구역)도 매수하였다. 1969년 2월 반도호텔과 인접한 아서원 부지도 롯데제과에 매각되었으나, 아서원 주주들 간의 대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5년간 소송전 끝에 1974년 4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소유권 이전등기가 완료했다.

 

반도호텔, 국립도서관(구 총독부도서관) 및 아서원 자리를 포함한 구역은 3년 5개월에 걸친 공사기간을 거쳐 1978년 12월 롯데호텔 본관(지상 38층~지하 3층)을 일부 개관하였고, 1979년 3월에 지하 아케이드 및 롯데쇼핑센터와 함께 전면 개관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 6월 한국산업은행(구 조선식산은행) 자리에 롯데호텔 신관을 개관한다. 1979년 12월 현재의 롯데백화점은 롯데쇼핑센터라는 상호로 출범한 후, 9년이 지난 1988년 11월이 되어서야 상호가 롯데백화점으로 변경되었다. 1978년 서울 사대문 내 백화점 건립을 금지하는 규제를 피해야 했기에, 서울시로부터 유통시설 허가를 얻었던 것이었다. 

소공동 롯데호텔 및 백화점 부지, 이전 용도(추정)
소공동 롯데호텔 및 백화점 부지, 이전 용도(추정) [지도:카카오맵]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성 시내의 도로체계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가 조선의 근대화로 전수된 가장 대표적 사례도시계획과 그에 따른 도로망 개선이 아닐까 한다. 조선은 풍수적 이유로 도성의 메인도로(축선)을 크게 꺾어 계획함으로써,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태평로는 조선시대 내내 흔적조차 없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축선이었지만, 이 비정형적인 도시의 선이 현재의 서울을 더 생동감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본다.

 

2000년 서울시는 롯데호텔 앞 을지로 도로변에는 고운담골 역사문화유적 표석을 설치하였다. 대부분은 고운담골이라고 하면 생소하여 관심을 가지질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간 차곡차곡 쌓은 역사적 사건과 공간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을지로 입구의 산책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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