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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주댁 근처의 공간 변천, 소공동 롯데 부지

by Spacewizard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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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경 도로가 확장된, 을지로1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부부가 살던, 소공동

구한말 택지·교회·영사관·사학이 들어섰던, 소공동 롯데부지

일제강점기 신축된 조선빌딩에서 운영된, 반도호텔

해방 후 조선빌딩은 미국의 공간, 미군숙소·미국대사관
1970년대 반도호텔을 인수한, 롯데그룹
조선시대 한약방이 밀집했던, 구리개(현 을지로)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xDofzsnl9Vo

 

몇 년 전에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 편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20층 사무실에서 건너편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2개의 직사각형 건물이 부조화스러운듯 조화롭게 나란히 서 있다고 느꼈다. 아마 1979년 3월 전면 개관할 당시, 소공동 롯데호텔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호텔로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참 잘 먹고 다니던 30대 초반, 1층 뷔페식당 라세느를 다닐 때도 30년이 훌쩍 지난 건물같지 않게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았었다. 상경 초반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 명동을 즐겨다녔는데, 이때 롯데호텔과 웨스턴조선호텔 내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내가 날 때부터 롯데는 재벌이었으니 금싸라기 자리에 백화점과 호텔을 세운 것이 당연하게 여겼으나, 더 과거에 어떤 용도로 누구 소유였을지가 궁금했다. 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의 과거에 대해서 알아보자.

 

화기가 가득한 한양을 막아낼, 풍수적 소방장치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조선 새도읍 후보로 공주 계룡산, 무악 및 한양이 거론되었고, 결국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이 새도읍으로 정해졌다고 언급했다. 조선은 도읍·궁궐을 정함에 있어 풍수지리를 중시하였다. 한양을 새도읍으로 정한 후에도, 경복궁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한강 남쪽에서 오는 화기를 막으려면 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중국의 선례를 들며 남향을 고집했다. 새도읍에 이어 궁궐의 배치까지 정도전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경복궁은 지금처럼 남향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정도전의 집터 내에 안채, 서당, 마구간의 배치가 풍수지리에 맞춰졌다고 언급했는데, 정도전 또한 풍수지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양 주위의 바위로 된 악산(관악산·인왕산·도봉산)에서 나오는 화기를 막기 위해 풍수적 장치를 곳곳에 해놓았다. 숭례문(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경복궁·도성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향을 나타낸다. 숭례(崇禮)남쪽에서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써 불은 불로 막는다는 풍수이론을 따랐다고 한다.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는 서대문 바깥에 연못 서지를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숭례문 바깥에 자그마한 연못 남지(南池)를 만들었는데, 이는 물의 기운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겠다는 시도였다.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길을 직통이 아닌 우회길(종각·광교 우회)로 만들었는데, 이는 남지·숭례문을 통과한 관악산의 화기가 곧은 길을 따라 경복궁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던 것이다. 마침 당시 육조거리가 끝나는 지점(현 세종로 사거리)에는 나지막한 언덕 황토현(황토마루)이 위치하여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을 자연적으로 막아 주었으며, 황토현 앞에서 종루(보신각) 방향으로 꺾이는 도로를 만들었다. 황토현을 현재의 지명으로 설명하자면, 세종로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솟아 올랐다가 청계천 광장과 정동까지 고도가 유지되다가 무교동 쪽으로 내려오는 나즈막한 언덕이었다고 한다. 

조선 축선과 일제 축선 출처 서울신문
조선 축선과 일제 축선 [출처:서울신문]

1890년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광화문 앞에 해태상 한 쌍을 세웠는데,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는 관악산 꼭대기를 노려보며 불을 먹을 기세를 하고 있다. 1923년 10월 경복궁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박람회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를 앞두고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경복궁 내로 옮겨졌다. 원래 해태는 불을 먹기도 하지만,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다투고 있으면, 죄인을 찾아내어 벌하는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영물로 여겼다. 조선시대 사헌부 관헌들의 옷에도 이런 의미로 해태를 새겼는데, 관리들의 비리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을지로, 구리개 언덕

 

조선시대 한양도성 4대문을 잇는 길을 보면, 종로(서대문~대문)와 남대문로(종각~남대문)는 대로였지만, 을지로(서울시청~광희문)는 좁은 도로였다. 조선시대 내내 세종로 네거리와 남대문 사이의 태평로는 황토현에 막혀 있었는데, 1900년 전후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경운궁에서 육조거리를 잇는 도로를 개설하였다. 1912년경 태평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덕수궁의 상당부분이 편입되면서 현재의 서울시청 앞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 때 을지로(시청앞~을지로입구) 초입 구간의 도로도 확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을지로를 구리개라 불렀는데, 이는 멀리서 보면 햇볕에 빛나는 구리처럼 보이는 황톳길 언덕이라는 의미였다. 구리개에는 국방(체찰사부·하도감), 의료(혜민서), 외교(사자청), 문화(장악원) 등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위치했었다. 특히 혜민서 주변에는 한약방이 발달하여, 한성의 한약재는 모두 구리개의 한약방에서 거래되었다. 구한 말에는 구리개를 동현(銅峴)이라고 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가 장악한, 구리개

 

남별궁(南別宮, 현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은 경정공주(태종 차녀) 부부가 살던 집으로, 소공동소공주댁(小公主宅, 작은 공주댁)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공주댁은 도성 내의 가장 큰 집 중 하나로, 임진왜란에는 왜군·명군이 번갈아 가며 주둔했었다고 한다. 의주까지의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는 파괴된 경복궁 대신 경운궁(현 덕수궁)에 머물면서, 근처의 공주댁에서 머물던 명나라 장수·사신들을 자주 접견하면서 남별궁이라고 불렸다. 이후에도 남별궁은 청사신들의 숙소·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인솔한 오장경과 1883년 총판조선상무위원(공사)로 부임한 진수당은 남별궁을 공서로 삼았으며, 이후 청상(청나라 상인)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구리개 일대(소공동·북창동·명동·관수동)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 1887년 초 구리개의 청국병영 옆(전 외환은행 본점, 현 하나금융그룹 자리)으로 제중원이 확장 이전하였다고 언급했었다. 제중원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청국병영(현 IBK 파이낸스타워 자리), 남서쪽에는 청공사관(현 중국대사관 자리)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제중원의 이전에 관여했다는 방증일 수 있는데, 나름 차이나타운 근처에 의료인프라를 구축하려 했으려나. 당시 구리개 일대는 청계천 너머의 공간으로 외국인인 청나라 사람들이 정착하기에 비교적 수월했을 것이다.

1887년 이전한 제중원 추정 위치 [지도:카카오맵]

1914년에 구리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일본식 이름 황금정통(황금정)으로 변경된다. 구한말 청상이 구리개 일대에 자리 잡은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화교들은 황금정에 많이 거주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화교까지 명동과 황금정 일대에 정착하게 되면서, 화교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1946년 정부는 황금정을 을지로로 개칭한다. 고구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크게 격파한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공구상가들이 을지로와 청계천에 자리잡게 되며, 휴전 이후에는 도심 재건에 필요한 건축자재상들이 집적하게 된다. ​1950~1960년 섬유산업의 발전으로 미싱상가와 1960~1980년 인쇄업의 번성으로 인쇄골목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 업무용 빌딩들이 을지로 주변에 세워지면서 업무지구가 되었다.

 

대신과 선교사의 집, 이후 영사관

 

조선시대에는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 일대이 택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이 곳에서 거주하던 이조판서 민창식이 구식군인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 새뮤엘 뮤어(Samuel F. Moore)가 설립한 곤당골교가 들어섰는데, 백정을 상대로 포교를 해서 「백정교회」로도 불렸다. 여기서 「곤당골」은 16세기 선조시대 홍순언(역관)과 명나라 원씨여인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홍순언의 도움을 받은 원씨여인이 귀국하는 홍순언에게 선물로 「보은」글귀가 새겨진 비단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홍순언의 동네를 「보은단골」이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변형되었다.

 

보은단골 → 고운담골 → 곤담골 → 곤당골

 

미장동(美牆洞, 고운담골)을 줄여서 미동(美洞)이라 한다. 1884년 이탈리아는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외교공관을 두지 못했는데, 17년이 지난 1901년 12월 곤당골교회가 나간 자리에 이탈리아 영사관이 들어섰다. 하지만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탈리아 영사관은 서소문(현 대한항공 서소문사옥 자리)로 이전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사관은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개인 부호의 임대사업지

 

이탈리아 영사관이 서소문으로 이전한 후, 낙산 부호인 이씨 부자(이봉래·이용문)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1906년 이 곳에 최초의 근대식 도서관인 대한중앙도서관 임시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09년 이봉래는 사립봉명학교를 설립했다. 봉명학교 교사평수는 144평에 불과했으나, 교지평수는 1,450평에 달했다고 한다. 이봉래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관련 사업을 영위한 인물이다. 1913년 이봉래는 일본인 2명과 함께 자동차운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승합차를 수입하여 충청도·평양 등 전국 9개 노선을 운행했다. 2014년 이용문이 용산에 위치했던 경성운전수양성소에서 최초의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1918년 이후 봉명학교가 없어지면서 작은 단위로 분할되었고, 안쪽에는 30여채의 셋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후 어느 시점에 성업사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세계대공황 이후 저당권 설정에 의해 유입된 담보부동산이 급증하자,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처분하기 위해 성업사(成業社, 조선식산은행 자회사)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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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중국집, 아서원

 

1918년 아서원은 봉명학교의 동쪽에 개업했다고 하니, 아서원과 봉명학교는 동일 필지 내에 나란히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금정 일대에는 화교들이 밀집하여 거주하고 있었으며, 많은 화교들이 음식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아서원에서는 연회, 총회, 회합을 비롯한 각종 모임들이 벌어지던 곳으로 유명했다. 당시 일반적인 중식당 건물형태는 2층 건물의 1층에는 홀이 있고 2층에는 방이 있었다고 한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관청에서 풀려난 기생들은 사설기생조합인 권번에 적을 두고 고급 요릿집으로 출장을 나갔다고 언급했다. 아서원 같은 고급 중식당에서도 기생을 불러서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만큼 당시의 중식당은 고급요리집으로 인식되었고, 단품이 아닌 코스요리를 주로 팔았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총회가 비밀리에 아서원에 열렸다. 1950~1960년대 정치인들이 밀실정치의 장소로 중식당을 많이 이용하였는데, 이는 독립된 방에서 코스요리를 즐기면서 오랜 시간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재벌의 손에서, 대형빌딩

 

1935년 성업사는 이 부지를 조선 제일의 재벌이었던 노구치 시타가우에게 매각하였다. 인접지 일부를 추가 매수한 노구치는 1938년 당시의 대형빌딩인 조선빌딩을 세워 고층부(6~8층)를 반도호텔로 운영되었다. 이후 조선빌딩은 흔히 반도호텔로 불리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작업복을 입은 60대의 노구치가 조선호텔에 들어가려다가 수위에게 제지를 당하면서 면박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노구치는 조선호텔을 뛰어 넘는 호텔을 신축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몇 년 후 조선호텔 바로 옆에 당시 최고층 8층짜리 조선빌딩을 세워 고층부에 반도호텔을 오픈했던 것이다. 조선빌딩의 신축을 위해 명도된 아서원은 새로운 자리로 옮겨 영업을 계속하였는데, 이전된 위치는 조선빌딩의 동쪽편 안쪽이라고 한다.

 

해방 후 조선빌딩은 미군정을 총괄했던 제24군단사령부 및 미군장교숙소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1949년 3월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무쵸(John Joseph Muccio)가 임명되면서 최초의 미국대사관이 조선빌딩에 입주하였다. 1952년 7월 서울로 환도한 미국대사관은 파괴된 반도호텔의 길 건너편에 있는 옛 미쓰이(三井)물산 경성지점 건물(현 그레뱅뮤지엄)로 이전하게 된다. 참고로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건물은 1937년 세워졌으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대사관, 미국문화원, 서울시청 을지로별관 등으로 사용되였다.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이전사옥(좌), 1937년 신축사옥(우) [출처:TBS]

전쟁통에 건물 일부가 파괴된 반도호텔을 한국정부가 매수하여, 국군 공병단의 복구공사를 통해 1954년 9월 호텔로 다시 오픈하였다. 제1공화국(이승만 정권) 때 이기붕 민의원의장이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당무를 보기도 하였고, 제2공화국(윤보선 정권) 때는 장면 총리가 별도의 관저를 마련하지 못하여 반도호텔에 임시집무실을 두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1일에는 교통부 직영호텔 9개(서울 2, 지방 7)의 관리권 이양에 따라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이 동시에 국제관광공사의 소유로 넘어오게 된다.

 

금싸라기 땅의 현 주인, 롯데

 

1974년 6월 국영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반도호텔 매각과 관련한 일반 공개경쟁 입찰을 진행하였고, 단독응찰한 호텔롯데가 낙찰받았다. 박정희 정부에서 신격호가 국내 재벌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는 의외로, 1970년 롯데제과의 껌에서 검출된 쇳가루·모래가루였다. 박정희는 신격호(롯데제과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롯데껌 파문을 무마해주는 대신, 해외에서 일군 재산으로 반도호텔을 인수하여 신축호텔을 지으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당시의 국가경제 수준에서 호텔사업의 투자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도 약속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전두환 정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소공동 부지 확보는 물론, 「외자도입법」과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른 각종 세금면제, 사실상 백화점 허가, 잠실개발 특혜 등 일반인이 보기에도 엄청난 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호텔롯데는 국립도서관 부지(현 롯데백화점 주차장 구역)도 매수하였다. 1969년 2월 반도호텔과 인접한 아서원 부지도 롯데제과에 매각되었으나, 아서원 주주들 간의 대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5년간 소송전 끝에 1974년 4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소유권 이전등기가 완료했다. 반도호텔, 국립도서관(구 총독부도서관) 및 아서원 자리를 포함한 구역은 3년 5개월에 걸친 공사기간을 거쳐 1978년 12월 롯데호텔 본관(지상 38층~지하 3층)을 일부 개관하였고, 1979년 3월에 지하 아케이드 및 롯데쇼핑센터와 함께 전면 개관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 6월 한국산업은행(구 조선식산은행) 자리에 롯데호텔 신관을 개관한다. 1979년 12월 현재의 롯데백화점은 '롯데쇼핑센터'라는 상호로 출범한 후, 1988년 11월이 되어서야 상호가 롯데백화점으로 변경되었다. 이유는 1978년 서울시로부터 유통시설 허가는 얻기는 하였지만, 서울 사대문 내 백화점 건립을 금지하는 규제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공동 롯데호텔 및 백화점 부지, 이전 용도(추정)
소공동 롯데호텔 및 백화점 부지, 이전 용도(추정) [지도:카카오맵]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성 시내의 도로체계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가 조선의 근대화로 전수된 가장 대표적 사례도시계획과 그에 따른 도로망 개선이 아닐까 한다. 조선은 풍수적 이유로 도성의 메인도로(축선)을 크게 꺾어 계획함으로써,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태평로는 조선시대 내내 흔적조차 없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축선이었지만, 이 비정형적인 도시의 선이 현재의 서울을 더 생동감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본다. 2000년 서울시는 롯데호텔 앞 을지로 도로변에는 「고운담골」역사문화유적 표석을 설치하였다. 대부분은 고운담골이라고 하면 생소하여 관심을 가지질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간 차곡차곡 쌓은 역사적 사건과 공간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을지로 입구의 산책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Music] 공주의 성

https://www.youtube.com/watch?v=4mF5DLYQ7fc

The Castle of the Princess #공주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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