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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가끔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한, 골프

by Spacewizard 202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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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무너지면 한 없이 잔인한 게임, 골프

내면의 기싸움이 촉발하는 감정의 쓰나미, 공멸 가능성

말도 안되는 실수가 가져오는 좌절감, 극복의 대상  

백전노장이 보여 준 감동적인 장면, 기회를 살린 기술·대담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w2pTHZRxLkI

 

2024년 5월 19일 최경주는 자신의 만 54세(1970년생) 생일날에 맞춰 대기록을 갱신했는데, KPGA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약 12년만에 투어우승을 차지하면서 역대 최고령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KPGA투어에서 19년 만에 나온 50대 우승자이기도 하다. 체력과 정신력 모두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프로골프투어에서, 50대 선수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정신력·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종라운드에서 3타를 잃은 최경주는 3타를 줄인 박상현과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17·18홀 세컨샷이 연속으로 벙커에 들어갔던 최경주의 피로감은 상당해 보였다. 제한된 공간에서 2명의 파이터 만이 벌이는 격투경기를 보고 있으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생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것이 약간의 실력차이만 있어도, 정교한 펀치·킥으로 약자가 실신되는 장면을 자주 나온다. 격투경기가 인간의 눈에 비춰지는 기싸움에 의해 승부가 나는 반면, 골프는 침묵·눈빛으로 상대의 기를 누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과 그로 인한 심란함을 통제할 수 있어야만 승리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기에, 골프만큼 스스로에게 잔인한 게임도 드물다.

 

(제주) 안의 섬에서 기사회생한, 섬 출신

 

모든 스포츠가 분위기를 타게 마련인데, 골프처럼 리더에게 잔인한 패배를 안겨주는 승부가 자주 나오는 종목도 많지 않다. 연장 1차전에서 최경주의 세컨샷은 그린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저드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 순간,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일 간의 노장투혼이 물거품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카메라가 비춘 개울가의 광경은 연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라웠는데, 성인 2~3명 정도 서 있을 만한 규모의 작은 섬에 하얀 공이 선명하게 보인 것이다. 심지어 어드레스를 갖출 공간까지 나오는 지점이었다. 섬의 규모라도 크면 '아일랜드'라고 부르겠으나, 이건 그냥 '보트' 수준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골프장 설계자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예쁜 섬을 만들었을까?
분명 조경을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오늘 이후로는 제주 핀크스의 역사적 장소가 되겠군"

 

섬마을 출신 골퍼가 (제주도)에서 열리는 스폰서 경기의 연장승부에서 '아일랜드 어프로치'를 성공하면서, 결국 연장 2차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자칫 잔인한 패배가 나올 뻔한 경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마무리되었다.

2024년 KPGA SK텔레콤 오픈 연장 1차전, 최경주 세컨샷 위치와 어프로치 출처 JTBC골프
2024년 KPGA SK텔레콤 오픈 연장 1차전, 최경주 세컨샷 위치(좌)와 어프로치(우) [출처:JTBC골프]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 공멸

 

최경주가 역사를 기록한 2024년 5월 19일 오전에도 주목받는 KLPGA투어 대회가 있었는데, 두산 매치플레이 최종라운드에서 동갑내기 이예원·윤이나의 4강전이었다. 11번홀에서 윤이나는 버디퍼트를 홀에서 1m 안쪽으로 붙였지만, 이예원은 선뜻 컨시드(concede, 일명 오케이)를 주지 않고 퍼팅를 준비하려고 했다. 매치플레이에서는 홀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 우선적으로 퍼팅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게임이다. 하지만 윤이나는 습관적으로 마무리 퍼팅을 하고 공을 주웠는데, 이예원의 표정에는 오묘한 불만이 있어 보였다. 이내 정색한 모습을 보였던 윤이나는 컨시드를 받지 못한 채로, 이예원의 파퍼팅이 끝나고 다시 마무리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 두 사람의 승부가 2위·4위로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앞서 말했듯이 골프는 자기(기싸움·심란)를 통제하지 못하면, 스스로 무너지기 쉽다. 컨시드를 주고 안주고는 당사자에게 결정권이 있고, 시청자에게 보여지지 않는 많은 기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기싸움이 외적으로 표출된다면, 이후 경기 내내 당사자들은 수 차례의 감정의 쓰나미를 맞을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윤이나는 이소영에게 5홀 차로 졌고, 이예원도 박현경에게 마지막 홀을 내주면서 1홀 차로 패배했다. 우연일 수도 있다.

 

중압감에 무너진, 아리야 주타누간

 

현재 LPGA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는 더 셰프론 챔피언쉽(The Chevron Championshin)으로, 이전까지는 나비스코 다이너 쇼어, 나비스코 챔피언십, ANA 인스퍼레이션 순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왔다. 1980년부터 개최되어 1983년 메이저로 승격한 이 대회는 2022년까지 근 40년을 란초미라지(Rancho Mirage,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미션힐스CC에서 개최되었는데, 2023년부터는 휴스턴(미국 텍사스주) '더 클럽 앳 칼턴 우즈'에서 개최되고 있다. 2016년 4월 개최된 ANA 인스퍼레이션에서는 경험이 부족한 선두가 노련한 어린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최종라운드에서 아리야 주타누간(태국)는 3홀을 남긴 상태에서, 4타를 줄이면서 2위권과 2타차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던 주타누간은 태국 첫 LPGA투어 우승을 앞두고 심적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방심하기에는 너무나도 막강한 경쟁자들이 2타차로 추격 중이었던 것인데, 바로 리디아고(19세, 당시 세계랭킹 1위)와 전인지(22세)였다. 16번홀(파4)에서 3퍼트 보기를 적어 낸 주타누간은 심란해하는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으니, 17번홀(파3)에서도 티샷이 그린 왼쪽 벙커에 빠지면서 연속 보기를 기록했다. 결국 17번홀을 끝낸 주타누간은 다른 2명(리디아고, 찰리헐)과 공동선두로 내려 앉았으며, 심지어 앞 조의 리디아고는 18번홀(파5)를 탭인버디로 마무리하며 12언더파 1타차 단독선두로 올라섰다. 우승을 위해 승부수를 던져야 했던 주타누간은 티샷이 왼쪽 워터해저드에 빠지면서 3홀 연속 보기를 기록하며, 단독 4위로 경기를 마쳤다. 이전 글 <로마를 휩쓸고 급히 퇴장한, 훈족>에서는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인물로 5세기 유럽을 잔혹하게 휩쓴 아틸라라고 언급했었다. 아마도 리디아고의 버디행진을 바라 본 주타누간의 심정이 마치 아틸라를 보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으로 잔인함을 보여주는 아틸라보다 침묵 속에서 목을 조이는 잔인함이 더 무자비해 보인다.

 

말도 안되는 실수에 스스로 무너진, 김인경

 

얼마 전 케이블 골프채널에서 LPGA투어 한국선수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내용 중에 메이져 대회에서 스스로에게 무너진 김인경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2012년 4월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 김인경은 마지막 홀에서 30cm 파퍼팅만 성공하면 우승이었고, 2위 유선영은 자포자기한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그 짧은 퍼팅이 컵을 돌아 나와 버린다. 퍼팅 후에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제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는 영상은 아직까지도 '최악의 실수'를 다루는 주제에서 많이 다뤄진다. 결국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인경은 연장전에서 유선영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골퍼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을 현실에서 겪은 김인경은 무려 4년이나 골프의 잔인한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3년 KIA클래식(미국 캘리포니아주 아비아라GC)에서 마지막 3홀에서 연속으로 1~2m 짧은 퍼팅을 놓치며 연장전에서 패배했고, 2014년 감비아 포틀랜드 클래식(미국 오리건주 에지워터CC)에서는 연장에서 2m 파퍼팅를 놓치면서 패배했다. 아마 왠만한 투어프로였다면, 계속된 연장패배의 절망 속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 10월 레인우드 클래식(중국 베이징 파인밸리GC)에서 김인경은 1타차 우승을 차지하면서 스스로 절망의 굴레를 벗어 났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4년 전 실수가 스스로를 더 겸손한 골퍼로 거듭나게 해줬다고 말했다.

 

1988년생 세계정상급 국내 여자프로에는 박인비·신지애·김인경가 있으며, 김인경은 치열한 동갑내기 경쟁 속에서 국가대표를 지낸 엘리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미국 골프유학을 간 김인경은 2007년 LPGA투어에 데뷔했고, 데뷔 2년차부터 3년 연속으로 우승을 했다. 그런 위대한 선수 조차도 지옥과도 같은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것을 보면, '인생은 고통'이라는 여러 선인들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김인경과 같은 신급의 선수도 레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인데, 기나긴 침체기 동안 배운 퍼팅요령 중의 하나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몸은 약간 숙이고, 고개는 가볍게 들라"

 

 

1983년생 박상현도 KPGA투어에서는 노장 축에 속하며, 그의 최근 우승·준우승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한 자기관리가 느껴진다. 근데 노장 위에 노장이 있었으니, 무려 13살 위의 전설이 깜짝 복귀한 것이다. 박상현은 연장 1차전에서 최경주의 세컨샷이 헤저드로 흐르는 것을 보고, 내심 우승을 확신했을 수도 있다. 이는 그의 안정적인 세컨샷에서도 보여졌다. 아이언 피니쉬를 금새 내리면서 흡족해 했었다. 하지만 몇 분 후 백전노장에게 주어진 행운과 그 기회를 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골프는 장갑을 벗기 전까지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Music] 잔인한 게임

https://www.youtube.com/watch?v=98hiCCLUqeo

A Cruel Game #잔인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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