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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일본근대화가 매료시킨, 입맛

by Spacewizard 202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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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이모부가 동네 경양식 레스토랑에 우리 가족을 초대한 적이 있는데, 1980년대 후반 국민학교 4학년 정도로 기억된다. 도시락에 들어가는 인스턴트 작은 돈가스는 먹어 봤지만, 레스토랑의 큰 돈가스는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음식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냥 「돈까스」라 불렀었는데, 포크·나이프·냅킨·스프가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었다. 군생활의 급식메뉴는 거의 정형화되어 있는데, 아주 가끔 나왔던 치킨·햄을 제외한 나머지의 메뉴는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메뉴가 카레·된장국이었는데, 특히 된장국은 「똥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밍밍한 된장국은 남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카레는 사회의 맛과 큰 차이가 없어서 먹을만 했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 오피스 밀집지역에는 인도요리전문점과 일본가쓰전문점이 많이 운영되어, 점심식사메뉴로 자주 선택된다. 하지만 현지음식의 정체성을 어필하다보니 어색한 경우가 많아, 여전히 샛노란 카레와 바짝 튀긴 커다란 돈가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남산돈까스·행운돈까스(한양대 앞)을 가끔 찾는다. 물론 카레는 3분 카레.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카레와 돈가스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존 스튜의 변형, 커리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원거리 항해에서는 먹거리의 부패와 비타민C의 부족이 일상이었다. 비타민C의 부족으로 발생한 괴혈병 사망자가 많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찾은 것이 혼합향신료였는데, 이 혼합향신료는 힌디어로 향신료를 의미하는 마살라(masala)로 불렸다. 선원들은 스튜에 마살라를 첨가함으로써 약간 상한 채소도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커리의 시작이었다. 1772년 워런 헤이스팅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마살라를 헌상했는데, 여왕은 하루 1번 이상 커리로 식사를 할 정도로 인도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출신 시종에게 현지어(우르두어·힌디어)를 배우고, 별장도 인도식으로 꾸몄을 정도로 인도문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커리(curry)는 1780년대 영국 식품회사 C&B(Crosse and Blackwell)이 영국식 마살라를 개발하여 사용한 제품명으로, 「소스」를 의미하는 타밀어 카리(kari)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커리(curry)가 일본식으로 발음되면서, 카레(カレー)가 되었다.

 

프랑스어 (roux) 팬에 지방·버터·기름를 녹인 후에 밀가루를 넣어서 볶은 고형체로, 소스·수프를 걸쭉하게 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 원래 영국에서는 루에 고기·채소를 함께 끓이는 비프스튜라는 음식이 있었는데, 이 스튜 레시피에 커리파우더를 넣었더니 영국의 국민음식이 된 것이다. 심지어 마살라는 쌀(인디카종)과 난(인도식 빵)과 너무 잘 어울렸다. 오늘날 한국에서 먹는 카레가루에는 6종 내외의 향신료를 배합하지만, 인도에서는 훨씬 많은 종류의 향신료를 조합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향신료로는 사프란(saffron)·커민(cumin)·고수(coriander)가 있다.

 

중세시대 유럽의 여관에는 영원히 줄지 않는 「영원한 스튜(perpetual stew)」가 있었는데, 불을 끄지 않고 계속 끊이면서 스튜가 쫄아 줄어들 때마다 물과 잡다한 식재료를 보충했다고 한다. 고기는 사냥꾼이 잡은 토끼·사슴·새 등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헌터스튜(Hunter's stew)로도 불렸다. 강한 자만 살아남던 중세시대였으니, 고객들은 음식의 위생상태·모양·냄새보다는 우려낸 스튜의 맛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조식부페의 퀄리티를 호텔을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삼듯이, 과거 유럽의 여관은 스튜냄비의 불을 얼마나 오랫동안 피웠는지로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맛보다는 건강을 위해 카레를 도입한, 일본

 

18세기 영국해군에서는 이미 카레파우더를 개발하여 함상용 식량으로 개량했었고, 19세기 대영제국은 커리를 북미·아프리카·일본으로 전파했다. 1877년 일본에서 라이스카레를 메뉴로 판매한 최초의 음식점이 등장했는데, 도쿄의 프렌치레스토랑 요네즈후게츠도(米津風月堂)이다. 요네즈후게츠도에서는 커리파우더로 만든 영국식 소스를 제공했으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고 한다. 당시에는 카레를 「라이스카레」로 불렀는데, 쌀밥에 섞어 먹는 소스임을 강조하지 않았을까 한다.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근대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농촌지역 농민들의 소박한 염원은 쌀밥을 마음껏 먹어보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남성들은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일본군은 이미 1890년대에 하루 3끼 쌀밥을 넉넉히 제공하는 식사규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뭐든 과하거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도정한 쌀밥 위주로만 음식을 섭취하다보니, 비타민B1(티아민) 부족으로 생기는 각기병(脚氣病) 발병이 잦아서 일본군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장기항해에서 돌아오면 약 3분의 1 가량의 수병들이 각기병을 앓았다고 한다. 각기병은 근육(특히 하체근육)의 약화·지각이상으로 잘 걷지 못하다가 호흡곤란·심부전 등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각(脚)은 「다리」를 의미한다.

 

1902년 1월 영국은 러시아제국의 남하에 대비하여 일본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이라 한다. 이후 일본해군은 영국해군의 각기병 발병률이 낮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카레수프에서 찾았다. 당시 영국해군의 카레수프는 루에 커리파우더를 풀어서 만들었는데, 밀가루·커리파우더에 비타민B1이 풍부했던 것이다. 이후 일본해군·일본육군은 각각 해군조리술참고서(1908년)·군대조리법(1910년)에 카레라이스를 포함시키게 된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직접 카레루를 만드는 가정이 많으며, 국내에서도 카레루 형태의 일본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1920년 17세의 야마자키 미네지로는 처음으로 커리를 맛본 후, C&B를 모델로 하여 일본식 커리파우더를 연구했다. 1923년 미네지로는 최초의 일본식 커리파우더를 개발하고, C&B를 차용하여 S&B(Sun and Bird, 훗날 에스비식품)를 설립했다. 이후 민간에서도 카레음식(라이스·우동 등)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조선 가정집에도 카레가 보급되었으며, 1969년 풍림상사(훗날 오뚜기)가 국내 최초로 카레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레루 형태의 상품(S&B)

오랫동안 육식이 금지되었던, 일본

 

1853년 7월 일본 시모다항에 당도한 미국의 페리 제독은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벌였고,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일본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를 보며 서구열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던 조선·일본이었지만,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대처하는 능력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메이지유신은 1868년 교토 궁궐에서 벌어진 쿠데타로, 270년간 집권했던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트렸다. 이후 메이지 천황(天皇, 덴노)은 막부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권력 확립을 위해 대규모 변혁을 진행했는데, 그 중심에는 서구열강을 따라 잡기 위한 근대화 계획이 있었다. 이는 메이지유신의 목표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를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일본은 당나라·백제로부터 불교를 전파받게 되는데,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가 살생금지이다. 이에 따라 675년 덴무 천황은 원숭이·닭·소·말·개의 도살·식용을 최초로 금지시키게 되는데, 사실 소와 말·개는 경제(농업)적·군사적 이유가 컸다. 이후 1,200여년 동안 일본인은 계란·채소·곡물·생선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고기섭취로 처벌받는 경우를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일본인들은 고기를 기피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단백질이 부족했던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왜소한 체격으로 변해갔고, 키가 작아 (倭)로 불렸다. 1872년 메이지 천황은 일본인의 체격·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육식금지령을 해제하였을 뿐 아니라, 육식 위주의 서양요리를 장려했다. 1,200여년 동안 고기를 터부시했던 일본인들은 정부정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심지어 10명의 자객이 궁궐에 납입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고기의 맛을 알게 된 계기는 소고기전골(스키야키)의 유행이었다. 스키야키는 원래 생선·채소를 넣고 끓인 전통요리였지만, 생선 대신 소고기를 넣게 되면서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익힌 얇은 소고기를 간장에 찍어 먹는 순간, 1천년 넘게 잠자고 있던 일본인들의 미각이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 고기를 먹지 않았던 만큼, 고기를 꺼려하는 경향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고기를 팥으로 대체한 음식이 양갱·만쥬였다. 양갱(羊羹)은 양의 선지로 만든 요리였으나, 선지를 팥으로 대체하였다. 만두(饅頭)도 밀가루피 속에 넣는 고기를 팥앙금으로 대체하면서 오늘날의 만쥬가 되었다. 2000년 전후 고향과 서울을 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는 먹던 따뜻한 델리만쥬가 생각난다. 달달한 슈크림이 들어간 만쥬가 만두였다니.

 

커틀릿(cutlet, 가쓰레스)는 얇게 저민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프라이팬에서 굽거나 튀겨낸 음식을 말하는데, 뼈가 붙은 송아지 앞다리살을 튀긴 이탈리아 요리 코톨레타(cotoletta)가 원형이라고 한다. 1895년 도쿄에서 포크 가쓰레스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는 커틀릿을 덴뿌라 방식으로 튀기면서 돈가스(豚cut)로 변형되었다. 1929년 궁내청 요리사 출신인 시마다 신지로는 2~3cm 두께의 돼지고기를 튀긴 돈가스를 개발하여 팔기 시작했는데, 오늘날과 같이 칼로 미리 썰어 놓아서 젓가락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1980년대 다양한 패스트푸드(햄버거·피자·치킨)가 자리 잡기 전에는, 경양식이 전성기를 누렸다. 이전 글 <일제가 들여온 주전부리, 빵집>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전성기를 누렸던 전통적인 지역빵집들은 1980년대 패스트푸드에 밀리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에 힘없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었다. 과거의 기억·향수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는 음악과 함께 음식이 있다. 가끔은 이상은의 「담다디」가 흘러나오는 경양식집에서 식전 스프에 잔뜩 뿌린 후추향이 생각나는데, 이 때 개인적으로 후추를 화끈하게 뿌린 배경에는 후추냄새로 승부하는 부림시장의 뜨끈한 우동이 기여한 바가 크다. 이전 글 <14일 마케팅의 원조격, 화이트데이>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14데이 중에 5월 옐로우데이가 카레 먹는 날이라고 언급했었다. 누가 굳이 5월 14일에 맞춰 카레를 먹겠는가. 생각난 김에 매운 카레 한번 만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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