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위구르인들이 중국 한족에 저항한 역사는 짧지 않으며, 특히 2010년대 들어 시진핑 집권기에 신장위구르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더 세지고 있다. 이는 2014년 4월 시진핑이 우루무치를 방문했을 당시 발생한 기차역 폭탄테러가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중국정부는 대규모 강제집단수용소를 운영하며 제노사이드 수준의 인권탄압(감금·고문·강제혼인·윤간·강제불임·장기적출·언어말살·이슬람배척 등)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많다. 또한 집단수용소에 감금된 위구르인들은 공산당 세뇌교육을 받으며, 그 집단수용소 인근에 위치한 직물공장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방에서는 이에 대한 제재를 통해 신장산 면화 사용 규제에 들어갔다.2021년 12월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을 시행했으며, 2024년 초 유럽연합(EU)도 「강제노동 결부상품 수입금지 규칙」을 입법했다. 오늘은 위구르족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말그대로 강한 민족, 투르크
투르크(Türk)는 튀르크어족 언어들을 모어로 사용하는 민족집단을 말하며, 「강한」을 의미하는 고대 튀르크어 튀뤼크(Türük)에서 유래했다.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돌궐에서 시작되었는데, 돌궐(突厥)은 투르크를 음역한 한자이다. 오늘날 대표적인 투르크계 국가는 다음과 같다.
튀르키예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러시아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러시아 다게스탄 공화국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90% 이상의 한족과 그 외 54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5개 민족의 거주지역은 자치구(自治區)로 형성되어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영토의 6분의 1(한반도 8배 가량)를 차지하는 최대 행정구역이다.
광서 장족 자치구(廣西壯族, 좡족)
영하 회족 자치구(寧夏回族, 후이족)
서장 자치구(西藏, 티베트족)
신강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위구르족)
내몽고 자치구(內蒙古自治區, 몽골족)
신장위구르가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받는 이유는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중국 내 석유·천연가스 매장량의 30% 이상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투르크계 중 하나인 위구르족은 위구르어로 「단결·연합」을 의미한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가 위구르족 정착지를 정복하면서, 「새로운 강역」이라는 의미로 새로 붙힌 명칭이 신강(新疆, 신장)이다.
당나라를 압도했던, 위구르제국
6~7세기 동돌궐 지배 하에서 위구르족은 바이칼호 남부의 설연하(偰輦河, 세렝가강) 유역에서 거주하였는데, 세렝가강은 몽골에서 러시아의 바이칼호로 흘러가는 강이다. 744년 쿠틀록 빌게 퀼 카간이 동돌권을 멸망시키면서 오늘날의 몽골 위치에 위구르제국을 세웠다. 「하늘의 지명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카간은 투르크계·몽골 국가의 군주를 의미하며, 튀르크에서 카간·카안으로 불리던 명칭이 몽골에서 칸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위구르제국는 남방에 위치한 당나라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기마)을 보유하고 있었다. 757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군은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진군·진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장안은 위구르군에 의해 유린·파괴되었으며, 황손을 포함한 수많은 당나라인을 노예로 끌고 왔다고 한다. 위구르제국은 당나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유목제국 역사상 최초의 도시 오르두 발릭(Ordu Balïq)을 건설하여 수도로 정했는데, 현재의 카라 발가순(Qara Balɣasun)이다. 오르두 발릭은 내륙무역의 중심지로서 크게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8세기경 중국 내부의 혼란을 피해 마니교 사제들이 오르두 발릭으로 들어오면서, 마니교는 위구르의 국교로 채택되었다.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는 「빛의 사도」를 자칭한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가 3세기에 창시한 이원적 종교로,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되었다. 이원론은 세상은 선(영)과 악(물질)이 구분·대립하는 가운데, 물질로 구성된 인체는 엄격한 규칙생활·고행·금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교리이다. 마니는 스스로를 아브라함-석가모니-예수-조로아스터를 이은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7세기 중국황실에 마니교 선교단이 들어가 포교활동을 허가 받았으나, 9세기 마교(魔敎)로 몰리면서 종교활동이 금지되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자리잡은, 위구르족
9세기 들어 위구르제국은 칸 계승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832년에는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엄청난 부가 몰린 오르두 발릭은 많은 유목민족의 타겟이 되었고, 결국 840년 키르기스(Kyrgyz)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몽골초원의 남·서로 이주했는데, 남쪽으로 이동하여 하서회랑에 정착한 그룹을 「하서위구르」, 서쪽으로 이동하여 천산산맥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진 그룹을 「천산위구르」라 불렀다. 하서회랑(河西回廊)은 말 그대로 황하강 서북쪽으로 길게 난 평평한 복도 같은 길로, 서안(한나라 수도)에서 서역을 한번에 연결하는 몽골고원·티베트고원 사이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복도·회랑은 지붕·천정이 있는 기다란 통로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복도는 양쪽에 벽·창문이 있는 반면에, 회랑은 한쪽에만 벽·창문이 있다. 아래에는 만년설로 덥힌 기련산맥이 있고 위로는 고비사막이 있는 지형을 회랑이라고 표현하다니, 예술적인 작명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하서회랑이 통과하는 중국 간쑤성(감숙성)은 중국·북방흉노 모두에게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이전 글 <동학사상을 아이다움으로 실천한, 방정환>에서 중국인들이 서역(현 중앙아시아·아랍)사람을 호인이라 불렀다고 언급했었다.
10세기 초반 생겨난 하서위구르는 인근 중국군벌과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나, 1026년 탕구트족(티베트계)의 공격으로 완전히 토벌되었다. 10세기 중앙아시아에는 투르크계 카라한왕조가 있었는데, 934년 카라한왕조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는 이슬람화되었다. 이 때 이슬람화된 천산위구르는 중앙아시아에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전수했으며, 투르크어를 확산시켜 나갔다. 이슬람을 종교로 하는 위구르족은 회회(回回)·회흘(回紇)·회골(回鶻)이라고 불렸는데, 이슬람을 회교(回敎)로 부르는 것도 위구르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칭기스 칸의 등장 이후 천산위구르는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몽골족 다음 가는 지배계급(색목인)으로 우대를 받았다. 이는 몽골제국이 자리잡은 그 자리에서 과거 위구르제국을 경영해 본 경험이 있는 민족이라는 커리어가 반영된 것이다. 훗날 몽골제국이 여러 칸국으로 쪼개지면서는 천산위구르는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 하에 놓였다가, 차가타이 칸국에서 분리된 모굴리스탄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위구르족
위구르계 귀화성씨로는 덕수장씨·경주설씨(구 고창설씨)·임천이씨·상곡마씨가 있는데, 이 성씨들의 시조들은 세렝가강 근처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장순룡(덕수장씨 시조)은 원나라 제국공주(충렬왕 정비)의 시종으로 고려에 들어와 귀화한 인물로, 쿠빌라이(원 세조)의 딸 제국공주(齊國公主)는 고려왕실과 최초로 혼인한 몽골왕족이었다. 고려의 관직을 지낸 장순룡은 황해도 개풍군 덕수리를 식읍으로 받아 후손들이 덕수(德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이현(임천이씨 시조)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공양왕시대 명나라 남경을 다녀온 공으로 임천을 식읍으로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망명한 설손(경주설씨 시조)은 공민왕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환대를 받았는데, 원래는 원나라 고창설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고, 설씨는 설연하(세렝가강)의 앞글자에서 유래했다.
칭기즈 칸에게 협조한 공로가 있는 고창설씨 가문은 원나라 중앙관직에서도 활약이 컸다고 한다. 고창설씨의 가풍은 자녀교육에서 찾을 수 있는데, 무신이었던 위에린테무르(고창설씨 시조)는 자식들에게 학문(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이후 과거합격자가 연이어 배출되면서 위구르 출신 원나라 명문가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설손은 단본당(端本堂, 황실교육기관)에서 황태자의 경전교육을 담당했었는데, 원나라 왕실에 숙위로 와 있던 빠이앤티무르(고려 충숙왕 차남, 훗날 공민왕)와 가깝게 지내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왕자를 원나라에 일정기간 억류시키면서, 정비로 맞은 원나라 공주가 출산한 아들만 고려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숙위(宿衛)는 궁궐에서 군주를 호위하며 지키는 제도·사람으로 정의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주변국의 왕자들을 의미한다.
원나라는 순제시대 들어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359년(고려 공민왕 8) 설손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5명의 아들을 포함한 식솔들을 거느리고 원나라를 떠나 고려로 넘어왔다. 반원정책을 추진 중이던 공민왕은 설손에게 극진한 예우를 하며, 고창백(高昌伯)이라는 칭호와 함께 전답·집을 제공했다.
여말선초 최고의 외교관, 설장수
고려로 이주한 이듬해인 1360년 설손은 숨을 거둔다. 공민왕은 설장수(설손 장남)를 특히 아꼈는데, 부친의 상중이었음에도 설장수가 과거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1362년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20세의 설장수를 포함한 총 33명이 합격했는데, 동기 중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관직에 오른 설장수가 외교통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는 설사(설장수 삼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1367년 설사는 명나라에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하였고, 이후 2차례(1369년·1370년)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주원장은 반원정책을 취해왔던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봉하기로 했는데, 설사가 임명장·옥새를 가지고 와서 책봉조치를 시행했던 것이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화답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 설사의 조카인 설장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실력·인맥을 두루 갖춘 설장수는 원·명 교체기에 대체불가한 대중외교관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된 후, 친원정책을 추진하던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했다. 우왕을 추대한 이인임 정권은 친원정책을 펼치면,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동시에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18년 만에 재개했다. 하지만 이색 계열의 개혁소장파(정도전·정몽주·하륜·이숭인·김구용·권근·박의중·박상충 등)는 친원정책을 격렬히 반대했고, 북원사신에 대한 영접거부를 고집하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반원파와 뜻을 같이 하던 설장수도 중앙관계에서 밀려나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도, 고려왕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1388년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이성계가 이인임 일파를 숙청한 무진피화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는데, 공양왕 옹립에 공을 세웠던 9명의 관료들이 좌명공신(정란 9공신)으로 책봉됐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9명의 동지는 이성계·심덕부·지용기·정몽주·설장수·성석린·조준·박위·정도전이었다. 이전 글 <오지에서 시작된 문벌, 청송심씨>에서는 서울집(경파)로 불린 청송심씨 심덕부의 후손이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내분은 발생하기 마련이며, 정치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정몽주는 급진개혁파(이성계·정도전)를 정계에서 축출했고, 왕세자를 조현 명분으로 명나라로 보내면서 설장수를 특사로 함께 보낸다. 조현(朝見)은 신하가 임금을 찾아 뵙거나 임금이 상왕·태후 등을 찾아 뵙는 것을 말하는데, 정몽주의 의도는 고려왕권(공양왕·왕세자)의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급진개혁파가 기획 중인 개국노선과 선을 분명히 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설장수는 급진개혁파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1392년 7월 30일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즉위교서 반포한 직후, 설장수를 조선시대 최초로 경상도 장기현 유배에 처해졌다. 이전 글 <불모지에서도 계속 피어난, 기독교>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배교의지를 인정받은 정약용이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설장수의 혐의는 이색·정몽주·우현보 등과 함께 도당(徒黨, 불순한 무리)을 지어 내란을 음모했다는 것이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호적편제 단위로 당(黨)을 사용했는데, 훗날 「무리·단체」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참고로 주나라 1당은 500가구가 사는 땅을 일컫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대명관계를 안정시킬 만한 유능한 외교관이 필요했었는데, 그래서인지 1393년(태조 2) 1월 설장수는 6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이성계는 사역원을 설치하여 그 수장(제조)로 설장수를 임명했다. 사역원(司譯院)은 외국어 교육과 통·번역 사무와 실무를 맡던 기관으로, 역관 선발시험을 개편하고 역관들의 유교적 지식과 학문적·인성적 기초를 갖출 수 있도록 사서·소학을 이수토록 하였다. 1396년(태조 5) 이성계는 설장수에게 계림(鷄林, 현 경주)을 관향으로 삼도록 사성하면서, 설장수는 경주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고창설씨가 조선시대의 경수설씨가 된 것이다.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정종이 즉위했다. 다음달 9월 설장수는 세자책봉사절로 명나라로 가든 도중 주원장의 부고소식을 전해 듣은 후, 진향사(進香使, 중국황실의 국상에 조의를 표하는 사행단)로 임무를 변경하여 마지막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1399년 6월 명나라에서 귀국한 설장수는 건강악화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구르 출신 이방인이 한때나마 한반도의 외교사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출입국·이민관리청(이민청)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개정안이 2024년 2월 국회에 상정되었는데, 21대 국회회기가 5월에 종료되면서 폐기된 바 있다. 이민청 설립이슈는 중장기적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을 국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구문제를 해결할 대안 중 하나일 수 있다. 따라서 22대 국회에서도 치열한 논의가 예상되는 바, 고려말 우리민족의 개방성·포용성이 오늘날 한국의 이민정책에도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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