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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

by Spacewizard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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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만 집 없는 설움을 겪은, 정도전

권력탄압의 경험이 키워준, 민본사상
한양천도를 직접 지휘하면서 선택한 자택부지, 종로구청 근방

피살 후에는 중부학당과 관청으로 이용  
유학자들로 집터 선정에서 중시했던, 풍수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jYpTky1XG8g

 

삼봉 정도전은 1342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였고, 6~7살의 유년시절과 부모 시묘살이 5년 동안 그리고 유배생활을 제외하고는 주로 경기에서 살았다. 유배가 풀린 후에도 정도전은 특정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채 경기를 떠돌다가, 삼각산(현 북한산) 밑에 삼봉재(三峯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때 정도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지만, 정도전을 미워하던 동향 출신의 한 재상이 정도전의 서재를 헐어 버리는 바람에 처자식을 데리고 부평으로 서재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재상이 정도전의 서재자리에 별장을 짓겠다고 하여 또 다시 김포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정도전은 관직생활 중 여러 번의 파직·복직을 반복하면서, 부동산(토지·주택) 없는 서러움과 권력탄압을 제대로 겪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오히려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민본(民本)사상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1383년 42세의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 현실정치를 논하면서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는데, 조선건국 9년 전의 일이다. 1388년 제1차 요동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밀직사(密直司, 왕명출납·군사기밀 관장) 부사로 승진하였고, 이후 1392년 조선건국을 주도하면서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한양천도를 진두지휘한 정도전이 직접 택한 집터가 오늘날의 종로구청 일대의 드넓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 이방원에 의해 대저택은 잘게 쪼개지게 되었다. 여기서 파편화된 정도전의 집터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현재까지 왔는지 한번 알아보자.

정도전 집터 일대의 현재 [출처:오마이뉴스]

정도전 집터의 구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울인문지리지 「한경지략」에서는 정도전의 집터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한다.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현 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이 자리잡은 서당터는 정도전가의 서당자리요,

지금 제용감터는 정도전가의 안채자리요,

지금 사복시는 정도전가의 마궐(마구간)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이다"

집터 1) 서당 자리 (중부학당 - 수송보통학교 - 종로구청)

사부학당(사학)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설치연도는 다음과 같다.

 

남부학당(남학) : 1411년

중부학당(중학) : 1422년

서부학당(서학) : 1435년

동부학당(동학) : 1438년

 

고려의 오부학당 제도를 본떠 만들었으나, 끝내 북부학당은 설립하지 못했다. 개국초기 동학·서학은 사찰을 빌려 사용하였다. 1411년(태종 11) 남학이 독립학사로 설립되면서, 10여년 동안 중학도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1422년(세종 4) 북부 관광방에 속했던 정도전 서당자리에 중학 독립학사가 설립되었다. 경복궁의 왼쪽을 감아 흐르던 삼청동천의 하류(동십자각에서 청계천까지의 지류)를 근대에 와서는 중학천(中學川)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학 앞을 흘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학은 1894년에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사부학당 위치 [지도:카카오맵]

1922년 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가 2층 벽돌건물로 신축개교하였으나, 1936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1938년 학교건물이 3층 철근콘크리트로 다시 세워지고, 1950년 6월 서울수송국민학교로 학교명이 변경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휴전 이후 다시 수송국민학교로 사용되었다. 수송국민학교는 학교간 통폐합으로 폐교되었는데, 이는 강남개발 등으로 인해 도심지의 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른 조치였다. 1975년부터 종로구청이 학교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1992년 5층 규모로 증축했다. 현재는 종로구청 신청사의 신축을 위해 철거된 후, 2024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2022년 6월 착공하였다.

 

집터 2) 마구간 자리 (사복시 - 경찰 기마대 - 이마빌딩)

사복시(司僕寺)목장·말사육·수레·마구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병조 소속)으로, 산하에 내사복시(궁궐)·외사복시(도성)·목장(지방)을 두고 있었다. 2023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종로구청 신청사 공사현장에서 2022년 발견된 주춧돌과 기단이 사복시의 유적으로 최종 확인된 점으로 비추어 보아, 사복시 부지는 서당자리의 일부까지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복시는 문관들이 부임을 꺼리는 자리였는데, 업무특성상 항상 말똥냄새가 나고 말조련으로 인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유래한 단어가 「매우 더러운 개천」을 의미하는 사복천(司僕川, 사복시의 개천)이 있다.

 

사복시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하인을 「거덜」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고위관리 행차 앞에서 휘휘 저으며 사람들을 몰아 세우는 모습이 허세로 가득차 우스꽝스러웠다고 한다. 이후 거덜이 몸을 흔들면서 우쭐대는 모습을 「거덜거리다」라고 하였고, 말이 몹시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거덜마거리다」라고 했다. 요즘은 「거들먹거리다」로 그 음이 바뀌었다. 이처럼 하인이 마치 높은 신분인냥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별것 없는 주제에 우쭐거리며 흔들기만 하느라 밑천을 드러내는 것을 「거덜이나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663년(현종 4) 사복시 제조 허목이 그림지도·통계표로 집대성한 「목장지도」를 통해 조선후기의 전국 목장 138개소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술 계통의 기관에는 자체의 수장(首長)을 두기 보다는 겸직으로 제조(提調)를 임명하여 지휘·감독하게 하였는데, 보통 종1품 내지 2품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1946년 2월 25일 서울경찰기마대(구 경기도경찰부 기마경찰대)가 경찰 100명과 마필 150두의 규모로 창설되었는데, 광복 후 치안유지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1972년 현재의 위치인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했다.

1983년 준공된 이마(利馬)빌딩은 터가 말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건물이름을 지었다. 1층 로비에는 말조각상과 지하 1층 아케이드의 수로가 보이는데, 물이 고이지 않게 흐르도록 한 이유는 말이 항상 신선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함이다. 오래 전 정도전이 이 땅을 점지할 때부터 아들 100명과 손자 1,000명을 볼 수 있는 백자천손(百子千孫) 명당이라 하였는데, 실제 이마빌딩에 입주한 많은 기업들이 이마빌딩에서 성공의 초석을 쌓았다. 회계업계 1위인 삼일회계법인, 코카콜라·ING생명 등의 외국계 기업이 이마빌딩을 거치면서 큰 성장을 이뤘으며, 월드컵유치위원회가 이마빌딩에 입주한 후 극적으로 월드컵 공동개최권을 따냈다. 2003년 입주한 삼표는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키며 회사를 성장시키고 있다. 

 

집터 3) 안채 자리 (제용감 - 사사관리서 - 황성신문 사옥 - 농상공학교 - 합동통신 - 서울지방국세청 등)

제용감(濟用監) 명나라에 진헌하는 인삼·직물직조·비단염색 등의 일을 하는 기관(호조 소속)이다. 상의원은 왕실 의상·신발·장신을 전담했고, 제용감 소속의 침선장·침선비은 주로 관리의상을 만들면서 상의원의 업무를 도왔다. 상의원·제용감은 원래는 독립기관이었으나, 조선 말기 육전조례가 제정되면서 각각 공조·호조 산하에 소속되게 된다. 1902년 원흥사(현 창신초등학교)에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신설되었는데, 이는 전국 사찰·승려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궁내부 소속)이었다. 이후 제용감 건물로 자리로 옮겼다가 1904년에 폐쇄된다. 1904년 4월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세번째 사옥으로 약 4개월간 사용했는데, 황성신문의 첫 사옥은 현재의 세종로 사거리 기념비전 자리에 있었고, 두번째 사옥은 현재의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부근이었다고 한다. 1904년 8월 황성신문은 현재의 서린동 영풍빌딩 부근으로 네번째 사옥을 옮겼고, 이 곳에서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신문을 발행했다.

황성신문이 떠난 이후, 신설된 농상공학교에 건물을 넘겨준다. 1904년 6월 설립된 농상공학교는 상공학교(1899년 설립)에 농학과를 통합되었으며, 그 해 8월에 제용감 건물로 들어가 9월 초에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1906년 3개 학교(공업전습소·수원농림학교·선린상업학교)로 분리되었는데, 이들의 후신이 각각 서울공고,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전 농과대학), 선린정보산업고(전 선린중·선린상고)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합동통신(1980년 12월 연합통신으로 흡수)이 현대식 빌딩을 신축해 언론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서울지방국세청, 연합뉴스 사옥, 코리안리 빌딩, 석탄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수송동 일대는 과거 조선 건국자들이 거주하고 활동하던 곳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의 공간이다 보니 우여곡절이 많은 동네였다. 살아서 6년, 죽어서 600년 조선을 다스린 정도전의 아들 4명 중 장남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세종시대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양택의 음덕으로 멸문지화를 면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정도전이 「수명을 다했다」는 의미로 수진방(壽盡坊)이라고 동네이름을 바꿨다. 이색의 영당이 제자 정도전의 집터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도전이 최후를 맞이한 송현방(松峴坊) 내 집터(남은 첩 소유)는 현재 트윈트리타워(전 한국일보 사옥) 근방으로 추정된다. 정도전의 동선을 보아하니 그 당시 그의 위세가 짐작이 된다.

 

[Music] 인생의 모든 것

https://www.youtube.com/watch?v=3KeWbs5zuhA

All About Life #인생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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