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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왕릉 위에서 세워진 역사, 골프장

by Spacewizard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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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9홀 골프장, 효창원

청량리 골프장에서 골프 보급에 기여한, 경성골프구락부 

국내 최초 18홀 군자리 골프장, 현 서울어린이대공원 

1980년대까지 전국 골프장 수, 50개 미만

올림픽 이후 지자체가 인허가권을 가지면서, 골프장 수 증가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WE6KrE90D4s

 

2022년 2월까지 대한민국에서 운영 중인 골프장은 499개소(군·경 골프장 41개소 포함), 18홀로 환산할 경우 576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2014년까지 침체기였던 골프산업은 2015년 이후 지속적인 성장기를 거치면서 2019년에 호황의 정점에 달하였다. 하지만 COVID-19라는 변수로 해외골프 관광객이 국내 골프장의 내장객으로 전환되면서, 사실상 골프산업의 정점을 능가하는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COVID-19 엔데믹 이후 내장객 수와 그린피의 하락이 예상되며, 향후 토지수용의 한계 등으로 과거처럼 골프장이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렇듯 현재의 골프는 매우 친숙하고 중독성 있는 레저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전 글 <야외에서 즐겨야 제대로, 골프>에서도 골프를 즐기게 되는 이유에 대해 언급했었다. 오늘은 국내 골프의 시작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국내 최초의 골프장, 효창원

국내 최초의 골프장은 1921년 6월 1일 용산 효창원에 조성·개장한 9홀 골프장이고 하는데, 그 전인 1897년 영국인들이 원산세관에 설립한 6홀 코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효창원(孝昌園)본래 문효세자(정조 장자)와 의빈 성씨(문효세자 모)의 무덤이 있던 왕실묘역이었는데, 조선호텔(조선총독부 철도국 산하)의 고객 유치를 위해 골프장으로 개발된다. 1910년 국권찬탈과 함께 대한제국은 '이씨 왕조의 가문'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어 불렸고, 이왕가와 관련된 사무 일체를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 일본 궁내성 관할)이 왕릉터를 골프장 부지로 임대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다. 골프코스는 문효세자의 묘역을 둘러 감싸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1924년 4월 9일 종묘에 보관된 어보(御寶, 1471년 제작) 2개가 분실된 사건이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효창원 골프장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보(寶)·인(印)이라는 2가지 도장을 보인(寶印)이라 통칭하는데, 보(어보)는 국왕(왕비 포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도장이며, 인은 보를 제외한 일반도장으로 왕실은 물론 각급 관청에서도 사용되었다. 왕실 입장에서 어보의 분실은 국가적 위기상황에 해당했겠지만, 이왕직의 어보 담당자인 이항구(이완용 아들)은 아침부터 자동차를 몰아 효창원에 가서 하루종일 골프놀이에 정신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효창원 골프장은 산악지형이라 어려운 편이었으며, 골프공이 주변 행인들을 자주 맞춰서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1924년 12월 2일 효창원 골프장은 폐장하고, 이후 공원으로 바뀌었다. 

이완용 3대 가족사진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완용 3대 가족사진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또 다른 왕릉 위에, 청량리 골프장

1924년 12월 효창원 골프장의 폐장과 동시에, 의릉에 16홀 '청량리 골프장'이 개장하였다. 1724년 조성된 의릉은 경종과 선의왕후(경종 두번째 비)가 묻힌 곳으로,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릉이 조성된 천장산(天藏山)'하늘이 숨겨놓은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당으로 왕실의 여러 무덤이 자리했다. 대표적으로 홍릉(명성황후)·영휘원(순헌귀비 엄씨, 영친왕 모)·숭인원(이진, 영친왕 아들)가 조성되었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영구임대 형태로 의릉에 청사를 세웠는데, 우측 능선을 깎아 축구장·청사를 만들고, 좌측 능선도 건축을 위해 산을 깎았다고 한다. 1995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며 내곡동으로 이전한 후에는, 그 자리에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섰다.

 

1924년 만들어진 경성골프구락부(클럽)가 청량리 골프장을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반인에게 골프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좁은 부지로 인해 16홀 이후에 1번홀과 2번홀을 돌아야했도, 당시 은행 중역들과 조선인들이 라운딩을 즐겼다고 한다.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도 이 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왕릉 터가 골프장으로 유용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량리 골프장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29년 유릉(현 서울어린이대공원)로 이전되어 '군자리 골프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골프장은 모두 이왕직이 관리하던 왕실능원자리로, 이는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서 이왕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다.

현 어린이대공원 부지, 군자리 골프장

1930년 개장한 군자리 골프장은 국내 최초의 18홀 골프장으로, 영친왕(이은, 고종 7남)의 주도 아래 순명황후(순종 비)의 묘역이 있던 유릉 터 30만평을 무상임대하였고 건설비·운영비를 지원했다. 1920년 영친왕은 이방자와 결혼하면서 일본 왕족 대우를 받았고, 1923년 일본 육사대학을 졸업한 이후 골프에 입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친왕이 선대왕비의 능자리에 선뜻 골프장을 세운 배경에는 영친왕의 유럽여행이 있었다. 영친왕 부부는 6.10 만세운동이 있었던 이듬해 1927년 5월 부터 1928년 4월까지 11개월 간 유럽 13개국을 여행했는데, 최소 17번의 라운딩을 하면서 명문 골프클럽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유럽여행 중 영친왕 출처 세계골프역사박물관
유럽여행 중 영친왕 [출처:세계골프역사박물관]

1930년대 너른 능묘 잔디밭에 부자들이 모이자, 군자리 능리 주변의 굶주린 아이들은 잔디를 가꾸거나 골프백을 들고 모던보이들의 캐디가 되었다. 1938년 1월 1일 잡지 삼천리에 「서울의 상류사회, 입회금만 삼백원 드는 골프장」이라는 기사를 실렸는데, 그 내용에는 경성골프구락부는 조선 안의 고관·일류명사들만을 멤버로 한 고급사교 구락부로 세인의 흥미를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골프를 치러 동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하고, 신의주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경성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경성골프구락부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들(회원추천·입회비·연회비 등)이 있었지만, 보통회원 416명 중 조선인이 43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회원의 대부분은 친일행위를 했던 이들로, 당시 조선 최대 매판자본가였던 민대식·민규식 형제(민영휘 후손), 이항구, 중추원 참의, 변호사 등이 포함되었다.

 

전후 재건과 함께한, 골프장 건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전쟁으로 인해 골프장이 폐쇄되었다. 해방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다시 골프장으로 개장되면서 '서울컨트리클럽'이 되었지만, 한국전쟁 중에 파손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내에는 주한미군을 위한 휴양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주말·휴가철에 주한미군들은 일본 오키나와로 휴양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안보공백을 우려한 한국정부는 1954년 신속히 서울컨트리클럽을 재건하게 된다. 국내 2번째 골프장은 1956년 부산 해운대구 중동에서 9홀로 개장한 부산컨트리클럽으로, 1965년 18홀로 확장한 후 1971년 금정구 노포동으로 이전했다. 1958년 미군전용 18홀 골프장이 용산 미8군 기지 내에 건설되었는데, 이 골프장은 1993년 성남(현 위례)로 이전되면서 용산가족공원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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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8홀 규모의 한양컨트리클럽가 개장되었는데, 1970년 36홀로 확장하였다. 1972년 서울컨트리클럽을 폐쇄하면서 한양컨트리클럽이 서울컨트리클럽의 주식 전부를 인수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서울컨트리클럽이 이전할 장소로 관악컨트리클럽(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도 물망에 올랐었는데, 결국 한양컨트리클럽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1966년 박정희의 지시로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훈련용 부지를 육사 전용 9홀 골프장(현 태릉컨트리클럽)으로 조성하였고, 1970년 18홀로 확장했다. 1966년 고양에서 개장한 뉴코리아컨트리클럽은 과거 신록회(정재계 골프모임)에서 시작되었는데, 현재는 4개 기업(현대중공업·한화·해성·코오롱)에서 지분을 공동보유·공동운영하고 있다. 1967년 개장한 관악컨트리클럽은 서울대학교의 교사 이전을 위해 1971년 경기 화성(현 리베라컨트리클럽)으로 이전하였다. 삼성물산은 1968년 안양컨트리클럽 개장을 시작으로 골프장 사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말까지는 골프장이 전국에 50개 미만이었기 때문에, 골프장 이름을 지명 뒤에 CC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1988년 이후 인허가 주체가 청와대에서 지자체로 변경되면서, 골프장의 수가 급증했다. 이 때부터 회원제 골프장들이 회원권을 더 비싸게 팔기 위한 마케팅 차원에서, 다양한 골프장명이 등장했다. 1999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골프 대중화를 선언하면서, 골프회원권시장이 투기 성격을 띔과 동시에 골프장들은 차별화(클럽하우스·네이밍)에 노력했다.

 

[Music] 페어웨이를 향한 아침

https://www.youtube.com/watch?v=PuOpVPKPM6E

a Morning to the Fairway #페어웨이를 향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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