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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소외받고 이용당하다 초토화된, 4.3

by Spacewizard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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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룰 때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는데, 특정사건에 대해서 정치진영의 논리가 개입됨으로써 흑백선전으로 비화되는 경우이다. 특히 많은 기억과 기록이 남아 있는 근현대사에서 이런 경향이 짙은데, 일단은 사실 위주의 열거로만 정리를 하면 알아서들 판단했으면 한다. 여기서는 봄이 시작되는 이맘때면 마주하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가장 먼 유배지, 제주

제주도는 한성으로부터 약 3,000리길 거리의 섬으로, 조선시대 가장 먼 유배지였다. 제주도로 이동하는 과정도 여기저기 돌아가는 고된 여정이었기에, 제주도 유배지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도 유배는 거물급 죄인들을 주로 보냈다. 폐위된 광해군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강화도에서 14년을 지내다가 남은 4년은 제주도에서 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안동김씨와의 정쟁에서 탄핵을 당한 김정희도 제주도 유배생활을 약 9년간 했으며, 1689년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길에 태풍을 맞아 보길도(완도)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는 조선시대 내내 유배지였으며, 또한 조정의 과한 공납 요구로 핍박받던 섬으로 조정(국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추사 김정희 유배행렬 재현 모습 출처 한겨레블로그
추사 김정희 유배행렬 재현 모습 [출처:한겨레블로그]

끝까지 일본에게 이용 당한, 원격지

지리적 특성상 일제 초기에는 중국과 러시아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는 미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다. 실제 가미카제와 가이텐 특공대를 위한 기지, 고사포 진지, 해안동굴 진지 등 곳곳을 요새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강제 노역 및 징병, 막대한 공출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그러면서 제주도민들은 일본과 본토로 많이 빠져나갔다고 한다. 일제세력은 해방 후 약 보름 뒤에나 철수하면서 엄청난 수탈을 하였는데, 공출로 거뒀던 곡물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1945년 9월 남조선인민위원회(훗날 남조선인민노동당)가 설립되었다. 남조선인민위원회가 목표했던 바는 일제순사들의 청산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일제청산 명분 외에도 치안공백을 원했을 수도 있다.

제주 송악산 해안가에 위치한 가이텐 특공대 기지 흔적
제주 송악산 해안가에 위치한, 가이텐 특공대 기지 흔적

행정 공백을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미군정

미군은 해방 후 25여일이 지난 9월 9일 국내로 들어오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통치를 시작한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최남단에 멀리 떨어진 섬에 불과했기 때문에, 먼저 본토에 대한 행정권을 확립한 후 제주도를 정권 하에 놓으려는 계획이었다. 해방 후 3달이 지난 11월 9일이 되어서야 미 제59군 정중대가 제주도에 진입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이 때 미군정은 친일파(공무원·경찰)를 척격하지 않고 유임시켰는데, 이는 높은 문맹률과 심한 제주방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일제 행정부 하의 공무원들은 기초교육을 통해 행정업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 문맹률이 현격하게 높았던 도민들을 다시 교육시켜서 행정에 투입시키는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친일파 경찰을 대체할 경찰 자원을 임용하기에는 치안 공백기가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고, 심한 방언으로 인해 본토 경찰을 발령낼 수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제주도는 경찰 82%가 친일파 출신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미 항복한 일본은 더 이상 적국이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세력(소련·중국·북한)이 주적이었기 때문에 친일파를 그대로 유임한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의 제주폭격으로 가뜩이나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 친일파까지 중용하다보니, 제주도민들의 미국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다고 한다. 일제수탈을 피해서 피난갔던 도민들 중 6만여명이 해방 이후 돌아왔으나, 한정된 일자리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실업률·흉년·전염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또한 인구가 많아지니 그만큼 외지에서 경찰병력을 보강하였다. 1946년 7월 미군정은 도제개혁로 전라도에 부속되었던 제주를 도로 승격시키면서, 상위 행정단위인 전라도로부터 지원은 끊기고 세금은 더 많이 납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기회를 맞게된, 남로당

1947년 3월 1일 대규모 3.1절 기념행사 중에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 주관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및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목표로 하는 모임이 예정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군정은, 미리 본토에서 300여명응원경찰 배치하여 감시했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해방 전후 경찰기마대가 활동을 했다고 언급했다. 3만명 가두행사의 주변을 통제하던 기마경찰이 갑자기 뛰어든 6살 꼬마를 말발굽으로 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이를 인지하지 못 한 경찰은 그냥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목격한 군중들은 그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를 했고, 그 경찰은 당황하여 경찰소로 빠르게 도망을 간다.

 

군중들은 경찰서 앞까지 몰려 들면서, 경찰서 안에 있던 다른 경찰들은 군중들의 폭동으로 오해하여 발포하게 된다. 이 발포로 경찰서 앞에서 군중 6명이 사망했고, 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에 군중들은 경찰의 사과·보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다시 무력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제주신보의 기자들의 중재로 사태는 일단락된다. 현재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념대립이 극심한 시기에는 어느 정치집단이든 시체팔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제고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의 남로당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기회였음은 분명했다.

1947년 3월 제주경찰서 앞 기관총을 거치하고 시민진압 중인 경찰 출처 영암일보
1947년 3월 제주경찰서 앞 기관총을 거치하고 시민진압 중인 경찰 [출처:영암일보]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는 제주도 근로자의 약 95%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사실 본토에서는 박헌영이 주도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이 발생하였는데, 그 연장선으로 제주도는 6개월 뒤에 총파업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청 연설에서 조병옥(중앙경무부장, 한민당 소속)은 건국에 저해되는 불온한 사상은 제거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연설을 했는데, 이는 총파업을 주도한 남로당을 향한 발언이었다. 이후 파업시위가 격해지면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추가로 입도했는데, 이는 제주경찰의 약 20%가 파업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남로당 당원과 추종자들은 진압세력을 피하여 한라산 속으로 숨어 들어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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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게 끝날 뻔한, 4.3 습격

 

1948년 2월 UN에서 남한 단독선거 및 5월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자, 남로당 세력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봉우리에서는 봉화가 오르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대 350명이 죽창을 들고 일제히 경찰·우익인사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무장대가 습격한 24개의 경찰서 중 12개를 파괴하고 2개의 선거구 투표소가 불에 탔으며, 습격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인사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사살되었다. 미군정에서는 군 투입을 고려하였으나, 김익렬(모슬포 제9연대장)이 평화적 해결을 제안하였다.

 

이에 4월 28일 남로당 제주지부장 김달삼과 김익렬 연대장이 구억리(현 제주영어도시 인근)에서 평화협상을 하게 되었다. 남로당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응원경찰 철수 및 무장대 신변보장 등을 주장하였고, 이를 김익렬이 수용하였다. 그러나 5월 1일 발생한 서북청년단에 의한 오라리(제주읍) 방화사건 평화협상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비밀리에 입도한 윌리엄 딘(Dean, 미 군정장관)은 5월 5일 제주도지사, 조병옥 및 김익렬(제9연대장)을 모아 회의를 하는데, 조병옥은 무장대를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딘은 조병옥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김익렬은 해임된다.

 

박진경(김익렬 연대장 후임)은 부임하면서 제주도민의 희생보다 폭동사건 진압을 우선시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후, 1달여 만에 부하에게 암살된다. 그 만큼 군 곳곳에 좌익세력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 때 조병옥은 군 대신 경찰(서북청년단 포함)의 투입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군인 중에 좌익세력이 많아서 토벌작전 수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병옥의 판단이 적중한 것인지 몰라도, 투입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서로 충성경쟁하듯 무장대·양민을 가리지 않고 과잉진압을 일삼으면서 제주 곳곳에서는 즉결처벌(학살·방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미군정은 토벌대를 지원을 위해 구축함 2대를 파견하고, 전투기를 제주상공에 상시 띄워 무장대에게 위압감을 주면서, 심지어 학살장면을 공중촬영까지 하였다.

 

정치적 복수의 결정판, 초토화

제주도는 4.3 사건으로 선거구 2개의 투표소가 불에 타면서 투표인원 부족으로 인하여 5.10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200명의 최초 국회의원을 뽑으려는 계획에서 제주도 2명이 누락되면서, 제주도는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의 섬으로 낙인이 찍혔다. 7월 20일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김구를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창출을 방해하려 한 제주도에 군대를 동원한 토벌명령이 내렸다.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에게 내려진 토벌명령은 병사들의 거부 및 여수·순천의 점령으로 인해 실행되지 않았다.

제주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출처 영암일보
제주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출처:영암일보]

결국 응원경찰·서북청년단·제9연대를 주축으로 제주도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초토화 작전」 이 선포되었는데, 이는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km 지점에 그은 선을 기준으로 그 윗쪽에 있는 중산간·산악지대에 사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들어간 자도 이유를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해 죽이라는 작전이다. 이는 무장대가 식량을 얻어가지 못하도록 한라산 중턱 마을을 없애기 위한 방안이었다. 11월 21일 국방부는 제주도계엄령을 선포했고, 11월 23일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때마침 수확을 앞두고 있던 시기라 많은 도민들이 해안가로 내려오지 않고 산간지역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가, 남로당 당원들과 함께 살해 당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 제주 전역에 걸쳐 벌였던 초토화 작전으로 160여 개 부락이 피해를 입었고 4.3 사건 희생자의 70~80% 가량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정치적 충성 맹세, 반공 이승만 

 

사실 5.10 총선 전에 미군정의 토벌작전으로 대부분의 무장대들은 이미 괴멸된 상태였음에도, 이승만이 무모하게 과잉진압을 지시한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 부분은 이승만의 방미 중인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트루먼 독트린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터키를 지원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으로, 적극적인 반공지원정책이다. 이승만은 시대정신(반공)을 통해 미국에게 과잉충성을 보이려 했고, 미국은 냉전의 최전방에서 싸울 반공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훈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 4.19 혁명 시위가 한창이던 1960년 4월 26일 오전에 시민들이 파고다공원 안으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끌어 내리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딛고 승승장구한 정치인이 결국에는 국민의 손에 이끌려 정치생명을 끝마친 씁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넘게 제주도민을 좌익세력으로 몰아 대량학살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중 10%인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4.3 사건은 500여 명의 좌익무장대를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3만여 명의 양민이 희생시킨 사건이 아닐까 한다. ​1978년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에 의하여 4.3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고, 김대중 정권에 들어 2000년 1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들어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된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 발언이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핍박받은 채로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한 영혼들에게 평온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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