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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

by Spacewizard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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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여식의 거처, 그 곳에서 태어난 인조

안동김씨 후궁의 궁호를 딴 이문안대신댁, 순화궁

친일파 의붓형제의 저택, 이윤용·이완용

고급요정을 거쳐, 여성교육과 복지의 상징

[Shorts] https://www.youtube.com/shorts/JvVpiN6Sln4

 

명월관과 태화관은 많이들 들어봤을 것이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세종대로 사거리 남동쪽(현 동아일보 사옥 터)에 2층 양옥 형태로 문을 연 명월관은 수라에나 오르던 궁궐음식을 일반에게 제공했었다고 언급했다. 태화관은 명월관과 연관이 있는데, 태화(泰和)라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재는 태화빌딩이 위치한 인사동 부지는 과거 왕가·세도가의 고급주택 부지로 역할을 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친일파의 손을 거쳐 유명한 요정이 위치했었다. 오늘은 순화궁 터였던 인사동 태화빌딩 부지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방범초소 이문 근처 인사동 순화궁 터 지도 카카오맵
조선시대 방범초소(이문) 근처, 인사동 순화궁 터 [지도:카카오맵]

왕가 여식의 저택

이 땅은 원래 길안현주(영응대군 딸)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던 집이었다. 이전 글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세종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 영응대군(세종 적8남)의 집이었던 동별궁을 소개하면서, 영응대군에게 아들이 없었다고 언급했다. 조선 초에는 대군의 적녀에게도 현주(縣主, 경국대전 이후 향주)라는 작호를 내렸다. 구수영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집 뜰에 부용당(芙蓉堂, 연못 안의 건물)을 세웠고, 부용당 앞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 후 태화정(泰和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정자가 오늘날 「태화」라는 이름의 시초이다.

 

효순공주(중종과 문정왕후 2녀)와 사위 구사안(구수영 증손)이 혼인한 뒤, 중종은 출합한 딸을 위해 이 집을 고쳐줬다. 일설에 의하며 중종이 딸 순화공주에게 선물하였다 하여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중종의 11명 딸들(공주 5명, 옹주 6명) 중에 순화공주는 없다. 이전 글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도 중종은 서장녀 혜순옹주가 출가할 때 월산대군의 집을 하사했다고 언급했는데, 중종이 딸들을 많이 아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집에서 태어난 구사맹(구사안 동생)의 딸(훗날 인헌왕후)은 정원군(선조 서5남)과 혼인하여 장남 능양군(훗날 인조)을 낳았다. 인조는 잠저였던 이 곳의 부용당 앞 연못가에서 글을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영조가 잠룡지(潛龍池)라고 이름 지어 친히 현판을 써서 걸어 놓았다. 영조가 이 곳을 방문하여 보관 중이던 효종의 어필을 본 뒤 구씨일가를 불러 상을 주거나 등용하라고 명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영조시대까지는 구씨 집안에서 소유 및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중종 가계도
중종 가계도

이문안대신댁, 안동김씨 김흥근

19세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 곳은 김흥근(김조순 조카)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이문안대신댁으로 불렸다. '이문안'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근처에 방범초소(이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종과 경빈김씨(헌종 후궁)는 1년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1849년 헌종이 죽은 후 경빈김씨는 김흥근의 집에 머물면서부터 경빈의 궁호를 따서 순화궁으로 불렸다. 1907년(광무 11) 6월에 사망할 때까지 경빈김씨는 이 곳에서 살았고, 죽은 후에는 사당이 설치되었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는 헌종(신정왕후 조대비 아들)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풍양조씨 가문이 정국운영의 주축이 되었고, 이내 안동김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언급했었다.

 

이 때 적잖은 위기감을 느꼈던 안동김씨 가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은 반전이었다. 1849년 6월 강화도령 철종이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25대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궁궐의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 왕비, 김조순 딸)가 조선사에서 유일무이한 두 번째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친정 안동김씨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순원왕후는 철종에게 간곡한 언문하교를 내리고 동생 김좌근, 재종(6촌) 김흥근 등을 중용하여 정치를 펼쳤다.

 

이완용 형에 이어, 이완용 별장

1908년(융희 2) 궁내부대신 이윤용(이완용 의붓형)이 소유하면서 1911년까지 거주한 후, 이완용에게 넘기고 이사했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는 이완용이 양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1900년까지 현재 헌법재판소 내 북서쪽에 잠시 살았다고 언급했었는데, 그 후 이완용의 집은 약현(현 중림동)에 위치했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의 체결에 앞장서자, 분노한 민중이 이완용의 약현집과 신주를 불태웠다.

 

이후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알선으로 잠시 남산 왜성구락부에서 살다가, 고종이 저동 남녕위궁(현 명동성당 인근)을 하사하여 그 곳에서 잠시 살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완용은 1911년 이윤용의 집을 매입하여 이사했고, 한식가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완용은 2년 뒤 1913년에 인왕산 아래 옥인동에 서양식 2층 저택을 지어 옮겼다. 이후 인사동집은 친일파들이 교류하는 별장으로 활용되었다.

고종은 상하이 덕화은행에 엔화로 예치된 비자금이 있었는데, 1903년과 1904년 2차례에 걸쳐 예치한 후 받은 영수증에는 고종의 명에 의해서만 처분이 가능하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폐위된 고종이 미국인 출신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에게 이 비자금을 미국은행에 옮겨 예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미 덕화은행 잔고는 비어 있었다고 한다. 고종의 명령에 의해서만 인출이 가능했던 돈이 이윤용에 의해 인출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은 이완용의 지시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윤용은 일본부터 훈장과 남작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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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 분점, 태화관

1915년 1월 대형호텔 「태화관」이 이완용의 인사동 별장에서 영업을 시작했는데, 아마도 태화정이 있는 자리여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1918년 안순환은 호텔을 인수하여 업종변경(호텔→요리점)을 통해 명월관 분점을 개업했다. 2층 규모의 태화관은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했으며,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총독부 관리와 부자들이 즐겨 찾았다. 별유천지(태화관 별관)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경 민족대표들은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식에 대한 사실을 알렸고, 바로 종로경찰서로 압송된다.

 

1919년 5월 명월관이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안순환은 이미 그 전에 요정(명월관·태화관)의 사업권을 양도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탁월한 판단능력과 빠른 실행력을 가진 트렌드세터(trendsetter)으로 보이는데, 이후 1922년 안순환이 남대문통 1정목(현 신한은행 광교빌딩 자리)에 식도원(食道園)을 개업한다.  

종교와 복지의 공간, 태화

그 뒤에도 태화관은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만든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가 자주 출연하는 장소로 인기를 끌다가, 1921년 이완용은 건물을 남감리교회재단에게 팔았다. 이 때 태화관의 계속되는 영업행위로 명도가 쉽지 않았는데, 감리교 선교부 측에서는 술판이 벌어질 때마다 마당에 들어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영업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에 대항하여 태화관 측에서도 영업이 끝난 새벽에 선교부들 집 앞에서 장구·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또한 낮에는 감리교 깃발이, 밤에는 명월관 깃발이 번갈아 가며 꽂히는 대치상황에서 결국 감리교가 승리했는데, 이는 감리교 측에서 세운 성조기를 함부로 뽑을 경우에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20년대 태화여자관 직원 단체사진
1920년대 태화여자관 직원 단체사진

1921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이자  감리교 여자교육기관이었던 태화복지재단(태화여자관)이 설립되면서 태화관 건물을 사용했는데, 이후 복지·교육기능을 각각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현 감리회 태화복지재단)과 태화여학교로 분리한다. 1936년 기업가·화가인 이숙종이 태화여학교를 인수해 성신여대가 되었다. 1938년 건물이 신축되고, 해방 이후 경찰서 등으로 사용되다가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운용되었다.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태화기독교사회관이 헐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순화궁의 전각들도 같이 사라졌다. 현재 태화빌딩의 주인은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이고, 하나로빌딩은 '재단법인 기독교 대한감리회유지재단 및 공유자들'로 되어 있으며 상층부는 중앙교회가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 태화기독교사회관 전경
1970년대 태화기독교사회관 전경

인사동 순화궁 터는 조선초 현주와 공주의 저택으로 사용되다가, 세도가 안동김씨의 이문안대신댁으로 불렸던 공간이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의 별장과 고급요정으로 사용된 후, 현재까지 근 100년을 종교단체에 의해 사회복지의 공간으로 이용되어 왔다. 구사안이 살던 동측(태화정)은 태화기독교사회관 관장사택에서 하나로빌딩이 되었고, 구사맹의 저택으로 인조의 잠저였던 서측(부용당)은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 태화빌딩이 된 것이다. 수 많은 권력자가 살았었고, 국가적 차원의 큰 일을 도모했던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여성들이 접대서비스를 제공하던 공간이 여성교육과 복지의 상징으로 거듭난 부분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Music] 속삭이는 기억들

https://www.youtube.com/watch?v=tmDQYCnu8m8

Whispered Memories #속삭이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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