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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

by Spacewizard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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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과 이어지는, 서대문 근처의 송월길

인의예지에 기초하여 이름지어진, 한성 사대문
땅의 기운이 허한 탓에 한글자를 추가된, 동대문

2번이나 이전된, 서대문

조카왕의 고립무원 상황에서 부상한, 수양대군

김종서가 철퇴를 맞은 공간, 돈의문 밖에 자택

[Shorts] https://www.youtube.com/watch?v=2Q5lfts347Y

 

대학진학을 위해 상경했던 1998년, 신세지게 된 재종숙댁이 독립문역 사거리 인근에 있었다. 이때 지하철은 주로 3호선 독립문역을 이용했지만, 조금 걸어서 5호선 서대문역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송월길을 걸어 강북삼성병원과 정동길을 빠져나와 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가끔 차만 지나다니는 송월길의 중턱에 위치한 스위스 대사관(1974년)을 지날 때면 이국적인 감상에 빠지곤 했고, 건너편 영천시장의 좁은 골목을 산책할 때는 왠지 모를 정감도 느끼곤 했었다. 과거 식당과 집들이 모여 있던 강북삼성병원 북쪽 건너편이 지금은 돈의문 관련 공간으로 깔끔하게 변해버려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오늘은 사라진 서대문의 역사와 서대문 바깥 동네에서 살았던 김종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의예지에 기초한, 사대문

 

1396년(태조 5) 도성 2차 준공과 함께 8개의 문이 들어섰다. 한성의 사대문(四大門)은 인간의 근본원리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다.

 

(仁, 봄·동) : 흥인지문(興仁之門, 인을 일으키는)
(義, 가을·서) : 돈의문(敦義門, 의를 두텹게)

(禮, 여름·남) : 숭례문(崇禮門, 예를 높이는)

(智, 겨울·북) : 홍지문(弘智門, 지혜를 넓히는)

 

동쪽이 허한 풍수적 한계를 지기(地氣)로 보충하고자 하고자, 동대문에는 지(之)를 추가하여 4글자로 정했다. 북대문은 애초에 홍지문으로 하려 하였으나, 사대부 세력의 반발로 숙정문(肅靖門)으로 정해진다. 이는 백성들이 지혜로우면 통치가 힘들다는 기득권적 사고에 기반한 것인데, 지(智, 지혜) 대신 정(靖, 꾀)를 넣은 것이다. 숙종시대에는 숙정문이 다시 홍지문으로 변경된다. 사대문을 개폐하는 신호로 보신각(普信閣, 신을 넓히는)의 타종을 활용하였는데, 인의예지만큼 중요한 덕목이었던 신(信)이 쓰이게 된다.

 

새로운 서대문(新門), 돈의문

 

돈의문은 현재 사직동 고갯길(사직터널 위)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413년(태종 13) 지맥을 끊고 있다는 풍수학자의 건의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운종가와 일직선상에 있는 경희궁 근처 서쪽 언덕(현 서울교육청)에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 서쪽 화살이 있는 문)이라 하였다. 서전문은 소살물(솟을 대문)이라는 방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경희궁 서쪽 고개마루턱에 솟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서전문은 이숙번의 집 앞에 계획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이숙번은 인덕궁(상왕 정종의 저택) 앞 옛길을 추천했다고 한다. 현재의 신하 권력이 과거의 국왕 권력을 제압했던 것이다. 태종실록은 "조정에서 이숙번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1422년(세종 4) 도성을 대대적으로 다시 구축하면서, 조정은 높은 지대로 인해 통행이 불편했던 서전문을 헐고 언덕 아래 남쪽에 다시 돈의문(현 정동사거리 북서쪽)을 세웠다. 이 때 돈의문·서전문과 구별하기 위하여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신문(新門, 새문)이라 불렀고, 돈의문 안쪽 부근을 새문안(新門內)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돈의문 아래를 지나서 전차가 다녔는데,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시구역개수계획)에 의해 돈의문이 철거되었다. 원래 전차궤도 복선화를 위해 흥인지문·돈의문을 모두 헐려고 했으나, 돈의문만 철거한 것이다. 흥인지문이 기념물로 보존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철거되고 남은 돈의문의 석재는 주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하여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대문 위치 이동 지도 카카오맵
서대문 위치 이동 [지도:카카오맵]

사대사상의 상징, 모화관

 

모화루(慕華樓, 중화를 사모하는)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객관으로, 1407년(태종 7) 송나라의 영빈관(迎賓館, 손님을 맞이하는)을 모방하여 당시의 돈의문(현 사직터널 위 추정) 밖에 건립하였다. 훗날 모화관으로 변경되었다. 1430년(세종 12) 모화루를 모화관으로 개칭하면서 그 앞에 홍살문을 세우고, 남쪽(현 금화초등학교)에는 연못을 파서 서지를 만들었다.

 

1537년(중종 32) 홍살문보다 격식을 더 갖춘 형식의 청기와문을 만들어서 영조문(迎詔門, 황명을 맞이하는)이라 하였다가, 1539년(중종 34) 중국사신의 건의로 영은문(迎恩門, 은혜를 맞이하는)으로 개칭되었다. 서지(西池)는 동서 380척(114m), 남북 300척(90m), 깊이 2~3장에 이르는 큰 연못으로, 못이 완성된 후 개성 숭교사 연지의 연꽃들을 배에 실어 뿌리째 옮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사신들이 한성에 도착하면, 조선 왕세자가 모화관에서 예를 행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며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사무실로 쓰고, 영은문 북쪽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8년 독립문과 영은문 주춧돌
1898년 독립문(좌), 영은문 주춧돌(우)

정치의 기회를 엿본, 수양대군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은 수양대군에게 여러 일을 맡겼는데, 이는 수양이 무예를 비롯한 다방면에서(음악·불교·어학 등)에서 깊은 조예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종에게 여진족의 귀화정책·병법을 조언하거나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자암 중창을 건의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고 한다.

 

1452년(문종 2) 5월 문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 후, 12세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만큼 어릴 경우에는 왕실어른(보통 선왕비)수렴청정 하지만, 단종의 할머니(소헌왕후, 세종비)·어머니(현덕왕후, 문종비) 모두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홀로 서서 도움이 없는)에 처한 조카왕을 지켜보며, 수양을 포함한 숙부들은 본격적으로 조정에 관여하며 정치에 나섰다. 만약 소헌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단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수양이 어머니의 면전에서 조카를 내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을까.

 

왕의 숙부들을 비롯종친세력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면서, 두 세력의 경쟁이 눈에 띄었다. 바로 가장 큰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 바로 아래인 안평대군이었다. 단종이 즉위한 해 7월, 수양은 친위세력(홍윤성·한명회·권람·홍달손·양정 등)을 규합한 후, 동생 안평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이전 글 <조선 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 단종 즉위 후 수양이 영응대군이 이혼한 첫 부인과의 재결합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영응으로부터 쿠데타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수양이 김종서를 살해한 그 날 밤에도, 수양은 김종서에게 영응의 부인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태종과 세종 가계도

성 밖의 대신, 김종서

 

태종시대 관직생활을 시작한 김종서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대간-중신-대신)를 거친 문신으로, 세종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 대신(大臣)은 전·현직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게만 붙인 칭호이며, 삼정승이 아닌 2품 이상의 고위관리중신(重臣)이라 하였다. 이목지신(耳目之臣)으로 불렸던 대간(臺諫)은 다음의 두 관원을 합칭한 명칭으로, 사헌부·사간원의 관원을 일컫었다.

 

대관(臺官) : 탄핵·감찰

간관(諫官) : 간쟁·봉박

 

대사헌(사헌부 종2품)부터 정언(사간원 정6품)까지가 대간이었으며, 주된 임무는 백관을 규찰하며 왕에게 간언(諫言)하는 일이었다. 대계(臺啓)는 대간이 올리는 계사로, 궐내 승정원 옆의 대청(臺廳)에서 결정하였다. 대계는 시정(時政)에 관련된 모든 사안·관리들에 관한 내용을 포함했다. 작은 체구의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북방에서 6진 개척을 지휘하며 「백두산 대호(大虎, 큰 호랑이)」로 명성을 날렸다. 영의정 황희는 김종서의 능력을 눈여겨 봤고,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하면서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 김종서도 황희 앞에서는 늘 긴장했다고 한다.

 

1830년(순조 30) 한성의 사적들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김종서의 자택을 '돈의문 밖 고마청(雇馬廳, 민간의 말을 징발하는 관청)'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돈의문 바로 바깥(현 서대문역 농업박물관)에 김종서의 집이 있었는데, 수양이 습격한 공간이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도성 안에 거주한 것과 달리, 북방경험이 많았던 김종서는 여진족이 출몰하는 함경도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도성 밖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북방정보가 드나들던 돈의문 밖에서 사전에 정보를 독점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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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명분 쌓기, 독단적 권력

 

1452년(단종 즉위년) 단종은 즉위교서에는 의정부 대신에게 국정을 위임했는데, 즉위 당시 대신라인은 황보인·남지·김종서였다. 그 해 10월 남지가 신병으로 사임하면서, 12월 김종서·정분이 각각 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좌의정 김종서가 황표정사(黃標政事, 누런 쪽지를 붙이는 인사제도)를 통해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둘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조시대 기록에서조차 김종서 일가의 파격승진 정도의 특혜는 있었지만, 김종서의 사치·매관매직·국정농단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김종서는 안평대군 측에서 수양대군 세력을 견제하였는데, 의정부 세력들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가 수양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단종 즉위 후 1년 5개월이 지난 1453년(단종 1) 10월, 수양은 휘하세력들과 함께 자택후원에 소집하여 거사의사를 알렸고, 종복 임어을운과 함께 김종서 집으로 향했다. 이 때 수양은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빌리면서 영응대군 부인에 관한 서찰을 건냈다. 김종서가 달빛에 서찰을 비추던 순간, 임어을운이 김종서 머리 위로 철퇴를 날렸다고 한다. 김승규(김종서 아들)은 즉사하지 않은 채 쓰러진 김종서를 감싸자, 양정은 김승규를 칼로 죽였다. 정신을 차린 김종서는 입궁하기 위해 부인가마를 타고 사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입성하지 못한 채 사돈집에 숨었다. 날이 밝은 후, 다시 찾아온 수양의 부하들에게 김종서는 죽게 된다.

 

김종서에게 철퇴를 휘두른 직후, 수양은 입직승지 최항을 불러서 불궤한 짓을 공모한 김종서을 먼저 처단했으며 나머지 세력도 모두 토벌하고자 함을 전했다. 안평에게 동조하던 관료들은 그날 밤 모두 숙청(살해·축출)되었는데, 이를 「난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한다. 한마디로 유력한 2명의 종친(수양·안평)을 중심으로, 관료들이 개입되어 벌어진 권력쟁탈전었던 셈이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소재하는 '재동'이 계유정난으로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마을사람들이 집 안에 있는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는 언급을 했었다.

 

과거의 사건들에는 희노애락이 담겨 있지만,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사건을 반추해보면서,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미래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오늘날 서대문이라는 공간에서 약 500여년 전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문득 그 시절의 바람이 느껴진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즐거운 일인가.

 

[Music] 권력 뒤의 슬픔

https://www.youtube.com/watch?v=Pn0I8qswo7g

Sadness Behind Power #권력 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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