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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

by Spacewizard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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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위해 상경했던 1998년, 신세지게 된 재종숙댁이 독립문역 사거리 인근에 있었다. 이때 지하철은 주로 3호선 독립문역을 이용했지만, 조금 걸어서 5호선 서대문역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송월길을 걸어 강북삼성병원과 정동길을 빠져나와 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가끔 차만 지나다니는 송월길의 중턱에 위치한 스위스 대사관(1974년~)을 지날 때면 이국적인 감상에 빠지곤 했고, 건너편 영천시장의 좁은 골목을 산책할 때는 왠지 모를 정감도 느끼곤 했었다. 과거 식당과 집들이 모여 있던 강북삼성병원 북쪽 건너편이 지금은 돈의문 관련 공간으로 깔끔하게 변해버려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오늘은 사라진 서대문의 역사와 서대문 바깥 동네에서 살았던 김종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새로운 서대문(新門), 돈의문

 

1396년(태조 5) 도성 2차 공사 완료와 함께 8문이 들어섰는데, 이때 지금의 사직동 고갯길(현 사직터널 위 추정)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대문을 '돈의문'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1413년(태종 13) 지맥을 끊고 있다는 풍수학자의 건의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운종가와 일직선상에 있는 경희궁 근처 서쪽 언덕(현 서울 교육청 자리)에 문을 내어 '서전문'이라 하였다. 당시 이숙번이 서전문의 계획지가 자기 집 앞이라는 것을 알고, 인덕궁(상왕 정종의 집) 앞 옛길을 추천했다고 하는데, 태종실록은 "조정에서 이숙번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고 전한다. 이는 현재의 신하 권력이 과거의 국왕 권력을 제압했던 것이다.

 

1422년(세종 4) 도성을 대대적으로 다시 쌓을 때, 높은 지대로 인해 백성들의 통행이 불편했던 서전문을 헐고 언덕 아래 남쪽에 다시 돈의문(현 정동사거리 북서쪽)을 세웠다. 이 때 첫 돈의문이나 서전문과 구별하기 위하여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신문(新門, 새문)이라 부르고, 돈의문 안쪽 부근 새문안(新門內)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돈의문을 지나서 전차가 다녔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전차 궤도 복선화를 위해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려고 했으나, 흥인지문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기념물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결국은 돈의문만 철거했다. 이 때 철거되고 남은 돈의문의 석재는 주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하여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대문 위치 이동 지도 카카오맵
서대문 위치 이동 [지도:카카오맵]

 

사대사상의 상징, 모화관

 

모화관은 조선시대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1407년(태종 7) 송나라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당시의 돈의문(현 사직터널 위 추정) 밖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라 하였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현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연못을 파서 '서지'를 만들었다. 서지는 동서 380척(114m), 남북 300척(90m), 깊이 2~3장에 이르는 큰 연못으로, 못이 완성된 후 개성 숭교사 연지의 연꽃들을 배에 실어 뿌리째 옮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사신들이 한성에 도착하면 모화관에서 조선의 왕세자가 예를 행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며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사무실로 쓰고, 영은문 북쪽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8년 독립문과 영은문 주춧돌
1898년 독립문(좌), 영은문 주춧돌(우)

 

정치의 기회를 엿본, 수양대군

 

수양대군(이하 수양)은 무예를 비롯한 음악, 불교, 어학 등 다방면에서 깊은 조예를 보여,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은 그에게 여러 일을 맡겼다. 문종 대에도 수양은 간간히 여진족의 귀화정책이나 병법에 대해 문종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부왕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자암 중창을 건의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수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관여하며 정치를 시작한 것은 1452년(문종 2) 5월 문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어린 왕이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없는 경우에는 왕실어른이 도와주게 되고, 보통은 선왕의 비인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종에게 있어서 이미 어머니(현덕왕후)와 할머니(소헌왕후)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왕을 도와 수렴청정을 해줄만한 왕실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소헌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단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세조가 어머니의 면전에서 조카를 내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왕의 숙부들을 비롯한 종친세력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단종의 가장 큰 숙부인 수양과 그 바로 아래인 안평대군(이하 안평) 두 세력의 경쟁이 두드러졌다. 수양은 단종이 즉위한 해 7월에 홍윤성, 한명회, 권람, 홍달손, 양정 등의 세력을 규합한 후, 안평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노력하였다. 이전 글 <조선 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 단종 즉위 후 수양이 영응대군(이하 영응)이 이혼한 첫 부인과의 재결합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영응으로부터 쿠데타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수양이 김종서를 살해한 그 날 밤에도, 수양은 김종서에게 영응의 부인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태종과 세종 가계도

 

성 밖의 대신, 김종서

 

김종서는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간관·감찰을 맡으면서, 세종에게 큰 신임을 받은 문신이었다.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북방에서 6진의 개척을 지휘하면서 '대호'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능력을 눈 여겨본 영의정 황희가 김종서를 후계자로 낙점하여 엄하게 대했고, 김종서도 황희 앞에서는 늘 긴장하였다고 한다. 순조 때 편찬된 <한경의략>에는 “돈의문 밖 고마청(입성하기 전 말을 갈아타던 곳)에서 김종서 장군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돈의문 바로 밖(현 서대문역 농업박물관 자리)에 김종서의 집터가 있었는데, 바로 수양의 습격을 받은 곳이다.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은 도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북방 경험이 많은 김종서는 여진족이 출몰하는 함경도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도성 밖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북방의 정보가 드나들던 돈의문 밖에서 사전에 정보를 독점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쿠데타의 명분 쌓기, 독단적 권력

 

단종의 즉위교서에 따라 국사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의정부 대신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곧이어 김종서는 좌의정이 되면서 황표정사를 통해 인사를 펼치는 등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둘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조시대 기록에서조차 김종서 일가의 파격승진 정도의 특혜는 있었지만, 김종서가 사치나 매관매직, 국정농단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김종서는 안평의 편에서 라이벌 수양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의정부 세력들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가 수양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단종 즉위 후 1년 5개월이 지난 1453년(단종 1) 10월 수양은 휘하 세력들과 함께 자택 후원에 모여서 거사를 할 뜻을 알리고, 종복 임어을운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이 때 수양은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빌려줄 것을 부탁함과 동시에, 영응대군 부인의 일에 관한 서찰을 봐 줄 것을 요청한다. 달빛에 서찰을 비추던 순간, 임어을운이 김종서 머리 위로 철퇴를 날렸으나 바로 죽이지는 못했다. 쓰러진 김종서를 아들 김승규가 몸으로 감싸자, 양정이 칼을 찔러 김승규는 바로 죽었다. 깨어난 김종서는 입궁하기 위해 부인가마를 타고 4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입성하지 못한 채 사돈댁에 숨어들었다.  결국 김종서는 날이 밝은 후 다시 찾아온 수양의 부하들에게 결국 살해당했다. 수양은 김종서에게 철퇴를 휘두른 직후, 곧장 입직승지 최항을 불러 불궤한 짓을 공모한 김종서을 먼저 처단하였으며 나머지 세력들도 모두 토벌하고자 한다고 알렸다. 황보인을 비롯하여 안평에게 동조하던 관료들은 그날 밤 모두 살해당하거나 축출 당하는 등 철저히 숙청되었다. 이를 난을 평정하였다는 뜻으로 '계유정난'이라 하며, 한마디로 수양과 안평의 두 유력한 종친을 둘러싸고 관료들이 개입되어 벌어진 권력쟁탈전이었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소재하는 '재동'이 계유정난으로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마을사람들이 집 안에 있는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는 언급을 했었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 폭주

 

계유정난이 일어난 바로 그 날 밤 단종은 수양에게 국정을 위임하였고, 다음 날 수양을 정식 임명하였다. 수양에게 협조한 정인지, 한확, 정창손,박종우 등과 휘하에 있던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등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관직, 노비와 토지를 하사했다. 주목할 점은 정난공신에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출신들이 대거 포함되었는데, 이는 의정부 중심의 행정체제 속에서 관료조직 내에 쌓인 불만을 해결하면서 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으려고 한 시도라고 한다. 정난으로 김종서 세력에서 행해지던 독단적 권력 행사가 고스란히 수양의 추종세력으로 이어지면서 비정상적인 정치행태가 지속되었다. 지속 가능하지 않는 이런 정치행태 속에서는 수양이 직접 왕위에 오르는 것 말고는 정치생명의 연장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종 복위의 실패, 또 다시 숙청

 

1455년(단종 3) 수양의 추종세력인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은 수양을 왕으로 추대하고, 15세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상왕이 된 단종은 왕비와 함께 창덕궁에서 지내면서, 월 1회 정도 세조의 문안과 사냥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재, 유성원 등 문관이 일부 무관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1456년(세조 2)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행사에 왕과 상왕, 세자가 모두 참여하며, 여기에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나갈 것을 알고 이들을 포섭하여 연회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당일에 세자가 병으로 인하여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고,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말라고 세조가 명을 내림으로써 거사는 일단 보류되었다. 하지만 이날 밤 계획이 틀어질 것을 불안하게 여긴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을 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은 내부고발에 따른 배신이었다.

 

먼저 압송당한 성삼문이 단종의 모의 가담과 공모자들의 이름을 밝히자, 박팽년도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팽년은 세조에게 '나으리'라 칭하며 그의 신하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팽년은 심한 고신 끝에 6월 7일 옥중에서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잡혀 가기 전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극형이라 함은 고문 → 참수 → 능지처사 → 효수 순인데, 조선시대의 능지처사는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는 대신에, 사지를 수레에 매어 소를 달리게 하는 거열형으로 집행되었다. 거열형은 군기시(현 한국프레스센터)의 앞길에서 모든 관리들을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하는 장면을 보게 하였다. 이 때 죽은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死)육신이라 부른다. 단종 복위 모의 연루자들의 집안 여인들은 세조 측근의 노비나 종으로 끌려간 후, 10~20년 후에야 사면되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고 한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1457년(세조 3) 6월 17세 단종은 50여명과 함께 '육지의 섬'으로 불리는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난다.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준 지 2년 뒤,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 실패 1년 뒤였다. 그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자, 2달 만에 영월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적6남으로, 계유정난 직후 수양의 배척을 받아 경기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경상도 순흥에 이배되었다. 1차 단종복위 사건 후 1년 3개월이 지난 1457년(세조 3) 9월 금성대군은 유배지 순흥에서 영남 유생들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으나, 순흥 관노의 밀고로 사건 전모가 드러났다. 이를 2차 단종복위 사건이라 부르며, 이 일을 계기로 10월 금성대군이 사사하고 단종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스스로의 의지로 사약을 거부하다가 끝내 타살을 당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한다. 사약은 임금이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는 죽음을 내리는 은사의 개념이었는데, 적통의 왕인 단종은 자신을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을 만한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서대문에서 출발하였는데 영월까지 넘어왔다. 과거의 사건들에는 희노애락이 담겨 있지만,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사건을 반추해보면서,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참고하여 현재와 미래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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